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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재해 비교 연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학술연구교수(인문사회)
연구과제번호 2009-353-A00094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3 년 (2009년 09월 01일 ~ 2012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김문기
연구수행기관 국립부경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의 구체적인 양상을 비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지하듯이 명청교체가 이루어진 17세기는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기근, 역병, 폭동, 반란, 전쟁, 정권교체 등의 격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7세기에 발생한 전 세계적인 인구의 감소, 경기의 침체, 혁명과 반란 현상은 "17세기 위기론(Seventeenth Century Crisis)"이라는 말로 일찍부터 역사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기간에 중국은 명말의 극심한 기근과 농민반란으로 명청교체가 이루어졌다. 조선은 임진왜란(1592)을 시작으로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7)이 발생했으며, 17세기 후반에는 현종과 숙종대의 경신대기근(1670~1671)과 을병대기근(1695~1699)으로 대표되는 극심한 기근으로 인구가 격감했다. 일본도 17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전국시대가 종식되고 에도막부가 들어섰지만, 칸에이 대기근(1641~1643)을 시작으로 엔보이대기근(1674~1677)과 겐로쿠대기근(1699~1704)이 발생하는 등 17세기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에 기근, 역병, 전쟁과 같은 대재난이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많은 역사학자들은 "소빙기(Little Ice Age)"라는 전 지구적인 기후현상에 주목했다.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17세기의 세계적인 위기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오직 기후변화뿐이라고 했다.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전 지구적으로 한랭하고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되어 각종 재해와 기근이 빈발했고, 그 결과 세계 곳곳에 사회적 격변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17세기 위기론"을 설명하는 유일한 단서인 소빙기는 역사에서 기후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무엇보다도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역사의 "동시성"을 제기했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소빙기 기후변동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Glogal History"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본 연구는 "Glogal History"의 한 장으로서 소빙기 기후변동이 17세기 동아시아 역사전개에 미친 영향과 그 세계사적인 의미를 추적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중구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의 구체적인 양상과 영향을 비교할 것이다. 먼저 중국과 조선의 기후기록을 통해 소빙기 기후변동의 주기성에 대해서 검토하고, 세계적 기후변동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살펴본다. 다음으로 소빙기 기후변동으로 인한 재해와 기근의 동시성을 비교하고, 끝으로 이러한 재해와 기근에 대해서 중국과 조선은 어떻게 대응했으며,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 조망할 것이다.
    최근 전 지구적인 기후온난화(Global Warming)가 인류의 생존에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면서 기후변동이 역사전개에 미친 영향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국내의 몇몇 역사학자들이 소빙기의 기후변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실증적인 연구는 여전히 미흡하다. 특히 공간적으로 인접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를 비교한 연구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한국사의 경우 소빙기를 직접적으로 분석한 연구자가 있지만, 소빙기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되지 않고 확연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시야를 넓혀 "그렇다면 조선의 소빙기는 중국의 그것과는 같은가 혹은 다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소빙기가 전 지구적인 현상이라고 할 때, 이웃한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은 약간의 지역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동시성"이 담보되어야 할 것이다.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본 연구는 소빙기의 동시성이라는 관점에서 17세기 동아시아 격변을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 기대효과
  • (1) 새로운 문제제기와 학문적 연구의 기반 조성: 본 연구는 비교사라는 관점에서 소빙기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발전시키고, 연구기반을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세세한 주제보다는 기후, 재해, 황정이라는 큰 틀에서 전체상을 그리는데 주력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현상은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숙종대 화폐제도의 도입은 구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동전을 수입하자는 논의가 있었던 점에서 비교사적인 관점에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17세기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기초적인 단계로 소빙기를 설정하고 학문적 발전의 기반을 조성하는데 일조하리라 생각된다.
    (2) 역사전개에 기후가 미친 영향의 중요성 확인: 기후는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기후결정론"이라는 측면에서 부정하거나 제한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후변동은 더 이상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문제이기도 하다.최근 지구온난화로 인해 기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됨에 따라 역사학에서도 기후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기고 있다. 17세기는 지난 수 천년을 통틀어 가장 한랭했던 시기였다.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에 대한 비교 연구는 역사전개에 기후가 미친 영향력을 선명하게 보여 줄 것이다.
