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개항’과 1883년 조영조약 체결을 계기로 선교사 외에도 영국으로부터 외교관 파견, 학교교사, 기자, 상인 등이 한국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들을 통해 한국에 대한 많은 정보가 본국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영국 언론 역시 ‘개항’ 이전에 비해 한국에 관한 다 ...
1876년 ‘개항’과 1883년 조영조약 체결을 계기로 선교사 외에도 영국으로부터 외교관 파견, 학교교사, 기자, 상인 등이 한국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들을 통해 한국에 대한 많은 정보가 본국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영국 언론 역시 ‘개항’ 이전에 비해 한국에 관한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를 확보하게 되고 조선과 영국이 조약을 체결, 수교하게 되면서 한국에 관해 빈번하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한국이 근대국가 수립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사회변혁을 겪게 된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농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대한제국 수립, 러일전쟁, 일본에 의한 ‘보호국화’, 식민지화 등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국내의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것일 뿐 아니라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들과의 관계 역시 영향을 미쳤다. 영국 언론은 이러한 한국의 정치상황과 국제관계를 상세히 보도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영국언론의 보도 기사는 팩트에 근거하여 한국의 상황을 단순히 전달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상황을 규정하고 여론을 조성하려 했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기사 내용을 분석했다. 또 정치적 사건 외에 한국에 대한 보도, 즉 한국의 역사, 풍습, 언어, 종교 등에 관한 기사를 통해 영국 대중들에게 한국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특정한 ‘이미지’를 형성해 갔다.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보도와 여론 조성,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실제 제국주의국가들의 한국정책과 어떻게 연동했는지를 본 연구에서 살펴보았다. 영국 언론의 한국에 대한 기사는 일본, 미국 언론과 취재원(取材源)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내용면에서 크게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 특파원을 두지 않은 대부분의 영국 언론은 일본 언론의 기사를 재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언론은 다양한 취재원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건, 소식 등을 가장 상세히 보도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The Times의 경우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한국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일본의 니치니치신문[日日新聞],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등의 기사를 인용해 보도하기도 했다. 일본 언론의 보도를 인용하는 경우라도 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기사를 선별하고 자신들의 시각에서 사건을 분석하여 보도했다. 하지만 독자적인 취재원이 아닌 일본 언론을 인용하면서 영국 언론의 한국에 대한 인식 및 사건에 대한 논조 역시 일본 언론과 유사해져 갔다. 즉 청과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일본의 대한정책을 긍정하는 인식을 일본 언론과 공유했다.
특히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1910년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까지 영국 언론의 보도 내용과 한국의 식민지화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전쟁이 마무리되는 시점까지 러시아를 “공공의 적”으로 여기고 있던 영국 언론은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또 강화조약이 체결되며 전쟁이 마무리되고 그 결과로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전쟁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제국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일본의 ‘보호국’이 된 이후 한국에 대한 영국 언론의 보도 내용, 그리고 1910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고자 했을 때 언론의 보도 내용과 입장은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일본의 대한정책에 우호적이었는지 또는 자국의 이해관계에 미칠 영향을 파악하며 새로운 여론을 조성하려 했는지 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영국 언론은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식민지화에 대해 역사적 귀결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다만 한국이 일본에 의해 완전한 식민지가 될 경우 영국의 경제적, 외교적 이익에 어떠한 해가 없을지 경계하며 이러한 문제를 영국 정부와 대중에 환기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