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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독일 정책, 1937-1939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독일 정책, 1937-1939 | 2015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홍성곤(고려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2015S1A5B5A07038416
선정년도 2015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17년 01월 05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1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대공황과 히틀러파시즘의 집권으로 베르사유체제가 위기에 처하고 새로운 세계 ‘재분할’이 가시화되면서 국제질서의 ‘평화적’ 재편이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는 문호개방 정책에 입각한 경제적 유화정책으로 독일을 자유무역에 기반한 세계경제에 재통합함으로써 열강들의 갈등을 해소하고 미국의 헤게모니를 구축하려고 했다. 이러한 인식에서 루스벨트는 1937년 초부터 독일에 대해 미국식 유화정책인 경제적 유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독일 정부에 직접 접근하기보다는 영국의 협조를 끌어내 독일에 경제적 유화정책을 '강제'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취했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이 미국의 압도적 경제적 우위에 기초한 ‘자유무역 제국주의’적 세계경제 수립에 있다고 인식한 영국은 해체되어가는 대영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히틀러-핼리팩스 회담을 통해 반소련 노선과 세력권 분할의 방식으로 미국에 대항하는 블록경제 수립을 추진했다. 따라서 제국 특혜체제와 대영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독일과의 거래를 통해 ‘평화’를 구축하고자 하는 영국식 유화정책에 직면하여 영국과의 정책 ‘조율’을 통하여 독일에 문호개방 체제를 강제하려고 한 미국의 경제적 유화정책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었다. 그 결과 1938년 초부터 미국은 유럽에서 평화를 추진하는 주도권을 영국에 넘겨주고 영국식 유화정책을 수동적으로 따라갔다. 게다가 미국이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후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수용하게 된 데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체코를 희생한 뮌헨협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뮌헨협정 체결 직후 독일에서 발생한 유태인 학살사건 즉 ‘수정의 밤’ 사건을 기점으로 미국은 외견상 독일에 대해 강경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봉쇄정책’으로의 전환이라고 잘못 이해된 미국의 강경한 태도가 독일과의 적극적 대결정책을 취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독일의 침략 행위를 저지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었던 중립법 개정이 좌초되자 미국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1939년 봄과 여름에 영국과 프랑스, 소련 사이에 진행되고 있던 삼국협상의 체결에 힘을 보태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유럽 문제에 정치적으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불간섭’ 정책을 고수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루스벨트는 폴란드 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을 히틀러에게 요청했다.
  • 영문
  • Franklin Roosevelt's Policy Towards Nazi Germany in the Period 1937-1939

    The ‘peaceful’ reorganization of the international Order was the cardinal problem when the redivision of the world was the agenda because of the Great Depression and the Hitlerfascism. The Franklin Roosevelt administration wanted to integrate Germany in the Free Trade system by the economic appeasement based on the Open Door policy in order to solve the conflict of the great powers and establish the American hegemony. According to this strategy, Franklin Roosevelt tried to push positively the American-style economic appeasement towards Germany from 1937.
    But Neville Chamberlain who understood that the policy aim of the Roosevelt administration was to establish the Free Trade Imperialism based on the economic supremacy of United States responded to the American challenge by the anti-Soviet Union and the division of spheres of influence through the Hitler-Halifax talks in order to preserve the British Empire and the Imperial Preference System. According to this British strategy, the American-style economic appeasement which tried to coerce the Open Door system towards Germany through the policy cooperation between the two nations failed. Thus the Roosevelt administration followed passively the British-style appeasement policy from the beginning of 1938. Besides, the Roosevelt administration followed the policy of Neville Chamberlain because of the fear of communism after the Anschluss of Austria. In particular according to anti-communism, the Roosevelt administration supported positively the Munich Agreement.