    (3) 동아시아 소빙기의 구체상 제시: 한국학계에서 17세기 소빙기의 전체상에 대한 분석은 여전히 미흡한 형편이다. 한국사에서 소빙기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 통합적인 인식이 나오지 못한 것은 개별적인 연구 속에서 새로운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동양사에서 17세기를 연구할 때 소빙기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 구체상이 제대로 인지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 연구는 중국과 조선의 문헌자료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소빙기 기후변동과 영향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역사에서 소빙기 기후변동의 중요성을 환기하고, 이에 대한 진전된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4) 비교사를 통한 소빙기의 세계적 "동시성" 확인: "중국과 조선의 솝이기는 과연 달랐는가?" 이 질문은 "동아시아의 소빙기는 세계적 기후변동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대된다. "Global History"의 관점에서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 연구에서 소빙기의 중요한 의미는 전 지구적인 "동시성"에 있다. 이러한 동시성이 확보되면 세계사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5) 17세기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재해석: 본 연구의 관심은 17세기의 한중관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소빙기가 근대세계의 형성 및 현대의 지구온난화와는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주목한다. 17세기는 위기의 시대였으며, 근대세계로의 전환의 시기였다. 최근 환경사 연구자들은 신대육인 "열대"로 대거 진출했던 계기를 소빙기로 인한 생태환경의 파게에서 찾고 있다. 소빙기는 유럽의 근대세계 형성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소빙기는 근대세계 형성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소빙기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근대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도 중요하다. 거시적으로 동아시아 혹은 한국사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재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6)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지구온난화의 역사적 교훈 제시: 현재 인류는 지구온난화라는 기후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이제 학문적 범위를 넘어 인류의 생존을 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17세기 인류가 경험한 소빙기는 현재의 "지구온난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는 21세기 현재 인류가 당면한 지구온난화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 연구요약
  • 최근 인류가 경험하는 환경파괴와 지구온난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역사연구에서 기후변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연구는 여전히 부족한 형편이다. 본 연구의 대사인 17세기는 지난 수천 년을 통틀어 가장 한랭했던 한 세기였다. 20세기의 대표적인 기후학자인 램(H. H. Lamb)은 17세기를 "지난 1만 년 동안 한랭했던" 시기였으며, "세계 모든 지역에서 나온 증거들이 현재보다 더 추운 기후체제였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시기"였다고 했다.
    다행스럽게 중국과 조선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기록문화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는 소빙기 기후변동과 재해에 관한 가장 체계적인 기록들 중의 하나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정서류, 방지, 문집, 일기, 수필 등 17세기 기후변동을 반영하는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문헌기록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면 자연과학적인 성과를 검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본 연구는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에 대한 비교사적인 분석을 통해서 그것이 동아시아의 역사전개에 미친 영향과 의미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서 (1)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2)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재해와 기근: 3대 기근을 중심으로, (3)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구황론과 황정: 강희 27년(1698) 조선진제의 역사적 의미라는 주제를 설정했다
    연구주제를 기후, 재해, 황정이라는 3단계로 설정한 것은 3년이라는 시간적 제한 안에서 효과적인 비교를 통해 전체적인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서이다. 예컨대 매년 마다의 대표적인 기근을 중심으로 기후현상, 재해양상, 국가의 대응을 병렬적으로 비교하는 방식은 좀 더 쉬운 접근방법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본 연구에서 기후, 재해, 황정이라는 대주제를 설정한 것은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에 대한 비교연구가 전혀 진행되지 않은 시점에서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17세기에 대한 거시적인 조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단계에서는 기후변동의 주기성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현재까지 소빙기를 인용한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기후변동의 구체적인 양상을 분석한 연구는 없었기 때문이다. 2단계에서는 소빙기의 영향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재해와 기근의 동시성을 비교한다. 소빙기의 영향에 대해서는 전염병, 민란, 전쟁, 민간신앙, 생활문화 등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지만, 이런 현상을 종합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역시 기근이다. 중국과 조선에서 발생한 중대한 기근은 거의 동시기에 발생했다. 동아시아에 미친 소빙기의 영향력을 가장 잘 드러낸다. 3단계에서는 1단계와 2단계의 연구를 종합하여 중국과 조선이 소빙기의 재해와 기근에 대응하는 방식, 즉 구황과 황정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비교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17세기 소빙기가 중국과 조선,나아가 세계사에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평가할 것이다.
