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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선 건국’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
A Study on cognition of nation's founding in Joseon dynast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8S1A5B5A07074170
선정년도 2018 년
연구기간 1 년 (2018년 09월 01일 ~ 2019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김윤주
연구수행기관 서울시립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조선 건국은 역사학계의 오랜 화두였다. 해방 이후 역사학계는 조선 건국의 의미를 역동적으로 평가하고자 노력해왔다. 고려 말의 성리학 수용, 전제 개혁, 척불 등의 변화를 주체적이고 발전적인 관점으로 이해했고, 조선 초의 법전 정비, 제도 개혁 등은 건국의 과업을 완성 단계로 이끄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더불어 그러한 성과를 이끌어 냈던 주역들의 권력관계, 정치운영론 등을 통해 건국기의 정치체제를 구조적으로 살피고자 하였다.
    그런데 본 연구에서는 건국의 문제를 조금 다르게 접근해 보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 건국의 평가 문제는 근대 사학의 몫이었다. 하지만 史實에 대한 인식의 다양성은 근대 역사학뿐만 아니라 전근대의 사상 체계에서도 발견된다. 건국에 대한 인식은 조선 사람들에 아주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건국 사실은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일부는 기록으로 남았다.
    특히, 조선의 지배세력은 역성혁명에 대한 다양한 언급, 논쟁, 문장 등을 통해 국가 정체성과 관련한 담론을 마련하였고, 그것이 당대인들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국가 통치의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도 건국의 역사는 지나간 과거였지만, 한편으로‘현대사’의 범주에 속하는 현실의 문제이기도 했다. 건국의 역사는 조선의 국가체제 유지를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했지만, 이후 치열했던 정치 현실과 맞물리면서 건국 과정에서 정리되었던 창업 정당성의 논리들이 다시 언급되곤 했다.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는 건국 담론은 작성 시기, 주체, 상황 등에 따라 각기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일단 조선 전기와 후기는 큰 차이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건국 담론의 목적성부터 달랐다. 조선 초 건국의 주역들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에는 그들의 정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건국의 과정으로 설명되어야 했다. 따라서 조선 초의 건국세력은 창업이 天命과 人心의 향배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각종 이념적 설명과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창업의 정당성이 어느 정도 확보된 후에도 건국의 논리와 수사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상 그들에게 창업은 옛 祖宗의 성과였고, 따라서 당대 왕조 혹은 지배세력의 정당성 문제가 건국 과정과 직결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건국의 과정은 자주 언급되었고, 그것은 그 언급 목적과 관련하여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하는 전거로 활용되었다.
    건국의 역사는 『용비어천가』를 비롯하여 다양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고려사』, 『東國通鑑』과 같은 역사서는 고려 말의 ‘舊弊’․‘舊習’을 지적하고 조선의 건국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실록은 조선시대 지배세력의 건국에 대한 인식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기록이라고 본다. 이외 사찬 사서나 문집에 수록된 문장에서도 관련 내용이 많다. 정조 때 洪良浩가 국왕에게 바친 『興王肇乘』과 같은 기록은 『용비어천가』의 내용과 궁중에 비장된 사료들을 모아서 연대별로 재정리하고 함경도 지역의 민간에 전해오는 이야기와 祖宗을 찬양한 가요까지 수록하였다. 주요 서술 대상은 태조 이성계의 건국 이전 과업과 桓祖 이전의 4祖에 대한 내용이었다. 정조는 그동안 “감히 하기 어려워서” 저술하지 못했다고 언급하면서, 홍양호의 저술이 ‘追遠報本’의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하였다. 차후 세부 내용 분석과 더불어 당시 『흥왕조승』이 편찬되었던 배경을 분석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물론 전근대 왕조 사회에서 건국의 문제는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조선 사람들의 인식에 차근차근 반영된 국가의 위계, 권위, 정당성의 무게는 건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군주의 위상 문제로 귀결되기도 해서 더욱 범접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록에 나타난 그들의 건국에 대한 주관적 사고와 평가를 밝혀볼 필요가 있다. 분명한 점은 그들이 건국의 역사를 거론할 때마다 시대적 배경, 정치적 상황, 언급 주체 등이 달랐다는 것이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왜 건국을 언급하고 설명했는지 분석해 보는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겹겹이 중첩되어진 국가관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적 도덕관이나 성리학적 사상 체계는 건국의 역사 기록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건국의 문제가 당대의 정치적 현실과 맞물려 어떻게 설명되는지 파악함으로써 정치운영의 한 측면을 살펴볼 수도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건국 초에 형성된 고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는 점도 천착해봐야 할 문제이다.
