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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의 혼인과 김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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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0-327-A00019
선정년도 2010 년
연구기간 1 년 (2010년 05월 01일 ~ 2011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김갑동
연구수행기관 대전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고려의 제7대 임금 현종(1009~1031)은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런데 현종은 13명이나 되는 후비를 맞이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왕건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후비 수이다. 특히 공주절도사였던 김은부의 세 딸을 후비로 맞이하기도 하였다. 이는 파격적인 조치로 그 때까지 한 사람에게서 3명의 딸을 후비로 책봉한 예는 없었다.
    이 같은 현종의 혼인에 대해서는 일찍이 왕실족내혼의 입장에서 검토된바 있다. 정용숙, 『고려왕실족내혼연구』새문사, 1988 ; 정용숙, 『고려시대의 后妃』, 민음사, 1992의 연구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족내혼에 해당하는 현종의 후비 3명만 간략히 살핀 것에 불과하다. 이후 문종비 인예태후의 생애를 다루는 과정에서 현종의 혼인이 언급된 김창현, 「고려 천추태후와 인예태후의 생애와 신앙」『고려의 여성과 문화』, 신서원, 2007가 있었고 貞州 柳氏를 다룬 논문에서 현종이 성종의 조카였으므로 柳韶란 인물이 현종대에 현달했음을 밝힌 김갑동, 「고려 태조비 신혜왕후와 정주 류씨」『한국 인물사 연구』11, 2009과 外姓 문제를 다루면서 현종대 이후부터 족내혼을 한 후비들이 철저하게 외성을 따랐다는 김갑동, 「고려 전기 후비의 稱外姓 문제」『한국사학보』37, 2009의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연구 또한 현종의 혼인과 외척 세력을 본격적으로 다룬 논문이 아니었다. 다른 왕들의 혼인과 외척 세력에 대해서는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검토가 이루어졌다. 특히 고려초기 왕들의 혼인관계와 정치세력의 동향, 또 고려 중기의 외척 세력인 仁州 李氏에 대해서도 많은 검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종의 외척 세력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본격적이고 상세한 검토가 없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①왕실의 혼인은 대개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실의 혼인이 어떠한 목적과 동기에 의해 행해졌는가는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작업인 것이다. ②외척 세력이 정계에 등장하여 정치를 좌우하는 경우는 한국사 뿐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따라서 혼인을 통한 정치 세력의 분석은 유용하며 필요한 작업이다. ③역사는 항상 인과 관계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고려 중기에 인주 이씨가 세력을 떨치게 되었던 원인과 계기를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연구는 고려 현종의 혼인과정과 상황을 상세히 분석하여 고려 중기 정치, 사회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 기대효과
  • 이 연구가 수행되어 결과가 도출된다면 여러 면에서 기여를 하게 될 것이고 역사 교육에도 잘 활용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①사실에 대한 상세하고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질 것이다. 역사의 기본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연구를 진행한 후에 그 결론을 가지고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종의 혼인과 외척 세력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처음으로 시도되어 당시의 정치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②현종 대 왕실혼의 분석을 통해 당시의 사회와 풍습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을 줄 것이다. 外姓을 따르는 독특한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사촌 남매들끼리 결혼한 예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나 현재에 있어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당시에 일어났음을 이해하고 왜 그것이 가능했는가 하는 점을 탐구함으로써 사회사 내지 풍속사 연구에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당시 일반인들의 혼인 풍습을 연구하는데도 일정하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③교육적인 측면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인식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모든 행위가 그렇듯이 역사도 반드시 인과관계에 의하여 형성된다. 인과 관계를 학습함으로써 역사의 한 속성인 현재성과 교훈성을 생각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즉 역사를 통해 때로 교훈을 얻고 때로는 잘못된 일을 미리 예측하고 경고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드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왕권도 능가했던 인주 이씨 세력이 어떤 계기로 부상하게 되었는가를 학습함으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연구요약
