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한국영화의 주요 소재로 활용되어 왔다. 한국전쟁 영화를 장르로 규정해본다면, 1960-70년대의 국책(반공)영화, 1980-90년대의 작가영화, 2000년 이후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이어진, 매우 흥미로운 궤적을 그려왔다. 이러한 궤적 속에서 이전 시대와 2000년 ...
‘한국전쟁’은 한국영화의 주요 소재로 활용되어 왔다. 한국전쟁 영화를 장르로 규정해본다면, 1960-70년대의 국책(반공)영화, 1980-90년대의 작가영화, 2000년 이후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이어진, 매우 흥미로운 궤적을 그려왔다. 이러한 궤적 속에서 이전 시대와 2000년대의 한국전쟁 영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측면이 있다. 전자가 한국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의 영화라면, 후자는 한국전쟁을 역사적 사건으로만 알고 있는 세대의 영화이다. 전자가 혹독한 검열 시대의 산물이라면, 후자는 무자비한 흥행 시대의 산물이다.
본 논문에서는 전자의 경우와 후자의 경우에 ‘한국전쟁’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떤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 분석했다. 이를 통해 한국사회의 정체성의 변화 과정의 일면을 조망해보고,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고찰했다. 많은 편수의 한국전쟁 영화 가운데 공통점을 갖고 있는 영화를 비교하면 시대에 따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판단해, 내러티브에 유사한 점이 많은 영화를 중심으로 검토를 했다.
첫째, 선우휘의 소설 <싸릿골의 신화>(1962)와 이 소설을 각색한 영화 <싸리골의 신화>(1967)를 비교함으로써, 영화에서 한국전쟁이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원작의 각색을 통해 이만희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우리가 잃어버린 ‘진짜 한국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애도’를 담아냈다.
둘째, <싸리골의 신화>와 <웰컴 투 동막골>(2005)의 비교를 통해, 한국전쟁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재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전자는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영화로서, 한국전쟁이 한국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음을 강조한다. 반면, <웰컴 투 동막골>은 한국전쟁의 실재에 대해 우리가 기억하고 성찰해야 할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국전쟁을 체험한 적도 기억도 없는 전후세대가 한국전쟁을 소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셋째, <태극기 휘날리며>(2004), <웰컴 투 동막골>, <포화 속으로>(2010), <고지전>(2011) 등의 영화에서,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을 살펴보았다. <싸리골의 신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전쟁의 트라우마가 이 영화들에서는 계속 재현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물들은 인민군이 아니라 모두 국군이다.
넷째,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고지전>의 서브플롯의 비교를 통해 한국전쟁 영화의 시대적 ‘차이’를 살펴보았다. 전자의 서브플롯은 해병대원들이 부모 잃은 어린 소녀 영희를 친동생처럼 따뜻하게 돌보는 이야기이다. 반면, 후자의 서브플롯은 이전에 악어부대원들이 전우를 죽였던, ‘포항전투의 트라우마’이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첫째, <싸리골의 신화>의 마을 지도자 ‘강노인’은 지혜와 혜안으로 싸리골의 위기를 헤쳐나간다. 그는 1960년대 한국사회의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재현한 인물이다. 반면, <웰컴 투 동막골>의 지도자인 ‘촌장’은 평범한 촌로 같다. 그의 무지와 무능력은 동막골을 오히려 더 위태롭게 만든다. 동막골의 촌장은 1997년의 IMF 외환위기 이후, 지도자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한국사회를 반영한다. 생존의 위기에 시달리는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믿음이나 지도자에 대한 기대가 자리할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둘째, 공동체 의식의 붕괴 이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파도 속에서 한국사회는 ‘승자독식, 무한경쟁, 적자생존으로 인한 유사-자연적 정글, 또는 일종의 전쟁터’로 변했다. 따라서 2000년대의 한국전쟁 영화에서 전쟁의 트라우마가 계속 반복되는 이유는 이러한 한국인들의 불안한 마음의 상태를 반영한 결과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강대식이 대의를 위해 악전고투 했다면, <고지전>의 강은표는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싸운다. 따라서 시체더미 속에서 혼자 살아남은 강은표의 모습은 IMF 이후 한국사회의 황폐한 실재이자, 한국사회의 정체성의 단면을 재현한 매우 불길한 이미지의 현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