  • 기대효과
  • <정치적 정당성과 지배 권력관의 관계 규명>
    예나 지금이나 정치에서는 정당성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지만, 정당성은 언제나 논쟁을 동반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하지 못한 권력은 국민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 정치가 정의롭지 않았을 때, 우리들은 거부할 수 있었다.
    조선의 지배층도 백성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만 했다. 천명의 거취는 爲民, 愛民의 여부에 달려있었다. 국왕은 자신이 백성을 중시하는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따라서 성리학적인 천명론을 비롯하여 덕치, 예치, 仁政, 왕도정치, 공론정치 등과 같은 테두리에 자신의 행위를 맞춰야만 했다. 하지만 지배층이 국가적 정통성의 확립과 관련하여 백성에게 적극적인 동의를 구했다고 보기는 사실 어렵다. 백성이 국왕의 애민 실천 여부를 심판할 수도 없었다.
    조선 건국은 고려가 성립한 지 470여 년 만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고려의 국가적 정당성은 470여 년 동안 유효했다는 것이다. 삼국을 통일하여 ‘三韓一統’의 과업을 이룩했던 고려의 역사는 조선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 왕조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어지러운’정치를 비판하고, 조선의 ‘성스러운’ 과업을 강조해야 했다.
    조선 사람들에게 천명은 무엇이고, 혁명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국왕들은 왕업의 기초를 쌓은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또한 조선의 지배 권력은 어떻게 백성의 ‘간접적인’동의를 구할 수 있었나? 세조의 계유정난, 명종대의 훈척정치, 세도정권 등으로 정권이 혼란해졌을 때 맹자의 혁명론을 되새겨보았던 사람은 없었을까?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국가적인 위기가 왔을 때 건국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을까? 전쟁으로 인해 중국과 일본의 정권이 바뀌었을 때 조선의 혁명을 고려했던 사람은 없었을까? 이와 같은 물음은 조선이라는 한 국가의 정치적 정당성이 500여 년 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본 연구는 건국의 역사와 신화를 통해 나름의 해답을 구해보려 한다.

    <조선 건국 관련 연구의 외연 확장>
    건국의 역사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지식을 생성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고대 이래의 건국 역사를 보면서 민족을 논했고, 통일을 지향했으며, 역사의 발전을 논해 왔다. 그리고 본 연구는 조선 건국을 다루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국가와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했고, 사람들의 건국 관련 기록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사람들을 어떠한 담론 구조에 편입시키려 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지금은 건국과 관련된 다양하고 심층적인 학문적 논의가 필요한 시기다.
    이제까지는 대개 조선 건국이라는 사실이 역사 연구에서 유효한 시기를 이른바 ‘경국대전 체제’가 완성되는 성종대로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최근 영조, 정조, 고종의 권력 강화와 관련하여 건국에 대한 담론을 주목하는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구 경향에 힘입어 본 연구는 대상 시기를 보다 확대하고자 한다. 조선 전 시기를 대상으로 하여 건국 담론이 어떻게 설명되고 변화하는지, 그로 인해 조선 사람들의 국가관, 군주관은 어떤 내용을 담게 되는지 살펴보겠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사료에 나타난 건국에 대한 인식 구조를 단순하게 전달하는 차원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 가는 모습을 포착해 보려 한다. 건국의 역사는 과거의 지나간 일에 그치지 않았고, 이후 조선의 정치사상적 변화에 깊숙이 관련되면서 지속되었고 변용되었다. 겹겹으로 쌓여진 역사 인식의 구조를 밝혀내야만 조선시대 사람들의 건국에 대한 이해 방식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다. 향후 이 연구가 조선시대의 정치사, 심성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바탕이 되기를 기대한다.
  • 연구요약
  • <건국 과정에 대한 정당성 확보와 역사화>
    정치에서 정당성 문제는 정치세력의 성공과 몰락, 정치권력의 행위 능력, 정치체제의 안정성과 불안성성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전근대 조선의 정치에서도 정당성 문제는 매우 중요했다. 천명과 민심의 소재는 정당성의 여부를 결정했고, 공론을 통해 정당성의 가치가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건국세력의 논리를 재고하고, 그러한 논리들이 후대의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또한 조선왕조의 강력한 권력에 의해 명백한 史實이 되었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국가관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되리라 여겨진다.
