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에 대한 재검토는, 그것도 타국의 영화사에 대한 이해는 결국 수용의 시각에서 일종에 주석을 다는 행위이며, 텍스트들 사이의 긴장과 영향을 지적하는 것이다. 윌 스트로우는 「완전한 영화사의 신화」라는 글에서, 실제 일어났었던 ‘사건’과 그 사건의 ‘기록’ 사이 ...
영화사에 대한 재검토는, 그것도 타국의 영화사에 대한 이해는 결국 수용의 시각에서 일종에 주석을 다는 행위이며, 텍스트들 사이의 긴장과 영향을 지적하는 것이다. 윌 스트로우는 「완전한 영화사의 신화」라는 글에서, 실제 일어났었던 ‘사건’과 그 사건의 ‘기록’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를 지적하면서, 영화사 서술의 대상이 되는 사건은 이미 과거의 것으로 영화사가 기술되는 현재 시점에 있어서 부재하는 것이고, 그 사건의 담론인 자료만이 살아남아 사가들에게 주어진다는 영화사 서술의 초기 모순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역사가 살아남은 혹은 승리한 자의 기록이 되기 쉽다는 잠언과도 같은 말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담론의 비판적 독해를 통해 당 시대 영화 텍스트들과 사회, 영화 제작자들과 관객, 그 ‘관계’들을 능동적으로 읽어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러시아-소비에트 영화의 발전사는 역사와 사회문화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다른 여러 경향이 혼재되어, 정치적 입장, 이데올로기, 예술에 대한 시각, 영화 미학 등 시대적 주요 요인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문화적 이해가 선결되어야 위에 지적한 바와 같은 능동적, 비판적 영화 독해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1910년대부터 시작하여 1920년대 정점을 이룬 소비에트 영화의 황금기 영화들 역시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반영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화들이지만, 이 영화들에는 영화작가의 시각만큼이나 사회문화적 요구가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세르게이 에이젠슈쩨인의 영화들과 혁명기 영화인들의 영화에는 사회문화적 상황과 요구가 감독과 더불어 또 하나의 제작주체가 되어 있음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는 스탈린 집권이후 당의 공식적 미학으로 선포된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들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앞서 존재했던 ‘프롤레트꿀트’와 ‘라프’ 등에 의해 주도되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은 문학에서 나아간 전 예술 장르로 확장되었고, 1920년대부터 레닌,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에 의해, 영화가 가장 중요한 예술이며 “영화를 탈취하라. 그것을 통제하라. 영화관은 술집과 교회를 대체해야 하고 대중 교육을 지지해야한다”는 주장으로 영화는 모슨 예술 중에 가장 중요한 예술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20년대 영화감독들이 당의 공식적 미학으로부터 독자성을 유지했고 검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데 반해, 스탈린 집권 이후 영화는 스탈린 정권의 적극적인 간섭과 검열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철저하게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에 의거한 영화들만이 제작되고 상영되는데, 이러한 표본이 된 대표적 영화로 바실리예프 형제의 <차빠예프>(1934)를 들 수 있다. 한편으로 스탈린 치하의 영화에 대한 강화된 이념적 검열의 ‘당근’과 같은 역할을 한 영화 장르도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예가 <볼가-볼가>(1938), <서커스>(1936) 등과 같은 뮤지컬 코미디 장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에서도 사회주의형 긍정적 주인공의 모델은 내용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옹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영화 통제는 이후 러시아 영화의 침체기의 원인이 되었고 스탈린 사망에 이르는 1950년대 초중반까지 천편일률적인 영화제작으로 그간 이루어온 영화미학에 퇴보를 가져오기도 하였으나, 문화적 텍스트로서의 영화에 대한 관점에서는 풍부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이후 러시아 소비에트 영화는 1960년대에 이르러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하는데, 이는 1956년 제20차 당대회를 통해 스탈린 격하 운동을 선언하면서 흐루시쵸프가 열었던 "해빙기"가 지속되고, 이 해빙기는 아직 70년대 브레즈네프의 강력히 통제된 관료주의에 의해 "침체기"로 접어들기 이전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에는 보다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표현될 수 있었고, 이 입장들은 예술에 반영되었다. 이른바 ‘60년대적 특성’이라고 단순하게 일컬어지는 것들은 포스트 스탈린 시기이며 1954년에서부터 1982년까지, 즉 흐루시쵸프에서 브레즈네프까지의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특성과 각 시기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가 공식적으로 유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인텔리겐치야의 역할과 위치, 그리고 같은 당원 사이에서도 출신 계급에 의한 서로 다른 사회주의의 지향점과 취향은 지배와 피지배 계급의 이분법 사이에도 수많은 집단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1960년대의 인텔리겐치야가 1920년대의 인텔리겐치야와 유사한 점과 상이한 점은 60년대의 ‘신레닌주의자’들과 레닌 시대의 레닌주의만큼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60년대 신레닌주의 영화인들은 20년대 영화들에서 소비에트 영화의 전통을 찾고자 했고 형식주의라는 용어는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