  • 현종은 13명의 후비를 맞이하였다. 이는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후비 수이다. 이는 자신의 지지 세력이 미약하였던 현종이 외척으로 자신의지지 세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특히 성종의 인척을 종실에서 3인이나 후비를 들이었으며 김은부의 딸 3인을 후비로 맞은 것도 독특하다. 이는 전례없는 일이었다. 후비들의 지역적 분포를 볼 때 서경 세력에 속하는 후비는 1명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경주나 중부 내지 중서부 지역 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즉 慶州 3인, 安山 3인, 利川 1인, 淸州 1인, 楊州 1인, 貞州(黃州) 1인, 불명 3인이었다. 서경 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는 후비는 1인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천추태후의 몰락과 함께 서경 세력이 후퇴하고 경주 세력이 등장함을 의미하며 또 김은부의 부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현종은 13명의 후비 중 金殷傅의 딸을 3명이나 맞이하였다. 그것은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가고 올 때 김은부가 도와준 대가였다. 또 公州節度使로 병권을 가지고 있었던 김은부의 군사력에 의지하고자 한 측면도 있었다. 이 때문에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온 후 김은부를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절도사제는 폐지하였다. 개경으로 올라온 김은부는 刑部侍郞으로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거란의 사주를 받은 여진에게 붙잡혀 몇 년간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中樞使(종2품)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김은부의 등장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나 태조 왕건과는 관계가 없는 새로운 외척 세력의 등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편 그 가문의 세력은 적어도 文宗대까지는 지속되었다. 그의 외손자들이 현종의 뒤를 이어 德宗, 靖宗, 文宗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근친혼으로 세력의 결집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종대에 와서는 김은부의 처가인 仁州 李氏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김은부의 처남 李翰의 아들 李子淵이 문종에게 3인의 딸을 納妃함으로써 오히려 김은부 가문보다 더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런데 외척으로써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김은부의 활약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따라서 김은부의 활약과 그 대가로 세 딸이 현종비가 된 것은 안산 김씨 김은부 가문은 물론 인주 이씨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현종 대 김은부의 부상은 결국 인주 이씨의 등장을 가져 왔고 고려 전기 귀족 사회로서의 특징을 표출하게 된 의미있는 사건이라 하겠다.

  • 한글키워드
  • 이한,절도사,김은부,현종,이자연,이허겸
  • 영문키워드
  • Hyunjong,Lee Hu-gyum,Juldosa,Lee Ja-yun,Lee Han,Kim Eun-boo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현종은 13명의 후비를 맞이하였다. 이는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후비 수이다. 이는 자신의 지지 세력이 미약하였던 현종이 외척으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특히 종실인 성종의 후손을 3인이나 후비로 들이었으며 김은부의 딸 3인을 후비로 맞은 것도 독특하다. 이는 전례없는 일이었다. 후비들의 지역적 분포를 볼 때 서경 세력에 속하는 후비는 1명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경주나 중부 내지 중서부 지역 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즉 慶州 3인, 安山 3인, 利川 1인, 淸州 1인, 楊州 1인, 貞州(黃州) 1인, 불명 3인이었다. 서경 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는 후비는 1인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천추태후의 몰락과 함께 서경 세력이 후퇴하고 경주 세력이 등장함을 의미하며 또 김은부의 부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현종은 13명의 후비 중 金殷傅의 딸을 3명이나 맞이하였다. 그것은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가고 올 때 김은부가 도와준 대가였다. 또 公州節度使로 병권을 가지고 있었던 김은부의 군사력에 의지하고자 한 측면도 있었다. 이 때문에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온 후 김은부를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절도사제는 폐지하였다. 김은부는 刑部侍郞으로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거란의 사주를 받은 여진에게 붙잡혀 몇 년간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中樞使(종2품)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김은부의 등장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나 태조 왕건과는 관계가 없는 새로운 외척 세력의 등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편 그 가문의 세력은 적어도 文宗대까지는 지속되었다. 그의 외손자들이 현종의 뒤를 이어 德宗, 靖宗, 文宗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근친혼으로 세력의 결집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종대에 와서는 김은부의 처가인 仁州 李氏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김은부의 처남 李翰의 아들 李子淵이 문종에게 3인의 딸을 納妃함으로써 오히려 김은부 가문보다 더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런데 외척으로써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김은부의 활약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따라서 김은부의 활약과 그 대가로 세 딸이 현종비가 된 것은 안산 김씨 김은부 가문은 물론 인주 이씨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현종 대 김은부의 부상은 결국 인주 이씨의 등장을 가져 왔고 고려 전기 귀족 사회로서의 특징을 표출하게 된 의미있는 사건이라 하겠다.
  • 영문
  • King Hyunjong,s marriage and Kim Eun-boo in Koryo dynasty
    Kim Gap-dong

    King Hyunjong had thirteen queen, because his assitant group was weak. The first feature of his marriage was that a queen who came from Sugyung(서경) was not. Because Chunchu empress dowager was removed. She was the representative of Sugyung(서경) group.
