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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평양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고려시대 평양 연구 | 2004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김창현(성신여자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01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8년 03월 0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8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고려왕조의 서경사원 경영은 고구려 이래의 절을 수리하거나 필요에 따라 새로 창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황성 안의 흥국사를 중심으로 북쪽에 중흥사와 금강사 등이, 남쪽에 흥복사와 인왕사 등이 평양성을 진호하는 형태였고, 북성 안의 영명사는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상징하는 절이었다. 서경불교의 특징은 미륵·용 신앙, 신선·도교의 경향이 강했고 법화신앙이 스며 있었고 신비적 밀교적 성향이 농후했다. 고려 국왕은 평양에 직접 행차하거나 사절을 파견해 재제를 지냈다. 평양에는 동명왕과 관련된 추모시설 내지 유적이 다수 존재했다. 동명성제사는 동명성제의 신령이 깃들어 효험을 주는 사당이었다. 평양에는 '평양'신, 목멱신, 성황신 등 민간적이고 무속적인 다양한 신격이 숭배되었다. 태조는 평양에 서경을 경영하고 개경정부와 동등한 서경정부를 만들었다. 혜종정권은 임진강 이북 북부세력에 의해 와해되었다. 서경세력은 서경천도를 시도했지만, 광종을 내세운 평주·황주를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에게 패배당했다. 평주세력과 황주세력이 집권했지만 전자는 광종 중기에, 후자는 말기에 숙청당했다. 성종은 치세 후반기에 전통과 서도를 중시했다. 서도를 중앙집권체제의 일환으로 서경유수라 하여 격하했지만 동경보다 우위에 두었다. 목종 때 천추태후 세력은 북부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는데 서경유수를 호경으로 승격해 중시했다. 서경 관부는 초기에는 개경 관부와 동등한 위상을 가졌다. 성종대와 현종대를 거치면서 유수관과 서경관으로 분화되고 문종대에 완성되고 예종대에 재정비되었다. 서경관은 병부와 호부 중심으로 다양한 관청과 관리가 있었는데, 묘청 정변의 실패 후에 위상이 하락해 육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서경유수관은 국왕을 대신하여 서경과 관할 지역을 다스렸고, 서경관은 서경유수관의 지휘를 받아 서경유수관을 보좌하면서 각자의 분야에서 다양한 업무를 처리했다. 서경유수관은 서경인이 아닌 자가, 서경관은 서경인이 임명되어 종종 갈등을 야기했다. 서경의 관할 지역은 절령 이북이지만 직접적인 지배력이 관철되는 직할구역은 도성과 경기 일대였다.
  • 영문
  • In Pyongyang many temples were built since the King Gwanggeto of Koguryeo. Koryeo managed Pyongyang as Seogyeong
    and it remodelled temples built since Koguryeo or constructed new temples as needed. Buddhism in Seogyeong had tendencies to be mysterious. Jungheung and Geumkang temples in the north, Heungbok and Yinwang temples in the south protected Pyongyang Castle, centering around Heungkuk Temple inside Imperial Castle. Yeongmyeong Temple inside North Castle was to symbolize that Koryeo succeeded to Koguryeo. The veneration of King Taejo in Pyongyang centered around his shrine, which was associated with worshipping King Dongmyeong. The areas around Guje Palace and Yeongmyeong Temple were the places which King Dongmyeong and Koryeo Kings had met, transcending space and time. The shrine of King Dongmyeong existed separately, which was called Dongmyeongseongjaesa. Besides in Pyongyang there were several shrines for many deities of shamanism. King Taejo managed Seogyeong in Pyongyang and established the government of Seogyeong which was equal to that of Gaegyeong. Hyejong's reign was disintegrated by the officials from the northern area of the dynasty. The power group of Seogyeong tried to move the capital to Seogyeong, but it was defeated by the counterforce that was representative of Pyeongju and Hwangju. King Seongjong took a serious view of tradition and Seodo in the latter half of his reign. He downgraded Seodo as Seogyeongyusu for centralization, but he considered it as its superiority to Donggeong. During the early stages, The Seogyeong gwanbu was regarded as having the same status as the Gaegyeong gwanbu. The responsibility for Seogyeong's administration began to be divided between the Yusugwan and Seogyeonggwan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and Hyeonjong. While those appointed as Seogyeong Yusugwan officials were not from the Seogyeong Area, the majority of those who worked for the Seogyeonggwan hailed from this regio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고려는 서경에 사원을 고구려 이래의 절을 수리하거나 필요에 따라 새로 창건하는 방식으로 경영했다. 