    17세기 동아시아는 격변의 시기였다. 중국과 조선은 정치, 사회, 경제체제에서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17세기 동아시아는 비교사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동일한 조건이 있었다 전 지구적인 소빙기 기후현상이 그것이다. 장기적으로 본 연구는 17세기의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한글키워드
  • 구황,기근,17세기위기론,17세기,기후변화,기후,소빙기,비교사,지구사,환경사,동아시아,황정
  • 영문키워드
  • Seventeenth Century,Famine Relief,East Asia,Glogal History,Little Ice Age,Climatic Change,Climat,Comparative History,Environmental History,Famine Policy,Famine,Seventeenth Century Crisis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전쟁과 교역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 동안 중국과 조선 사이에는 곡물의 교역이 활발했다. 전근대시대에 국가와 국가 사이의 곡물유통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징적인 현상이다. 곡물교역 논의가 심각하게 진행되었던 것은 대기근의 시기와 일치한다. 이런 사실은 중국과 조선의 곡물유통이 소빙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곡물 유통의 관계망은 변화했다.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계갑대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은 중강개시를 열어 명의 곡물을 유입했다. 여진이 성장하자 조선은 여진에 일방적으로 곡물을 공급하는 위치로 바뀌었다. 1644년 청이 북경을 점령했을 때 조선은 막대한 곡물을 운송하여 청의 안정적 통치에 일조했다. 청이 강남을 점령한 이후에는 더 이상 조선의 곡물을 요구하지 않았다.
    17세기 후반 조선은 경신대기근(1670~1671)과 을병대기근(1695~1699)을 겪었다. 경신대기근 동안 조선은 절대적인 곡물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청에 곡물을 요청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을병대기근 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청은 총 5만 석의 곡물을 보내 교역하게 함으로써 조선의 기근을 해결하게 했다. 청에 대한 ‘復讐雪恥’를 꿈꾸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17세기 전반 중국이 극심한 기근을 경험하면서 명청교체가 이루어졌다. 이에 반해 조선은 청에 곡물을 공급하는 등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그렇지만 17세기 후반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조선은 1백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기근을 두 차례나 겪었다. 이에 반해 청은 경제적 안정을 통해 조선에 대량의 곡물을 공급했다. 소빙기에 대한 중국과 조선의 적응이 서로 상반되었던 것이다.
  • 영문
  • War and trade are two sides of the same coin. Trade between China and Chosen was active from the late sixteenth to seventeenth century. What grain circulat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premodern ear was brisk was so peculiar. When a great famine struck China and Chosen, they entered into negotiations about the grain trade seriously. Increase of the grain circulat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was connected with the Little Ice Age.
    The distribution channels of grain fluctuated with change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To find a solution to Kyekab Great Famine (1593-1594) during the Imjin war, Chosen imported some grain in the Chungkang Market from Ming. As Manchu expanded its influence, the role of Chosen was transformed into a supplier of grain to China. When Qing took possession of Beijing in 1644, Chosen played a role in stabilizing the reign of Qing by transporting a great of grain. After occupying Jiangnan, Qing didn't require more grain.
    Chosen suffered Kyungshin Great Famine(1670-1671) and Ulbyung Great Famine(1695-1699) in the late seventeenth century. During Kyungshin Great Famine, Chosen tried to demand Qing to supply grain for making good the shortage of grain, but this project didn't take shape. But when Ulbyung Great Famine took place over again, importing grain from Qing was delayed any longer. Sending and trading lots of grain, Qing helped to find a way out of grain shortage of Chosen. This was a national humiliation for Chosen hoping to take its revenge on Qing.
