‘태종 이방원’은 일반적으로 묘호와 이름이 같이 불리는 인물이다. 고려 말 일반 관료로서의 정치활동부터 조선 국왕으로서 국정 운영을 했던 모든 과정을 망라해야만 ‘태종 이방원’의 정체성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태종 이방원’이라는 호칭처럼 ...
‘태종 이방원’은 일반적으로 묘호와 이름이 같이 불리는 인물이다. 고려 말 일반 관료로서의 정치활동부터 조선 국왕으로서 국정 운영을 했던 모든 과정을 망라해야만 ‘태종 이방원’의 정체성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태종 이방원’이라는 호칭처럼 종합적으로 파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태종은 조선 초기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한 수성(守成) 군주로서 평가되지만, 한편으로는 권력 지향적인 패왕(覇王), 왕조 교체와 왕권 강화를 위해 공신, 외척, 관료 등을 제거한 무자비한 인물이라는 인식도 강하다. 어쨌든 고려 말 조선 초 정치적 부침이 많았던 때에 결국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 구조를 만들어낸 인물이어서 오랫동안 관심을 받아 왔다. 하지만 큰 관심에 비해 연구가 많이 이뤄지지는 못했다. 물론 즉위 이후 정국 운영이나 왕권 강화 과정을 다룬 연구는 많다. 반면, 고려의 관료이면서 조선의 왕자로서 정치 변동의 핵심에 있었는데, 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였다. 주로 전주 이씨 가문의 위상을 밝히고 잠저기의 수학 및 교유관계, 문과 급제시의 동년들에 대해 살폈던 정도이다. ‘왕자의 난’을 통한 집권 과정을 다룬 연구도 있지만, 주로 변란의 전개 과정과 권력관계의 변동에 초점을 맞췄다. 즉, 가문 배경, 교유관계, 과거 급제, 변란의 발생과 경위 등 보다 객관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내용이 다뤄졌다고 볼 수 있다. 아직 이방원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오롯이 파악하고 제대로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이처럼 이방원을 다룬 연구가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관련 사료가 의외로 적다. 조선 초기의 사료는 실록,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관찬 기록, 일부 문신의 문집 등에 불과하다. 『태조실록』에서도 이방원 관련 기사는 10여 건에 불과하다. 왕자의 난 관련 기사를 제외하면, 10건도 되지 않는다.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관련 기사는 더 적다. 이방원의 과거 급제 시기가 17세인 1383년(우왕 9)이라 우왕대에 두드러진 활동을 펼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창왕 즉위 이후에는 이색을 따라 명 사행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권력관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정치활동에 대한 기록은 소략한 편이며, 객관적인 규명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방원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그가 즉위한 후에 작성되었다. 대다수는 부왕 태조가 훙서한 1408년(태종 8) 이후에 편찬된 것이다. 편찬 시기만 보더라도 역사 기록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노력과 태종 자신의 권력 강화 과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즉, 고려 말 이래 문신 이방원, 왕자 이방원의 업적은 실상 국왕의 위상에 흠결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의 관찬 기록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건국 초기에는 국정에 사관이 상시 참관하지 못했고, 실록을 편찬할 때 직서(直書) 원칙도 잘 지켜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본 연구는 이방원에 대해, 특히 즉위 이전의 이방원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료 내용이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 관련 역사 기록이 증보되는 양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현재 이방원 관련 기록을 모아 편찬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있다. 앞으로 각 사료 편찬(혹은 제작)의 시기, 의도, 주체 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며 고려 말 조선 초 이방원의 정치적 삶을 재조명할 것이다. 또한 이방원에 대한 기록의 증보 과정에 대해 역사적인 규명을 시도하려고 한다. 시대 변화에 따른 중층의 인식과 평가를 통해 ‘태종 이방원’을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보겠다.
기대효과
시대 변화에 따라 역사 인식이 달라지고, 사실(史實)이 중첩적으로 누적된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해당 사료의 편찬 시기, 목적, 의도 등을 간과하고 사료에 서술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곤 한다. 최근에 이르러 사서나 문집, 금석문을 ...