    The second feature was that Kim Eun-boo became Hyunjong,s father-in-law. Hyunjong,s three queens all was dauthers of Kim Eun-boo. When Hyunjong escaped from Guran,s invasion, Kim Eun-boo actively helped Hyunjong. The entrance of Kim Eun-boo meaned the rise of new maternal relative group. Therefore Kim Eun-boo family took power from Hyunjong to King Moonjong. Because Hyunjong, Dukjong, Jungjong, Moonjong all was descendant of Kim Eun-boo.
    Lee clan rised in Moonjong,s reign period. Therefore Moonjong married with three dauthers of Lee ja-yun(이자연). Lee ja-yun was the son of Lee han(이한). Lee han was the son of Lee Hu-gyum(이허겸). Lee Hu-gyum was father-in-law of Kim Eun-boo. Therefore the Kim Eun-boo,s entrance of politic stage in Hyunjong,s reign period was the opportunity that Lee clan could have political power.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현종은 13명의 후비를 맞이하였다. 이는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후비 수이다. 이는 자신의 지지 세력이 미약하였던 현종이 외척으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특히 종실인 성종의 후손을 3인이나 후비로 들이었으며 김은부의 딸 3인을 후비로 맞은 것도 독특하다. 이는 전례없는 일이었다. 후비들의 지역적 분포를 볼 때 서경 세력에 속하는 후비는 1명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경주나 중부 내지 중서부 지역 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즉 慶州 3인, 安山 3인, 利川 1인, 淸州 1인, 楊州 1인, 貞州(黃州) 1인, 불명 3인이었다. 서경 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는 후비는 1인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천추태후의 몰락과 함께 서경 세력이 후퇴하고 경주 세력이 등장함을 의미하며 또 김은부의 부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현종은 13명의 후비 중 金殷傅의 딸을 3명이나 맞이하였다. 그것은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가고 올 때 김은부가 도와준 대가였다. 또 公州節度使로 병권을 가지고 있었던 김은부의 군사력에 의지하고자 한 측면도 있었다. 이 때문에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온 후 김은부를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절도사제는 폐지하였다. 김은부는 刑部侍郞으로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거란의 사주를 받은 여진에게 붙잡혀 몇 년간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中樞使(종2품)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김은부의 등장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나 태조 왕건과는 관계가 없는 새로운 외척 세력의 등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편 그 가문의 세력은 적어도 文宗대까지는 지속되었다. 그의 외손자들이 현종의 뒤를 이어 德宗, 靖宗, 文宗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근친혼으로 세력의 결집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종대에 와서는 김은부의 처가인 仁州 李氏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김은부의 처남 李翰의 아들 李子淵이 문종에게 3인의 딸을 納妃함으로써 오히려 김은부 가문보다 더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런데 외척으로써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김은부의 활약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따라서 김은부의 활약과 그 대가로 세 딸이 현종비가 된 것은 안산 김씨 김은부 가문은 물론 인주 이씨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현종 대 김은부의 부상은 결국 인주 이씨의 등장을 가져 왔고 고려 전기 귀족 사회로서의 특징을 표출하게 된 의미있는 사건이라 하겠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연구가 수행되어 결과가 도출된다면 여러 면에서 기여를 하게 될 것이고 역사 교육에도 잘 활용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①사실에 대한 상세하고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질 것이다. 역사의 기본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연구를 진행한 후에 그 결론을 가지고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종의 혼인과 외척 세력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처음으로 시도되어 당시의 정치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②현종 대 왕실혼의 분석을 통해 당시의 사회와 풍습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을 줄 것이다. 外姓을 따르는 독특한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사촌 남매들끼리 결혼한 예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나 현재에 있어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당시에 일어났음을 이해하고 왜 그것이 가능했는가 하는 점을 탐구함으로써 사회사 내지 풍속사 연구에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당시 일반인들의 혼인 풍습을 연구하는데도 일정하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③교육적인 측면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인식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모든 행위가 그렇듯이 역사도 반드시 인과관계에 의하여 형성된다. 인과 관계를 학습함으로써 역사의 한 속성인 현재성과 교훈성을 생각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즉 역사를 통해 때로 교훈을 얻고 때로는 잘못된 일을 미리 예측하고 경고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드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왕권도 능가했던 인주 이씨 세력이 어떤 계기로 부상하게 되었는가를 학습함으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색인어
  • 현종, 김은부, 이허겸, 이한, 이자연, 절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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