    When China suffered a extreme famine, Ming was replaced by Qing in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On the contrary to this situation of China, Chosen was relatively maintained its stability and could supply grain for Qing. However, the situation quite reversed in the late seventeenth century. Chosen suffered a great famine two times losing more than one million people. Qing had economic stability and provided a great deal of grain to Chosen this time. Respond to the Little Ice Age between China and Chosen was contrary to each other.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동아시아에서 소빙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전근대 동아시아세계에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 곡물교역을 통한 기근의 賑濟는 흔치 않은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16세기말에서 17세기 동안 중국과 조선의 곡물교역은 흥미롭다. 왜 이 시기에 이런 현상이 있었을까? 이것은 소빙기와 밀접한 관련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시기는 소빙기의 기후현상이 가장 현저했던 시기이자 동시에 기근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였다. 조선에서 중국과 곡물교역이 심각하게 논의 되는 것은 극렬한 대기근의 때와 일치한다.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계갑대기근, 정묘호란을 전후한 시기의 병정대기근, 명청교체를 불러온 숭정 13~15년의 대기근, 현종대의 경신대기근, 숙종대의 을병대기근은 극단적인 대기근으로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곡물의 수입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시기였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곡물교역의 관계망은 변화했다. 계갑대기근 동안 중강개시를 통해 조선은 명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그렇지만 여진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강성해가자 조선은 여진에 일방적으로 곡물을 공급하는 위치로 바뀌었다. 1622년 이후 가도에 근거한 모문룡 군대에도 막대한 양의 곡물을 공급해야 했다. 청의 入關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의 곡물은 청이 성장하고 안정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이 강남을 점령한 이후 곡물공급지로서 조선의 역할을 사실상 사라지고 있는 것은 이런 사실을 반영한다.
    곡물교역은 17세기에 발전한 개시무역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강개시는 계갑대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곡물교역이 필요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유성룡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사대부들은 교역이 荒政의 일부분임을 깨닫게 되었고, 나아가 開市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628년의 사례처럼 곡물교역으로 기근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점은 소빙기와 국제무역의 관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소빙기라고 하면 농업생산력 하락, 경기 침체로 연결되기 때문에 국제무역의 발전과는 짐짓 모순되게 여겨졌다. 그렇지만 생산력 저하로 인한 열악한 조건들은 오히려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교환을 더욱 촉진하는 면이 있다. 이런 점에서 소빙기는 17세기 동안 국제무역을 발전시키는 한 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곡물교역에서 조선이 명과 청에 보이는 태도는 극명하다. 계갑대기근 때 중강개시를 통해 기근을 구제했던 것은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은혜’였다. 그렇기에 1619년과 1628년의 기근 때는 조선이 보다 적극적으로 명과 곡물교역을 추진했다. 이에 반해 청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보였다. 경신대기근 때 끝내 곡물교역을 요청하지 않은 것은 ‘은혜’를 입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을병대기근 때 어쩔 수 없이 곡물을 들여왔지만, 그것은 곧바로 커다란 분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17세기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국가 간의 곡물교역은 그 자체로 기근에 대한 대응력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은 17세기 전반에 있었던 숭정 13~15년의 대기근을 겪으면서 명청교체가 이루어졌다. 명은 끊임없는 기근에 시달리면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를 이은 청은 이민족 지배라는 불리함을 딛고 ‘康建盛世‘의 길을 열었다. 17세기 후반의 기후가 전반보다 훨씬 나빴던 점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은 17세기 전반 청에 대량의 곡물을 제공하는 등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지만, 17세기 후반은 1백 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기근을 두 차례 겪었다. 특히 을병대기근 때는 꺼려왔던 청으로부터 곡물을 제공받아야 했다. 이런 면에서 강희제의 海運賑濟는 17세기 소빙기의 기근에 대해 청이 성공적으로 적응한 반면, 조선은 그다지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결론은 다소 단면적이고 거친 부분이 있다.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의 기후대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날 한반도는 온대지역에 속한다. 이에 반해 중국은 온대지역 외에도 회수 이남으로 아열대와 열대지역까지 포괄하고 있다. 명청시대 중국의 농업생산력을 華中지역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온대인 華北지역이 잦은 기근에 시달릴 때, 아열대인 화중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곡물이 긴급하게 수송되어 기근을 구제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소빙기의 관점에서, 기온이 하강할 때 아열대보다 온대지역이 농업생산에 훨씬 불리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17세기 후반 조선이 대기근을 겪게 되었을 때, 중국보다 훨씬 불리한 한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문제는 앞으로 보다 심도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소빙기 해명 역사연구에서 소빙기의 중요성은 지구적인 “동시성”에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지구적인 동시성이 어떻게 나타났을까? 