시대 변화에 따라 역사 인식이 달라지고, 사실(史實)이 중첩적으로 누적된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해당 사료의 편찬 시기, 목적, 의도 등을 간과하고 사료에 서술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곤 한다. 최근에 이르러 사서나 문집, 금석문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료의 채집과 정리 그리고 관련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자료 가공의 방향성과 성격을 파악하는 작업이 행해지고 있다. 본 연구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태종의 강력한 왕권이 즉위 이전의 이방원에 대한 평가와 이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면서 시대 변화에 따라 누적된 겹겹의 평가를 층위별로 이해하고자 한다. 나아가 본 연구를 통해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 변동과 그 과정에서의 이방원의 역할을 재조명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본 연구는 즉위 이전의 이방원을 주목하지만, 향후 국왕으로서의 삶에 대해서도 살필 예정이다. 태종은 무엇을 위해 ‘왕권 강화’로 설명되는 정치운영을 했을까? 물론 왕조국가에서 국왕 권위와 권력 강화는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태종의 경우에는 그의 정치적 결단 혹은 행위 대부분이 ‘왕권 강화’로 설명된다. 본 연구자는 지금까지 정치세력 연구를 진행해 오면서 조선 건국 초기의 ‘왕권’이 갖는 특질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우선 태종에게 부족했던 점은 권력이 아니라 권위였다고 본다. 그는 이미 집권 초기부터 국왕 중심적인 권력 구조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건국 초기 새 왕조의 불완전한 위상을 뒤엎을 만한 사건, 즉 자신이 주도했던 ‘왕자의 난’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고려사』, 실록 등의 편찬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관료들은 역사를 편찬할 때 권력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서 편찬 시기와 방법 등을 둘러싼 논란이 거셌지만, 결과적으로 태종의 의지대로 역사서 편찬이 행해졌다. 이후 세종이 직서주의에 입각한 사서 편찬 작업을 대대적으로 수행하지만, 과연 태종의 뜻을 거스르는 수정 작업을 했을지는 미지수다. 엄밀한 사료 검토를 통해 문헌에 내재한 권력의 요소를 파악함으로써 한 개인의 삶에 대한 사실(史實)의 층위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연구요약
고려 말 조선 초의 이방원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국왕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잘 준비된 사람, 혹은 이미 국왕의 자질을 잘 갖추고 있는 완성형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 주목한 바는 각 문헌의 편찬 목적 및 과정이다. 조 ...
고려 말 조선 초의 이방원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국왕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잘 준비된 사람, 혹은 이미 국왕의 자질을 잘 갖추고 있는 완성형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 주목한 바는 각 문헌의 편찬 목적 및 과정이다. 조선 초기에는 과거 사실이 제대로 수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편찬이 이루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내용을 충실하게 보완하기 위함이었지만, 권력관계의 변동에 따르는 후속 조치이기도 했다. 본 연구는 위의 사서들을 비롯한 각종 사료에서 이방원에 대한 서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추이를 따라가고자 한다. 지금까지 역사가들은 승리자들의 주장과 논리를 별개로 하며 당대의 시대 상황을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했고, 그 시대를 살아갔던 한 개인의 삶을 오롯이 파악하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의 두 나라를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관료·왕자·국왕·태상왕 등의 다양한 삶을 살았던 이방원은 강력한 권력으로 기록을 장악하였으며, 이로 인해 즉위 이전의 삶이 제대로 설명되지 못했다. 물론 본 연구도 이방원의 삶에서 사실(事實)을 밝혀내려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사실(史實)이 후대의 역사서에서 어떻게 서술되고 있으며, 어떠한 계기로 서술의 변화 양상이 나타나는지 살펴보겠다. 연구 대상 문헌은 주로 조선 전기의 사료에서 즉위 이전의 이방원의 행적에 대해 살펴볼 예정인데, 차후 태종의 권력, 국가의 정통성 확보 노력 등의 기제가 역사 기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동사강목』,『연려실기술』등의 조선 후기 문헌도 분석하여 시대 변화에 따른 인식의 차이도 파악해 볼 것이다. 