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구 결과
(1) 경주는 동해안에 치우쳐 있고, 태백산지에 의해 내륙과 격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동쪽 나아가 소백산 동쪽을 ‘신라’로 통합한 것은 신라인의 空間觀에 크게 기인한다.
(2) 경주분지에서 양산단층선과 불국사단층선이 교차하므로 태백산맥 동쪽에서 ...
1) 연구 결과
(1) 경주는 동해안에 치우쳐 있고, 태백산지에 의해 내륙과 격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동쪽 나아가 소백산 동쪽을 ‘신라’로 통합한 것은 신라인의 空間觀에 크게 기인한다.
(2) 경주분지에서 양산단층선과 불국사단층선이 교차하므로 태백산맥 동쪽에서 남-북 방향으로 언양, 김해, 울산, 안강, 신광, 청하, 포항과의 좋은 교통로가 확보된다.
(3) 이 지역의 지질 및 지형적 특성은 선상지형성에 대단히 유리하여 폭넓은 대규모 합류선상지가 연속적으로 분포한다. 전반적으로 밭농사가 중심인 선사․고대에 대단히 넓은 경작지를 제공하여 든든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4) 양산단층선과 울산단층선을 따라 경주를 중심으로 경주와 울산 사이의 불국사산지 서사면과 신광, 안강, 언양 등지에 넓은 선상지가 형성되어 있다.
(5) 경주를 제외하면 영남지방은 대부분 내륙의 주요 거점까지 거리가 멀고 고개가 대단히 높아 안강, 경주를 제외하면 남북으로 긴 해안지역을 통합할 구심점이 빈약하여, 동-서 간의 왕성한 교류는 거의 불가능했던 것 같다.
(6) 경주지역은 소금을 독점하고, 영남지역의 철과 구리의 생산지가 있어 내륙지역에 비해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매우 유리한 자연환경의 혜택을 받았다.
(7) 고대 경주분지는 국가의 수도로서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 사회적 중심지였다. 아울러 교통로의 결절점이며 동해안과 영남 내륙지방 생산품의 교역 장소로서 일찍부터 도시가 형성되었다. 19세기 중반 경에 왕경을 중심으로 80만 명이 살았다고 추산된다.
(8) 고대 경주 사람들의 일상생활 용기는 토기였으며, 기와집을 짓고 숯으로 밥을 지었다. 철광석을 제련하여 철을, 해안에서는 소금을 생산하였다. 이와 같은 생활방식에는 대단히 많은 에너지를 요구되며, 대규모 벌채로 통일신라 말기에는 식생이 거의 파괴되었다.
(9) 경주, 건천, 울산, 언양, 안강, 신광 지역의 선상지 하천은 형산강과 울산만으로 유입하는 동천과 태화강의 지류이다. 하상경사가 급하고 짧은 거리를 이동하므로, 대부분 유로가 짧고 유역분지가 좁다. 따라서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초에 걸쳐 거의 5년에 한 번 모두 9회에 걸친 가뭄은 신라 후기 식생파괴로 인간생활에 결정적인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2) 활용 방안
(1) 지형학 및 제4기학 연구 성과는 고대사적 문헌 이외 다양한 연구 방법을 제공한다. 기존의 고대사 연구만으로 고대사회의 인간활동을 복원하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논의의 폭을 넓히는데 기여한다. 특히 구체적인 공간에서 자연환경과 인간과의 상호작용의 논의하는 지형학적 접근은 일반인에게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여 고대사와 경주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는데 이바지 할 수 있다.
(2) 고대 국가 신라의 중심지로 1,000년 동안 유지된 경주의 자연환경 분석은 한반도 고대 국가의 입지 특색을 논의하고, 나아가 남부의 가야, 백제와 일본과의 국제관계를 파악하는 자료가 된다.
(3) 신라붕괴의 원인을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자연환경 등을 검토하여 경주 연구의 폭을 넓힌다. 더욱이 1,000년 수도를 유지한 로마와 함께 국제적인 연구사례가 되므로 국제학회 발표와 국제학술지에 투고 활성화 등 연구가치를 높여 국제적 도시로 조성한다.
(5) 한국 동남부 지역에서 고고지형학이란 새로운 학문 영역을 확보하여 고대 국가의 성립과 흥망성쇠를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6) 경주의 지정학적 의미를 밝히고, 기후환경변화와 인간생활에 대한 정보를 보완하여 경주에 대한 연구 수준을 높이고 국제적 도시로서 위상을 높일 수 있다.
(7) 박물관에서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의 성립, 발전, 붕괴와 관계되는 한반도 남동부의 자연환경 모형을 제작하는데 활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