금강사와 연복사(반룡사)는 고구려 이래의 절이고, 영명사·흥국사·흥복사도 그러하다고 여겨졌다. 중흥사와 9층탑은 태조가 후삼국 통일을 염원하는 뜻을 담아 건설한 것이었다. 황성 안의 흥국사를 중심으로 북쪽에 중흥사와 금강사 등이, 남쪽에 흥복사와 인왕사 등이 평양성을 진호하는 형태였고, 북성 안의 영명사는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상징하는 절이었다. 역대 국왕들은 상원 연등회와 10월 팔관회 때 서경에 행차하거나 사절을 보내 재를 지냈다. 서경 불교의 특징은 미륵·용 신앙, 신선·도교의 경향이 강했고 법화신앙이 스며 있었고 신비적 밀교적 성향이 농후했다. 고려 국왕은 평양에 직접 행차하거나 사절을 파견해 재제를 지냈다. 평양에는 동명왕과 관련된 추모시설 내지 유적이 다수 존재했다. 동명성제사는 동명성제의 신령이 깃들어 효험을 주는 사당이었다. 평양에는 '평양'신, 목멱신, 성황신 등 민간적이고 무속적인 다양한 신격이 숭배되었다. 태조는 평양에 서경을 경영하고 개경정부와 동등한 서경정부를 만들었다. 혜종정권은 임진강 이북 북부세력에 의해 와해되었다. 서경세력은 정종을 추대해 서경천도를 시도했지만, 광종을 내세운 평주·황주를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에게 패배당했다. 평주세력과 황주세력이 집권했지만 전자는 광종 중기에, 후자는 말기에 숙청당했다. 이러한 결과 경종 때 서경·평주·황주 출신의 관료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성종은 치세 후반기에 전통과 서도를 중시했다. 서도를 중앙집권체제의 일환으로 서경유수라 하여 격하했지만 동경보다 우위에 두었다. 목종 때 천추태후 세력은 북부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는데 서경유수를 호경으로 승격해 중시했다. 서경 관부는 초기에는 개경 관부와 동등한 위상을 가졌다. 성종대와 현종대를 거치면서 유수관과 서경관으로 분화되고 문종대에 완성되고 예종대에 재정비되었다. 서경유수관은 국왕을 대신하여 서경과 관할 지역을 다스렸고, 서경관은 서경유수관의 지휘를 받아 서경유수관을 보좌하면서 각자의 분야에서 다양한 업무를 처리했다. 서경유수관은 서경인이 아닌 자가, 서경관은 서경인이 임명되어 종종 갈등을 야기했다. 서경의 관할 지역은 절령 이북이지만 직접적인 지배력이 관철되는 직할구역은 도성과 경기 일대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고려시대 평양 연구}라는 과제를 수행하여 [고려 서경의 사원과 불교신앙], [고려시대 평양의 동명 숭배와 민간신앙], [고려초기 정국과 서경], [고려 서경의 행정체계와 도시구조]라는 논문을 개재했다. 본 연구는 평양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소외되어 왔던 불교와 사원, 신화와 여러 신앙, 행정구역과 도시구획, 성곽과 궁궐, 고려후기 평양의 변화모습, 다른 도읍과의 비교 등을 수행함으로써 평양학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고려의 평양을 조명함에 북한 학계의 고구려 평양에 대한 조사·발굴·연구를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고려의 평양을 복원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을 천명하고 서경을 고구려의 평양에 건설했기 때문에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고구려 평양을 가지고 고려의 평양을 설명해도 큰 무리는 없다. 더구나 북한 학계에서 파악하고 있는 고구려 평양의 모습은 오히려 고려 평양의 모습에 더 가까울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평양의 모습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약 250년 동안 훼손되다가 고려에 의해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고구려와 고려의 평양을 비교해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평양은 고구려, 고려, 조선 때의 유적이 꽤 남아 있다. 사람들은 평양의 현재 모습을 보기도 원하지만 과거 모습을 보거나 그려보기를 원하기도 한다. 본 연구는 지난날 평양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조명해 복원함으로써 남북의 화해와 교류에 기여할 수 있고, 사람들이 평양을 방문해 유적을 대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다. 남한의 도읍사 내지 도시사 연구는 서울(한양), 경주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경향이 강하다. 본 연구결과를 통해 그러한 경향을 지양해 도읍사 내지 도시사를 북한 지역까지 확대하고 평양과 다른 도읍을 비교하는 데 활용하려 한다. 연구성과를 완성해 단행본으로 출간한 후 소프트웨어 전문가와 협력해 평양의 모습을 문화 콘텐츠로 재구성하는 데 활용하려 한다. 남북한의 교류, 국내·외의 북한인식에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오리라 기대한다.
  • 색인어
  • 고구려, 고려, 평양, 서경, 불교, 불교사원, 법화신앙, 밀교, 묘청, 재제, 연등회, 팔관회, 평양신, 성황신, 신비적 경향, 도교, 태조, 동명왕, 구제궁, 영명사, 동명신사, 민간신앙, 서경세력, 평주세력, 황주, 천추태후 세력, 대량원군 세력, 행정체계, 도시구조, 서경유수관, 서경관,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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