    혁명 담론을 통해 정권의 안정을 꾀했던 프레임은 후대의 지식인들에 의해 기존의 논리가 강화되거나 혹은 재구성되기도 했다. 최근 공양왕 선양이 건국 미화의 결과였다는 연구도 있었지만, 조선 후기 들어서 일부 학자들이 건국 역사에 의문을 표하는 사례도 주목해 볼 수 있다. 정치 변동 등의 외적인 조건들을 반영하면서 건국에 대한 혁명의 담론이 조선시대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지속 혹은 변용되고 있었는지 살펴보겠다.

    <『용비어천가』식의 논리와 신화화>
    조선시대 『용비어천가』는 조선 건국의 天命性을 공표하고 후대 왕들에 대한 鑑戒를 담고 있다. 이러한 『용비어천가』가 조선 후기에 재간행 된 것이 왕권 강화와 관련되어 이미 설명된 바 있는데, 본 연구에서 관심을 두는 것은 『용비어천가』식의 논리가 사대부, 백성들을 포함한 민간에 얼마나 유통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특히, 후대의 지식인들이 『용비어천가』 중의 어떤 내용을 중요하게 받아들였는지 세밀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개인이 집필한 역사서, 문집 등에서는 『용비어천가』 식의 논리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작업을 수행해 보겠다. 또한 『용비어천가』를 주요 사료로 채택하여 저술된 『興王肇乘』, 『朝野僉載』 등도 검토할 것이다.
    한편, 『용비어천가』에 담긴 내용은 대부분 전승 설화와 민속 신앙을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민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사유체계에서 건국 시조의 경이로운 신성성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신화의 내용은 실재하지 않거나 역사적 사실로 증명하기 어려운 것도 많았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성리학적인 합리성으로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용비어천가』 속 신화적 내용을 영원한 진리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신화 혹은 설화의 내용은 민간의 건국에 대한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단서라고 여겨진다.

    <정치운영에서의 건국 담론의 변화>
    지배세력의 국가관이나 건국에 대한 이해를 보여줄 수 있는 적절한 기록은 실록이라고 판단된다. 앞서 논한 건국 사실의 역사화, 신화화의 현실 반영은 실제 조정에서 어떻게 논의가 되었는지의 문제로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선대의 창업과 관련되었던 수많은 언급을 실록에서 일차 검토한 결과,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創業은 쉽고 守成은 어렵다’는 명제가 오랫동안 통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시대 군주관으로 연결되어 설명되곤 했다. 왕조사회이기 때문에 국가의 창업과 수성의 성과와 책임이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종을 비롯하여 후대의 국왕들은 ‘수성의 시대’에 살았고, 창업 군주와는 다른 수성 군주로서의 덕목을 요구받았다. 그리고 반정이나 전쟁을 겪은 군주에게는 中興, 改創 등의 역할이 부여되기도 했다. 이러한 군주관의 차이는 건국 담론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관료, 학자들에 의한 건국의 역사 쓰기는 그들이 살던 시대의 권력구조 내에서 존재하였다. 거기에 그들의 정치적, 사상적 신념이 덧붙여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건국 역사의 패러다임을 구축하였다. 조정에서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위와 같은 논지의 건국 역사가 종종 언급되는데, 세부 논리는 점점 보강되고 확장되어 갔다. 건국은 과거의 일에 그치지 않았다. 건국의 정당성은 그들 시대의 정치운영이 타당하다는 것으로 연결되었고, 그들 미래에 나타날 일들에 대한 명분 있는 기억이 되어갔다. 하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건국에 대한 역사와 담론이 어떻게 수정되어 갔는지도 살펴볼 문제이다. 건국과 관련된 논의가 시대의 변화와 다양한 사람들의 해석에 따라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일부는 변용되었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연구를 진행해 보겠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에서는 조선의 각종 기록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건국 담론을 살폈다. 조선시대 지배세력은 역성혁명에 대한 다양한 언급, 논쟁, 문장 등을 통해 국가 정체성과 관련한 담론을 마련하였고, 그것이 당대인들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국가 통치의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도 건국의 역사는 지나간 과거였지만, 한편으로‘현대사’의 범주에 속하는 현실의 문제이기도 했다. 또한 건국의 역사는 조선의 국가체제 유지를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했는데, 이후 치열했던 정치 현실과 맞물리면서 건국 과정에서 정리되었던 창업 정당성의 논리들이 다시 언급되곤 했다.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는 건국 담론은 작성 시기, 주체, 상황 등에 따라 각기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일단 조선 전기와 후기는 큰 차이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건국 담론의 목적성부터 달랐다. 조선 초 건국의 주역들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에는 그들의 정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건국의 과정으로 설명되어야 했다. 따라서 조선 초의 건국세력은 창업이 天命과 人心의 향배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각종 이념적 설명과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창업의 정당성이 어느 정도 확보된 후에도 건국의 논리와 수사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상 그들에게 창업은 옛 祖宗의 성과였고, 따라서 당대 왕조 혹은 지배세력의 정당성 문제가 건국 과정과 직결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건국의 과정은 자주 언급되었고, 그것은 그 언급 목적과 관련하여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하는 전거로 활용되었다.