일례로 『고려사』를 비롯한 조선 초기의 사서에서, 조선 건국에 이방원의 공헌이 많았음을 언급하는 대목은 다양한 형태로 찾을 수 있다. 우선 조준이 1392년 건국 당시 "오늘의 일은 공이 한 사람에 있다”라고 언급했던 기록이 있다(『태종실록』총서). 1400년의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이방간에게 그의 처질(妻姪) 이래(李來)가 개국과 정사의 공이 이방원에게 있음을 들어 만류했다고 서술되어 있다(『정종실록』, 2년 1월 28일). 1408년(태종 8)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 조성되면서 제작된 신도비(권근 製)에도 개국∙정사의 공이 모두 이방원의 공적(開國定社, 咸我殿下之績)이라는 수사는 이어졌다(『태종실록』, 태종 9년 윤4월 13일) 이상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사실들도 『고려사』, 『고려사절요』, 실록 등에 흩어져 서술되어 있다. 1390년(공양왕 2) 윤이·이초 사건 이후 정몽주는 이성계세력과 상반된 길을 선택했고, 이방원은 수세에 몰린 이성계세력에 막바지 건국 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으로 부각되었다. 그는 “정몽주 등이 우리 가문을 무너뜨리려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리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효(孝)이니, 마땅히 휘하 군사를 불러 모아 뜻밖의 일을 대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으며, 결국 정몽주를 살해하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이성계 추대는 결정되었다. 이처럼 고려 말 이성계 세력이 정몽주 세력과의 대립에서 승리한 직접적 계기가 이방원에게 있었다는 점은 각종 기술에서 확인된다. 이를 통해 본 연구에서는 고려 말 권력관계 속에서 이방원의 정치적 역할을 분석할 것이다. 더불어 조선 초기의 정치 변동의 과정에서 중첩되어 갔던 평가의 의미도 파악하고자 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본 연구는 즉위 이전 이방원의 삶과 정치활동을 분석하였다. 조선 초기 이방원 관련 기록의 대다수는 부왕 태조가 훙서한 1408년(태종 8) 이후에 작성되었다. 편찬 시기만 보더라도 그에 대한 기록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노력과 태종 자신의 권력 강화 과정으 ...
본 연구는 즉위 이전 이방원의 삶과 정치활동을 분석하였다. 조선 초기 이방원 관련 기록의 대다수는 부왕 태조가 훙서한 1408년(태종 8) 이후에 작성되었다. 편찬 시기만 보더라도 그에 대한 기록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노력과 태종 자신의 권력 강화 과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문헌의 편찬 목적이 왕조의 정당성 확보와 결부되었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편찬자 역시 그의 신하들이다. 특히 하륜, 권근 등은 태종의 집권에 공을 세운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그렇다면 고려 문신 이방원, 조선 왕자 이방원의 활동은 국왕 태종의 위상에 흠결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방원 관련 사료는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방원을 오롯이 파악하고 제대로 평가하려면 ‘객관성’을 보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방원 관련 기록을 모아 편찬 연대순으로 정리한 뒤에 각 사료 편찬(혹은 제작)의 시기, 의도, 주체 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면서 시대 변화에 따른 중층의 인식과 평가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밝히고자 했고, 이로써 기존의 부족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조선 초기의 문헌에서는 국왕 권력 강화와 관련하여 건국 과정에서의 이방원의 공헌을 높이 부각하는 사례가 많았다. 1400년 하륜 등이 정안공의 세자 책봉을 요청할 때도 조선 건국 과정(‘정몽주의 난’), 제1차 왕자의 난(‘정도전의 난’)에서 세운 공로를 내세웠고, 정종의 선위교서에서도 ‘조선의 재조(朝鮮之再造)’를 이뤄냈다는 수식어까지 동원하며 그를 추켜세웠다. 후대 실록에서는 이방원 관련 기록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시호·묘호 등의 추숭, 의례의 변경 등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사례가 많았다. 예를 들면 세조대에 문종의 현릉(顯陵)을 세우면서 이방원의 건국 공헌을 높게 평가하는 사례, 공정왕(恭靖王, 정종)의 묘호 관련 논의에서 태조·정종· 태종의 공로를 논의․평가했던 사례 등이 있다. 그리고 조․종(祖宗)의 묘호 논의가 발생할 때에도 이방원의 건국 공로가 언급되기도 했다. 한편, 조선 후기 정몽주의 ‘충절’이 숭상되면서 이방원 관련 기술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살폈다. 또한 일반 관료의 문집에 ‘왕자의 난’에 대한 비판적 의견도 있어 주목된다.
