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셰익스피어와 플래처가 『두 귀족 친척』에서 초서의 『기사이야기』를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 살펴보는 작업으로 시작될 것이다. 우선 두 극작가는 『기사이야기』에 나타난 시간을 축소시켰다. 초서의 이야기는 서술 방식도 그렇지만, 줄거리 내의 시간도 긴 것 ...
본 연구는 셰익스피어와 플래처가 『두 귀족 친척』에서 초서의 『기사이야기』를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 살펴보는 작업으로 시작될 것이다. 우선 두 극작가는 『기사이야기』에 나타난 시간을 축소시켰다. 초서의 이야기는 서술 방식도 그렇지만, 줄거리 내의 시간도 긴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기사이야기』에서 팔라몬이 테세우스의 감옥을 탈출한 것이 7년 후이며, 테세우스가 그와 아시테에게 에밀리아를 차지하기 위한 결투를 명하는 것은 일년 후이다. 하지만 『두 귀족 친척』에서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을 단축시켜 처음부터 모든 사건이 일년을 넘지 않도록 배열하고 있다. 또한 초서의 이야기에서 무대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서술--예컨대 두 젊은이가 각각 100명씩의 기사를 대동하고 결투를 하는 것, 등--은 삭제하거나 변경하고 있다. 또한 초서의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들은 극작품에 등장하지 않는다. 극작품에서 신들은 다만 상징으로서 기원의 대상으로서 존재할 뿐, 그들이 초서의 경우처럼 서로 다투거나 울거나 화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차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작품의 인물 설정에서 드러나는 변화이다.
초서의 『기사이야기』를 로망스라고 할 때,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사랑의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는 팔라몬과 아시테, 그리고 에밀리아라고 해야 옳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은 로망스에서 전형적인 방해인물(blocking figure)인 테세우스(Theseus)이다. 그는 진실하고 완벽한 기사로서 이야기의 플롯을 만들어가는 인물이며, 작품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작품은 테세우스를 통하여 바람직한 기사의 모습과 이상적인 중세 귀족의 사고 양식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무질서하고 우연한 사건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면서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최선을 다하여 판단하는 모든 결정은 또 다른 혼란과 충돌을 만들어내며, 그가 사건에 간섭하면 할수록 사건은 그의 의도와는 멀어져 간다. 결국 그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부질없으며, 절대자의 뜻에 따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와 플래처는 테세우스의 역할을 대폭 축소시키고 있다. 연극 작품에서 그는 이상적인 기사라기보다는 통솔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힘 있는 군주일 뿐이다. 초서의 경우와는 달리 그의 결정은 그 자신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주변의 인물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에밀리아를 두고 결투하는 팔라몬과 아시테를 대했을 때인데, 초서의 테세우스는 두 사람의 죽음을 명할 때부터 일년 후 두 사람의 결투를 마련하는 모든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만, 극작품에서 그가 두 젊은 기사의 결투를 결정하는 과정에는 팔라몬, 아시테, 에밀리아, 히폴리타(Hippolyta) 등 모두가 간여한다. 셰익스피어와 플래처의 작품에서 테세우스는 더 이상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이야기에 끌려가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초서의 작품에서 로망스의 세 축을 이루고 있는 팔라몬과 아시테, 그리고 에밀리아는 테세우스와 비교할 때 지극히 평면적인 인물들이며, 개성이 없는 꼭두각시에 가깝다. 특히 에밀리아는 두 젊은 귀족이 연모하는 사랑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아무런 목소리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등장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에 가까운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또한 팔라몬과 아시테는 에밀리아를 연모하는 젊은 기사들이라는 사실 외에는 서로의 성격적 특성이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는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셰익스피어와 플래처의 작품에서도 팔라몬과 아시테는 초서의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은 정의롭고, 용맹스럽고, 에밀리아를 향한 사랑에 목숨을 건다. 그러나 그 밖에 두 사람을 구분 짓기는 어렵다. 심지어 에밀리아에게 있어서도 두 젊은이는 똑같이 매력적이고, 똑같이 이상적인 기사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와 플래처는 에밀리아에게 목소리를 부여한다. 그녀는 초서의 에밀리아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며 능동적이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두 기사의 마지막 시합을 구경하기 위해서 모여들 때에도 참가를 거부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물론 그러한 그녀가 작품의 줄거리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뜻을 주장하고, 소신을 보이는 그녀지만, 궁극적으로 팔라몬과 아시테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그녀는 여전히 소외된 방관자일 뿐이다. 남성의 전유물인 기사도의 이야기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명확한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에밀리아의 여성적 역할을 반전시키는 존재가 간수의 딸(The Jailer's Daughter)이다.
『기사이야기』에서 팔라몬은 단순히 친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탈옥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와 플래처는 이 막연한 “친구”를 간수의 딸로 설정하고 그녀에게 풍부하고 변화무쌍한 여성의 목소리를 부여하였다. 그녀는 감옥에 혼자 남은 팔라몬을 사랑하여 그를 탈옥시키고, 예상되는 아버지의 처형과 팔라몬에 대한 짝사랑 사이에서 미쳐버린다. 마치 『햄릿』(Hamlet)의 오필리아(Ophilia)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언행과 그녀 주변에서 그녀를 위해 걱정하고 애를 쓰는 간수, 구혼자(Wooer), 의사(Doctor), 오빠(Brother) 등의 인물이 드러내 보이는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모습들은 에밀리아의 수동적인 역할과 대조를 이루며 작품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있다. 중세 기사도가 남성과 귀족의 전유물이라면 자코비언 시대의 기사도는 오히려 여성과 서민들이 그 정신을 더 잘 계승하고 있다는 의미가 『두 귀족 친척』에 담겨져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심한 비약일까?
『두 귀족 친척』이 초서의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작품에서 여성과 서민들의 목소리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에밀리아와 간수의 딸로 대변되는 여성의 목소리는 비록 그것이 거대한 작품의 구조 안에서 플롯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닐지라도 주변의 남성 인물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강하다. 더구나 간수의 딸에 대한 주변 남성들의 우려와 보살핌은 마치 그녀가 작품의 주인공(최소한 서민들의 이야기 안에서는)인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귀족 사회의 기사도가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반면, 서민사회의 일화들은 활기에 넘치고 역동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시테가 가장 활기 있게 살아나는 장면이 바로 서민들의 무리에 끼어 테세우스 앞에 등장할 때라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본 연구자가 가장 초점을 맞추려 하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며, 셰익스피어와 플래처가 초서의 작품에 드러난 귀족중심, 남성중심의 기사도 정신을 패러디하고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줄만한 증거는 작품에서 이들 서민들이 차지하는 중요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