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각종 문집과 역사서에 나타나는 건국 담론의 서술 체계와 주요 내용을 파악한 후에 그 변화상을 파악하였다.
우선 태조∼태종대 주요 인물들의 문집에 나타난 건국 관련 내용을 검토했다. 『三峰集』(鄭道傳), 『耘谷行錄』(元天錫), 『松堂集』(趙浚), 『陽村集』(權近), 『春亭集』(卞季良) 등을 비 ...
본 연구는 각종 문집과 역사서에 나타나는 건국 담론의 서술 체계와 주요 내용을 파악한 후에 그 변화상을 파악하였다.
우선 태조∼태종대 주요 인물들의 문집에 나타난 건국 관련 내용을 검토했다. 『三峰集』(鄭道傳), 『耘谷行錄』(元天錫), 『松堂集』(趙浚), 『陽村集』(權近), 『春亭集』(卞季良) 등을 비롯하여 되도록 많은 문집을 살펴보았다. 일차적으로 주목되는 사실은 건국의 정당성의 고려 말의 弊政 혹은 舊弊와 비교되며 설명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즉, 건국의 결과 고려의 폐정이 극복되었다는 논리이다. 이는 이미 많은 연구에서 지목해 왔던 바이기도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그러한 내용이 어떤 구조로 대조 혹은 대비되는지를 살피고자 했다.
이외 각 악장에 나타난 건국의 서사도 분석해 보았다. 정도전, 하륜, 변계량 등 건국 초기에 가장 강력한 권력을 보유했던 관료들의 악장인 만큼 당대 권력관계의 양상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또한 『용비어천가』는 세종의 선대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의 6대의 업적을 통해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기존의 주장에 동의하는데, 여기에는 조선 초기 왕통을 태조-태종-세종으로 확정함으로써 선대의 역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정리하는 의도도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정종(恭靖王)의 위계는 낮추어졌고, 업적도 거론되지 않게 되었다. 이는 태종이 ‘왕자의 난’으로 집권하는 과정에서 세자에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받는 절차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화는 조선 왕실의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고려 왕실의 폐단을 부각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고,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실록이다. 일례로 우왕과 창왕에 대한 기사를 열전 반역전에 수록한 것은 위화도회군 이후 건국세력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타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고려사』에 서술되는 고려 말의 기록과 『태조실록』의 건국 초기 기록을 연결하여 조선 전기의 건국 담론을 살피고자 하였다. 편찬 시기로는 『태조실록』이 앞서지만, 『고려사』 역시 태종·세종대의 건국 역사화가 반영된 결과라고 본다.
더불어 건국 초기는 사서 편찬 관련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시기에 역사 서술의 ‘직서’원칙이 불완전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물론 세종이 ‘직서’를 매우 중시하기는 했지만, 그 원칙이 핵심 내용에는 종종 예외로 작용하였다. 상당 부분의 기술이 당대인들의 기억에 근거한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즉, 현실 정치의 권력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현대사’이면서도 편찬자들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관련 있는 얼마 전의 역사이다. 이 무렵의 건국 역사화는 후대, 이를테면 조선 후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상황 속에서 행해진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편찬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과거 건국의 역사화가 어떤 부분에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다루면서, 역사화의 양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피고자 했다.
건국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은 18세기 이후에 활발해졌다. 숙종, 영조, 정조, 고종 등과 같은 군주의 등장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특히, 숙종, 영조, 정조가 조종의 사적을 재인식하고 ‘繼志述事’의 명분으로 국가체제를 재편하려고 했다는 것이 최근 연구에서 주목된 바 있다. 국가 운영의 주체로서 정책 지향을 왕조의 ‘中興’으로 제시한 것이 창업 군주인 태조와 창업 사적인 여러 유적들을 재인식하고 표장하여 중흥의 역사적 당위를 설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흐름은 건국 역사 재편찬의 작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문치주의가 빛을 발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사람들은 수집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건국의 역사를 새로 편찬하였다. 정조대에 홍양호는 『흥왕조승』 4편을 올렸는데, 그 역시 『선원계보』, 『列聖誌狀』, 『국조보감』, 『용비어천가』, 『고려사』, 『경국대전』, 『여지승람』, 『北道陵殿誌』, 『松都誌』, 『東國考事』, 『三峰集』, 『文獻備考』 등의 여러 문헌을 섭렵하였다.
기존 문헌을 종합하여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과거 역사를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특히,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사서로 건국 역사가 다뤄진 것은 전대와 다른 특징 중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왕, 창왕의 廢假立眞을 믿지 않는다는 논설이 『頤齋亂藁』, 『東史綱目』 등에서 등장하는데, 이 무렵 사서 내용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사료 비판이 행해지는 발전적 변화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