  • 영문
  • This study analyzed various founding discourses found in various records of Joseon. The ruling forces of the Joseon Dynasty prepared a discourse on national identity through various references, arguments and sentences about the revolutionary revolution. And as the discourse was accepted as "truth" by the contemporaries, it could secure the rationality of state governance. For them, the history of founding was a past, but it was also a matter of reality that falls under the category of 'modern history'. The history of the founding was also a prerequisite for maintaining the country's system. However, in conjunction with the fierce political reality, the logic of founding legitimacy, which had been settled previously, was mentioned again.
    The founding discourses found in various records contain different contents depending on the time of writing, subject and situation. There is a big difference between the early and late Joseon periods. First of all, the purpose of the founding discourse was different. When the protagonists of the founding nations took over the regime in the early days of Joseon, the legitimacy of their political actions had to be explained as the founding process. However, even after time had established some degree of legitimacy, the founding logic and rhetoric did not disappear. In fact, for them, entrepreneurship was the achievement of the former kings. Thus, the legitimacy issue of dynasties or ruling forces was not directly related to the founding process. Nevertheless, the founding process was often mentioned. It was used as an authority to draw very meaningful conclusions about the political task.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각종 문집과 역사서에 나타나는 건국 담론의 서술 체계와 주요 내용을 파악한 후에 그 변화상을 파악하였다.
    우선 태조∼태종대 주요 인물들의 문집에 나타난 건국 관련 내용을 검토했다. 『三峰集』(鄭道傳), 『耘谷行錄』(元天錫), 『松堂集』(趙浚), 『陽村集』(權近), 『春亭集』(卞季良) 등을 비롯하여 되도록 많은 문집을 살펴보았다. 일차적으로 주목되는 사실은 건국의 정당성의 고려 말의 弊政 혹은 舊弊와 비교되며 설명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즉, 건국의 결과 고려의 폐정이 극복되었다는 논리이다. 이는 이미 많은 연구에서 지목해 왔던 바이기도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그러한 내용이 어떤 구조로 대조 혹은 대비되는지를 살피고자 했다.
    이외 각 악장에 나타난 건국의 서사도 분석해 보았다. 정도전, 하륜, 변계량 등 건국 초기에 가장 강력한 권력을 보유했던 관료들의 악장인 만큼 당대 권력관계의 양상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또한 『용비어천가』는 세종의 선대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의 6대의 업적을 통해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기존의 주장에 동의하는데, 여기에는 조선 초기 왕통을 태조-태종-세종으로 확정함으로써 선대의 역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정리하는 의도도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정종(恭靖王)의 위계는 낮추어졌고, 업적도 거론되지 않게 되었다. 이는 태종이 ‘왕자의 난’으로 집권하는 과정에서 세자에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받는 절차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화는 조선 왕실의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고려 왕실의 폐단을 부각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고,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실록이다. 일례로 우왕과 창왕에 대한 기사를 열전 반역전에 수록한 것은 위화도회군 이후 건국세력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타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고려사』에 서술되는 고려 말의 기록과 『태조실록』의 건국 초기 기록을 연결하여 조선 전기의 건국 담론을 살피고자 하였다. 편찬 시기로는 『태조실록』이 앞서지만, 『고려사』 역시 태종·세종대의 건국 역사화가 반영된 결과라고 본다.
    더불어 건국 초기는 사서 편찬 관련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시기에 역사 서술의 ‘직서’원칙이 불완전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물론 세종이 ‘직서’를 매우 중시하기는 했지만, 그 원칙이 핵심 내용에는 종종 예외로 작용하였다. 상당 부분의 기술이 당대인들의 기억에 근거한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즉, 현실 정치의 권력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현대사’이면서도 편찬자들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관련 있는 얼마 전의 역사이다. 이 무렵의 건국 역사화는 후대, 이를테면 조선 후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상황 속에서 행해진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편찬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과거 건국의 역사화가 어떤 부분에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다루면서, 역사화의 양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피고자 했다.