영문
This study analyzed the life and political activities of Yi Bang-won before he ascended the throne. Most of the records related to Yi Bang-wo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ere written after 1408, when his father Taejo died. Looking at the compilation ...
This study analyzed the life and political activities of Yi Bang-won before he ascended the throne. Most of the records related to Yi Bang-wo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ere written after 1408, when his father Taejo died. Looking at the compilation period, the record of it was inevitably influenced by the efforts to secure the legitimacy of Joseon's founding and the process of strengthening King Taejong's own power. It is also important that the purpose of compilation of the literature was linked to securing the legitimacy of the dynasty. The compilers were also King Taejong's vassals. In particular, Ha Ryun and Kwon Geun are Jwamyeong Gongshin(佐命功臣) who contributed to King Taejong's process of taking power. If so, it can be said that the activities of ‘Yi Bang-won, a Goryeo civil official’, and ‘Yi Bang-won, a Joseon prince’, were organized in the extent that they did not flaw the status of King Taejong. It is difficult to say that historical records related to Yi Bang-won guarantee objectivity. To fully understand and evaluate Yi Bang-won, the 'objectivity' must be supplemented. Therefore, after collecting the records related to Yi Bang-won and organizing them in chronological order of compilation, it was intended to reveal how the accumulated perceptions and evaluations change according to the changes of the times by actively considering the timing, intention, and subject of each historical record compilation. This study attempted to secure the 'objectivity'.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본 연구는 즉위 이전 이방원의 삶과 정치활동을 분석함으로써 ‘태종 이방원’을 재평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조선 초기 이방원 관련 기록의 대다수는 부왕 태조가 훙서한 1408년(태종 8) 이후에 작성되었다. 편찬 시기만 보더라도 그에 대한 기록은 조선 ...
본 연구는 즉위 이전 이방원의 삶과 정치활동을 분석함으로써 ‘태종 이방원’을 재평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조선 초기 이방원 관련 기록의 대다수는 부왕 태조가 훙서한 1408년(태종 8) 이후에 작성되었다. 편찬 시기만 보더라도 그에 대한 기록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노력과 태종 자신의 권력 강화 과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문헌의 편찬 목적이 왕조의 정당성 확보와 결부되었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편찬자 역시 그의 신하들이다. 특히 하륜, 권근 등은 태종의 집권에 공을 세운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그렇다면 고려 문신 이방원, 조선 왕자 이방원의 활동은 국왕 태종의 위상에 흠결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방원 관련 사료는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방원을 오롯이 파악하고 제대로 평가하려면 ‘객관성’을 보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방원 관련 기록을 모아 편찬 연대순으로 정리한 뒤에 각 사료 편찬(혹은 제작)의 시기, 의도, 주체 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면서 시대 변화에 따른 중층의 인식과 평가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밝히고자 했고, 이로써 기존의 부족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일단 즉위 이전(1367∼1400) 기록을 정리하여 1388년 위화도 회군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세력 기반을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하나는 가문 배경과 혼인(가문의 명성, 경제‧군사적 기반) 관련 기록이고, 그로 인한 혈연·혼인관계의 분석이다. 