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과제는 이규보의 문학을 중심으로 그의 문학 세계가 생태적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그의 산문 작품이 어떤 원리와 방식으로 생태 글쓰기를 실현하고 있는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이규보의 글에서 생태문학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
본 과제는 이규보의 문학을 중심으로 그의 문학 세계가 생태적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그의 산문 작품이 어떤 원리와 방식으로 생태 글쓰기를 실현하고 있는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이규보의 글에서 생태문학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규보의 자연에 대한 관점은 기존과 다르다. 이규보는 자연에서 규범이나 도덕을 찾아내려 하지 않고 자연의 영원성과 생명의 아름다움 포착하려 한다. 그에게 자연은 美의 본원인 동시에 지향처로 기능한다. 둘째, 그의 세계관은 유학뿐만 아니라 도가 및 불교와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明日朴還古有詩走筆和之」과 「南軒答客」에는 유불(儒佛一源), 도불일원(道佛一源)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불교의 공생(共生)과 생명 존중, 만물의 상호의존성 강조, 도교의 제물론(齊物論) 등은 생태 사상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셋째, 그는 문학은 풍아, 즉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論詩」에서 그는 시(문학)가 화려함만 잡고 실상을 버리면 시의 본지를 잃게 된다고 하면서 풍아(風雅)의 뜻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풍아는 『詩經』에 나타난 정신으로서 현실에 대한 교화와 풍자와 관련된 용어이다. 그는 문학이 현실과 유리되어서는 안 되며 현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풍자의식은 적극적인 개혁에 대한 의지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는 연암과 구별되는 글쓰기 태도를 보여준다. 넷째, 그는 자연 사물을 인간과 동등하게 생각한다. 이규보는 이, 벼룩, 파리, 누에, 거미, 매미, 달팽이, 개구리, 쥐, 개, 고양이, 소 등 일상의 미미한 사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즐겨 문학의 소재로 삼는다. 비단 생물뿐만 아니라 다리 부러진 궤, 자, 술병, 술동이 등 무생물도 주요 소재가 된다. 이와 같은 일상의 미미한 소재들에 대해 인간과 동등한 가치를 부여한다.
비록 그가 의식적으로 생태적 정신의 글을 쓴 것은 아니겠지만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된 생태적 사유가 글쓰기에 침윤된 양상에 주목할 것이다. 이규보의 작품에서 생태 글쓰기의 양상을 살핌으로써 고전에서 생태 글쓰기가 특정한 영역에 국한된 양상이 아니라 규범과 질서에 갇히지 않고 이질적 세계를 아우르며 타자(他者)를 존중하려 했던 작가들에게 나타난 ‘관점’이자 ‘정신’임을 밝히고자 한다.
본 과제는 이규보의 산문을 대상으로 할 것이다.『동국이상국집』과 『동문선』 등에 실린 그의 산문 작품은 대략 640여 편을 헤아린다. 그 가운데서도 본고의 취지에 부합하는 작품을 선별해 보면「방선부(放蟬賦)」, 「춘망부(春望賦)」, 「도앵부(陶甖賦)」, 「접과기(接菓記)」, 「태재기(泰齋記)」, 「문조물(問造物)」, 「답석문(答石問)」, 「소연명(小硯銘)」, 「슬견설(蝨犬說)」, 「괴토실설(壞土室說)」, 「이옥설(理屋說)」, 「문토령(問土靈)」, 「슬잠(蝨箴)」, 「밀봉찬(蜜蜂贊)」, 「잠찬(蠶贊)」, 「두목전증렬사박(杜牧傳甑裂事駮)」, 「주서문(呪鼠文)」, 「명반오문(命斑獒文)」, 「경설(鏡說)」등이 있다. 이규보의 생태 문학이 드러난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에서 생태 글쓰기가 실현되는 양상을 분석하게 될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 사물에 대한 태도, 자연 사물과 현실(삶)과의 관계에 대한 시각을 면밀히 검토해보고, 한편으로 형식상으로 자연사물을 어떤 방식으로 현실(혹은 삶)과 관련 맺게 하는지 그 방식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규보는 전근대 작가 가운데 문학 성취 면에서 최고 수준의 성취를 보여주는 작가이다. 실학자와 더불어 이규보의 생태 글쓰기를 분석하고 나면 고전에서의 생태 글쓰기를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생태 글쓰기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의 문제이며, 관습의 시선이 아닌 새로운 자각의 시선, 연민의 시선이 요구되는 글쓰기이다. 따라서 생태 글쓰기는 문학의 본질이 될 수 있으며 고전 글쓰기의 전통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