    건국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은 18세기 이후에 활발해졌다. 숙종, 영조, 정조, 고종 등과 같은 군주의 등장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특히, 숙종, 영조, 정조가 조종의 사적을 재인식하고 ‘繼志述事’의 명분으로 국가체제를 재편하려고 했다는 것이 최근 연구에서 주목된 바 있다. 국가 운영의 주체로서 정책 지향을 왕조의 ‘中興’으로 제시한 것이 창업 군주인 태조와 창업 사적인 여러 유적들을 재인식하고 표장하여 중흥의 역사적 당위를 설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흐름은 건국 역사 재편찬의 작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문치주의가 빛을 발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사람들은 수집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건국의 역사를 새로 편찬하였다. 정조대에 홍양호는 『흥왕조승』 4편을 올렸는데, 그 역시 『선원계보』, 『列聖誌狀』, 『국조보감』, 『용비어천가』, 『고려사』, 『경국대전』, 『여지승람』, 『北道陵殿誌』, 『松都誌』, 『東國考事』, 『三峰集』, 『文獻備考』 등의 여러 문헌을 섭렵하였다.
    기존 문헌을 종합하여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과거 역사를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특히,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사서로 건국 역사가 다뤄진 것은 전대와 다른 특징 중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왕, 창왕의 廢假立眞을 믿지 않는다는 논설이 『頤齋亂藁』, 『東史綱目』 등에서 등장하는데, 이 무렵 사서 내용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사료 비판이 행해지는 발전적 변화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① 정치적 정당성과 지배 권력관의 관계 규명
    예나 지금이나 정치에서는 정당성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지만, 정당성은 언제나 논쟁을 동반한다. 조선의 지배층도 백성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만 했다. 천명의 거취는 爲民, 愛民의 여부에 달려있었다. 국왕은 자신이 백성을 중시하는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따라서 성리학적인 천명론을 비롯하여 덕치, 예치, 仁政, 왕도정치, 공론정치 등과 같은 테두리에 자신의 행위를 맞춰야만 했다. 하지만 지배층이 국가적 정통성의 확립과 관련하여 백성에게 적극적인 동의를 구했다고 보기는 사실 어렵다. 백성이 국왕의 애민 실천 여부를 심판할 수도 없었다.
    조선 건국은 고려가 성립한 지 470여 년 만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고려의 국가적 정당성은 470여 년 동안 유효했다는 것이다. 삼국을 통일하여 ‘三韓一統’의 과업을 이룩했던 고려의 역사는 조선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 왕조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어지러운’정치를 비판하고, 조선의 ‘성스러운’ 과업을 강조해야 했다. 본 연구는 조선이라는 한 국가의 정치적 정당성이 500여 년 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의문을 풀어보고자 했다.

    ② 조선 건국 관련 연구의 외연 확장
    조선 건국의 역사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지식을 생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우리는 고대 이래 여러 왕조의 건국 역사를 보면서 민족을 논했고, 통일을 지향했으며, 역사의 발전을 논해 왔다. 본 연구가 조선 건국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국가와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했고, 사람들의 건국 관련 기록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사람들을 어떠한 담론 구조에 편입시키려 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제까지는 대개 조선 건국이라는 사실이 역사 연구에서 유효한 시기를 이른바 ‘경국대전 체제’가 완성되는 성종대로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최근 영조, 정조, 고종의 권력 강화와 관련하여 건국에 대한 담론을 주목하는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구 경향에 힘입어 본 연구는 대상 시기를 보다 확대하고자 했다. 조선 전 시기를 대상으로 하여 건국 담론이 어떻게 설명되고 변화하는지, 그로 인해 조선 사람들의 국가관, 군주관은 어떤 내용을 담게 되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사료에 나타난 건국에 대한 인식 구조를 단순하게 전달하는 차원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 가는 모습을 포착해 보려 했다. 겹겹으로 쌓여진 역사 인식의 구조를 밝혀내야만 조선시대 사람들의 건국에 대한 이해 방식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다.
  • 색인어
  • 조선 건국, 정당성, 혁명, 국가정체성, 역사 해석, 태조, 태종, 영조, 정조, 고종, 정도전, 정몽주, 조선건국세력, 절의, 성리학, 용비어천가, 흥왕조승, 역사화, 신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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