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프랑스 숙련노동자들의 운동을 주도했던 사노당이 1890년 샤텔로 대회를 마지막으로 알르만파와 브루스파로 분열하고 전자가 10년간의 정당정치 실험 끝에 의회정치라는 영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1890년의 사건은 과연 어떠했는가를 연구하기 위해서 첫째, 시 ...
19세기말 프랑스 숙련노동자들의 운동을 주도했던 사노당이 1890년 샤텔로 대회를 마지막으로 알르만파와 브루스파로 분열하고 전자가 10년간의 정당정치 실험 끝에 의회정치라는 영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1890년의 사건은 과연 어떠했는가를 연구하기 위해서 첫째, 시의원으로 선출된 사노당의 선거 후보들이 당선 후에 시의회에서 과연 노동자 계급에게만 책임을 져야하는지, 아니면 자신이 선출된 선거구민 전체에게, 즉 계급을 초월하여 지역구의 대표로서 책임을 넓혀야하는지의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발생했던 정당 강령의 해당 항목을 둘러싼 당내 대립구도를 파악해야 한다. 둘째, 1890년 당이 내분을 겪고 있을 때 이를 중재할만한 역량을 가졌던 인물로 기대를 모았던 샤베르와 조프랭의 죽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샤베르와 조프랭은 1830년 혁명과 1848년 혁명, 그리고 1871년 파리 코뮌 사건에서 정치적으로 활발한 역할을 담당했던 노동운동가로서 사노당 내 존경받는 숙련 노동자였다. 이들은 브루스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지식인 집단과 알르만으로 상징되는 숙련 노동자 집단을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 의미는 이들이 또한 당내 의회 사회주의로의 지향성과 이에 대립하는 노동자 중심주의와 반의회주의의 중재 역할을 수행해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두 명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노동자가 병환으로 같은 시기인 1890년 여름에 사망한 이후 사노당의 분열은 더 늦출 수 없게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알르만의 알르만파 이탈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모순되게도 알르만 자신은 식자공이라는 가장 전형적인 숙련노동자이자, 파리의 인쇄공 노조의 위원장을 지낸 경력 뿐 아니라, 파리 코뮌에서도 최후의 저항으로 외국으로 추방당했다가 1880년에 행해진 총사면으로 귀국할 수 있었던 노동운동가였다. 그리고 1880년대 동안 사노당 내에서도 노동자 집단을 대표해서 주간으로 발행되던 당 기관지 『르 프롤레테르 Le Prol taire』나 80년대 후반 군사독재의 가능성을 시사했던 불랑제 장군의 사건(l'Affaire Boulanger) 때 이를 막고자 하는 의도에서 창간되었던 일간지 『르 파르티 우브리에 Le Parti Ouvrier』가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손에 완전히 장악되지 않도록 편집자로 활약하는 등, 노동자들에게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1890년 샤텔로 대회 당시 양 세력으로 분열되었을 때에도 반의회주의적 노동자 집단은 알르만파로 명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알르만조차도 1890년 분열 직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따른 알르만파 집단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 과정 역시 분열후 알르만파의 철저한 노동자 중심주의와 어떠한 개인의 지나친 부상과 영향력 행사를 막고자했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1890년 분열 당시 알르만파에 남는 길을 택했었던 적지 않은 수의 지식인과 시의회 의원들이 1890년대에 알르만파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노동자들은 이들을 어떻게 통제하려고 하였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물론 알르만파는 이들 의원들이 당연히 연봉을 알르만파 노조연맹에 반납하고, 숙련 노동자로서의 봉급을 받는 형식을 취할 것을 강제했다. 그 과정은 양자 사이의 갈등을 깊게 하였고, 그 결과 알르만파는 1890년 후반부터는 그나마 미약하게나마 당에 남아있던 시의원들, 그리고 순수 노동자 중심주의라는 목표에 매료되어 당 기관지 편집에 깊이 관여했던 젊은 지식인들을 서서히 잃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