    But because of the Kristallnacht that occurred shortly after the conclusion of the Munich Agreement, the Roosevelt administration supported on the appearance the aggressive policy towards Germany. But the aggressive policy of the Roosevelt administration was not the change of policy from the economic appeasement to the containment policy. Thus after the failure of revision of the Neutrality Act, the only alternative policy was to assist the conclusion of the Triple Alliance Negotiations between Britain, France and Soviet Union beginning from the spring of 1939. But the Roosevelt administration adhered to the traditional ‘non-involvement’ policy towards the European problems. According to this position, the Roosevelt administration asked for the solution of the polish crisis through negotiation to Hitler.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대공황과 히틀러파시즘의 집권으로 베르사유체제가 위기에 처하고 새로운 세계 ‘재분할’이 가시화되면서 국제질서의 ‘평화적’ 재편이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는 문호개방 정책에 입각한 경제적 유화정책으로 독일을 자유무역에 기반한 세계경제에 재통합함으로써 열강들의 갈등을 해소하고 미국의 헤게모니를 구축하려고 했다. 이러한 인식에서 루스벨트는 1937년 초부터 독일에 대해 미국식 유화정책인 경제적 유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이 미국의 압도적 경제적 우위에 기초한 ‘자유무역 제국주의’적 세계경제 수립에 있다고 인식한 영국은 해체되어가는 대영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히틀러-핼리팩스 회담을 통해 반소련 노선과 세력권 분할의 방식으로 미국에 대항하는 블록경제 수립을 추진했다. 따라서 제국 특혜체제와 대영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독일과의 거래를 통해 ‘평화’를 구축하고자 하는 영국식 유화정책에 직면하여 영국과의 정책 ‘조율’을 통하여 독일에 문호개방 체제를 강제하려고 한 미국의 경제적 유화정책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었다. 그 결과 1938년 초부터 미국은 대독일 정책의 주도권을 영국에 넘겨주고 영국식 유화정책을 수동적으로 따라갔다. 게다가 미국이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후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수용하게 된 데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체코를 희생한 뮌헨협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뮌헨협정 체결 직후 독일에서 발생한 유태인 학살사건 즉 ‘수정의 밤’ 사건을 기점으로 미국은 외견상 독일에 대해 강경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봉쇄정책’으로의 전환이라고 잘못 이해된 미국의 강경한 태도가 독일과의 적극적 대결정책을 취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독일의 침략 행위를 저지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었던 중립법 개정이 좌초되자 미국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1939년 봄과 여름에 영국과 프랑스, 소련 사이에 진행되고 있던 삼국협상의 체결에 힘을 보태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유럽 문제에 정치적으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불간섭’ 정책을 고수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루스벨트는 폴란드 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을 히틀러에게 요청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 대공황과 히틀러파시즘의 집권으로 야기된 국제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미국과 영국이 독일의 침략 정책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못하고 각자의 유화정책을 추진한 배경에는 그 당시 영국과 미국이 세계경제에서 처한 위치의 차이에 있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영국은 독일과의 거래를 통해 독일과 유사한 폐쇄적 블록 경제를 추구한 반면 미국은 압도적인 경제력에 기반한 자유무역 제국주의 정책을 세게경제에 강제하려고 했다. 바로 이러한 이해관계의 상충 때문에 영국과 미국은 독일에 대해 공동의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미국으로의 패권 이동을 저지하고자 한 영국의 의도와 반공산주의가 유화정책에 미친 영향 때문이었다. 이러한 요인 때문에 미국의 경제적 유화정책은 1939년 초부터 영국식 유화정책을 수동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에서 루스벨트의 대독일 정책을 새롭게 분석한다는 점에 이 글의 학문적 의의가 있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의 대독일 정책에 대한 분석은 냉전 질서 붕괴 후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패권 투쟁을 능동적으로 이해함에 있어 이데올로기(반공산주의)적 시각에서 문제를 파악하는 관점의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한다. 따라서 국제 질서의 역사적 전환기에 직면하여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개방적 자세로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중요하다는 교훈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 본 연구의 교육적 의미가 있다. 또한 주변 열강들의 국가이익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한반도의 정세 속에 국가의 안정적인 위기관리를 위해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본 연구는 교육적 활용의 사례로 이용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 색인어
  • 주제어: 프랭클린 루스벨트, 경제적 유화정책, 히틀러-핼리팩스 회담, 반공산주의, 봉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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