그리고 건국 공헌[1388년(우왕 14, 22세) 위화도회군부터 1392년 조선 건국 무렵까지]에 관련된 기록과 집권 과정[태조대에 왕자가 된 이후 1400년 즉위하기까지] 관련 기록의 증보 양상을 분석하였다. 즉 조선시대 문헌들에서 이방원 관련 수사(修辭)들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를 살피고자 했다. 국왕의 위상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이방원 관련 기록은 저술 시기, 필자 등을 매우 적극적으로 감안해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이방원의 공헌 관련 서술의 추이를 살폈다. 또 이와 별개로 당대 조정의 논의에서 그의 공로에 대한 언급이 정치적으로 활용되었던 점도 다루었다. 일례로 1400년 하륜 등이 정안공의 세자 책봉을 요청할 때도 조선 건국 과정(‘정몽주의 난’), 제1차 왕자의 난(‘정도전의 난’)에서 세운 공로를 내세웠고, 정종의 선위교서에서도 ‘조선의 재조(朝鮮之再造)’를 이뤄냈다는 수식어까지 동원하며 그를 추켜세웠다. 후대 실록에서는 이방원 관련 기록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시호·묘호 등의 추숭, 의례의 변경 등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사례가 많았다. 예를 들면 세조대에 문종의 현릉(顯陵)을 세우면서 이방원의 건국 공헌을 높게 평가하는 사례, 공정왕(恭靖王, 정종)의 묘호 관련 논의에서 태조·정종· 태종의 공로를 논의․평가했던 사례 등이 있다. 그리고 조․종(祖宗)의 묘호 논의가 발생할 때에도 이방원의 건국 공로가 언급되기도 했다. 한편, 조선 후기 정몽주의 ‘충절’이 숭상되면서 이방원 관련 기술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살폈다. 또한 일반 관료의 문집에 ‘왕자의 난’에 대한 비판적 의견도 있어 주목된다. 한 개인이 국왕 선대의 행위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기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도 신흠(申欽, 1566, 명종 21∼1628, 인조 6)의 『상촌집(象村集)』에서는 ‘제1차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 등의 역사적 사건을 거론하지 못했던 당시 여론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이는 유교윤리나 공론 형성 등과 결부된 것으로 판단된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① 정치 권력과 역사 서술의 관계 규명 전근대 조선에서 유교 지식인은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지식과 정치권력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이는 조선 초기에 권력을 가진 지식인들도 예외일 수 없다. 특히 ‘태종 이방원’은 관료, 왕자, 세자, 국왕, 태상왕 ...
① 정치 권력과 역사 서술의 관계 규명 전근대 조선에서 유교 지식인은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지식과 정치권력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이는 조선 초기에 권력을 가진 지식인들도 예외일 수 없다. 특히 ‘태종 이방원’은 관료, 왕자, 세자, 국왕, 태상왕 등의 다채로운 정체성을 띠었던 인물이다. 1400년 즉위 이후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방면의 노력을 하였고, 이는 유교 등의 지식체계뿐만 아니라 역사 서술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한 평가는 왕조 교체나 건국 초기의 권력 변동 과정과 결부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이에 본 연구는 그러한 권력의 속성, 즉 역사 편찬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특징을 주목하면서 이방원(즉위 이전)의 행적에 대한 역사 서술의 변화를 파악하려고 했다.
② 인물사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 제시 조선의 제3대 국왕 태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편이다. 우선 조선의 수성(守成)을 이룬 군주로서 평가된다. 창업 군주 태조가 기존 고려의 의장법제를 수용하여 체제의 안정을 모색한 반면, 태종은 수성 군주를 자임하면서 조선의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각 방면에서 제도 개혁을 꾀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종대의 개혁은 세종대, 세조대의 개정을 거쳐 성종대의 체제 완성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권력 지향적인 패왕(覇王), 왕조 교체 및 왕권 강화를 위해 공신, 외척, 관료 등을 제거한 무자비한 인물이라는 인식도 있다. 대체로 기존 연구는 ‘왕권 강화’와 관련하여 다양한 세력(공신, 종친, 외척 등)을 제거해 나갔던 과정에 초첨을 맞추었지만, 이와 별개로 지식 체계나 역사 서술을 국왕 권력의 정당성과 결부시켜 확보해 나갔던 면모도 체계적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후자의 측면을 좀더 고려했다. 향후 이 연구가 조선 초기 정치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색인어
이성계, 이자춘, 정몽주, 정도전, 하륜, 변계량, 조선 건국, 왕자의 난, 실록, 용비어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