1990년대 이후 한국사연구에서도 소빙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적잖은 연구들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소빙기 연구 성과는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중국과 한국의 소빙기를 비교하는 연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학계의 문제만은 아니다. 중국이나 일본 학계에도 소빙기라는 관점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조명하고 비교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동시성’의 관점에서 동아시아 3국의 소빙기 기후변동을 비교한 최초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1년차에서 동아시아 3국의 소빙기 연구 성과를 총결하여 정리했다. 실제 연구에서 ‘동시성’이라는 관점이 결여된 상태에서 연구들은 제각각이었다. 기후자료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비록 작은 차이는 있을 지라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기후변동의 파동은 대단히 동시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2년차의 재해와 기근이었다. 17세기 동안 동아시아에는 재해와 기근이 극심했다. 이를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동아시아 3국의 대표적인 대기근은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했다. 비록 공간은 달라도 소빙기 기후변동의 영향은 동일하게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런 연관성 속에서 국제적인 곡물교역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3년차의 본 연구는 16세기말에서 17세기까지의 동아시아의 대기근들이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혔다. 이를 통해서 명청교체와 화이변태(華夷變態)로 상징되는 17세기 동아시아의 모습을 보다 풍부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 저술작업을 통한 인문학연구의 대중화 중국사를 연구하는 본 연구자가 비교사적 관점에서 17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들여다 본 것은 행운이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스스로 기대치가 있었다면, 그것보다 더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부한다. 3년 동안의 연구 동안 기후, 재해․기근, 황정이라는 관계망 속에서 체계적인 비교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3국이 소빙기 기후변동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17세기 동아시아의 격변을 이해하는 데 소빙기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싶다. 바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소빙기 기후변동이 역사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풍부했다. 연구 과정에서미처 다루지 못했던 주제들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 저술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기회를 만들 것이다. 이를 통해 역사연구에서 기후와 환경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역사를 바라보는 보다 다채로운 관점을 대중과 공유하여 인문학의 본질적인 의무에 충실하고자 한다.
    ❚ 칼럼과 강연: 연구 성과의 사회적 활용 역사는 의미는 ‘현재성’에 있다. 현재 우리 사회, 국가,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이 질문은 역사적 경험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다. 학문의 궁극적인 가치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런 연구 성과를 사회에 어떻게 환원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했다. 다행히 2011년 4월부터 12월까지, 8개월 동안 31회에 걸쳐 <국제신문>에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라는 칼럼을 썼던 경험이 있다. 이때 다루었던 기후와 역사 문제에 대한 주요한 주제들은 본 연구의 결과물들이었다. 또한 2011년 7월에는 부산환경단체인 기후변화에너지대안센터에서 기후와 역사와 관련된 강연을 했다. 2012년에는 3월말에서 5월초까지 7주에 걸쳐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기후는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런 경험들은 역사연구에서 대중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본 연구 이후에도 이러한 칼럼과 강연을 통해 본 연구 성과를 사회적으로 활용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 지구온난화 논의에서 역사학의 위상 확인 현재 인류가 당면한 지구온난화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기후변동이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2001년 IPCC 제3차 보고서에서 제시한 지난 1천년의 기후변동의 그래프는 기후변동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지난 1천년동안의 기후변동은 미미했으며 오로지 현재만이 이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온이 급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논의를 검증하는 것은 결국 역사이다. 한국, 중국, 일본의 동아시아의 기후변동의 역사를 선명하게 형상화할 수 있다면 이에 대한 뚜렷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17세기 소빙기에 대한 본 연구는 역사가 가져야할 “현재적 의미”에 보다 충실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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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빙기, 기후변화, 기근, 17세기, 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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