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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문사제의 처변논리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면문사제의 처변논리 연구 | 2004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백도근(영남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115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5월 30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면문사제(俛門師弟)의 처변논리(處變論理) 연구 (요약문)

    본 연구에서는 곽면우와 그 문하생들이 국가흥망의 위기상황에서 유가 학도로서 국가와 학문을 보존하기 위하여 어떤 독특한 행보를 했었으며, 그 행보가 어떤 의의를 지녔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는 일반적인 행위준칙이 주어져 있지만 특수한 상황 하에서는 일의 경중을 따라 처신해야 한다.
    과거 유교 사회에서는 남녀가 직접 손으로 물건을 주고받지 않는 것이 예였지만, 맹자는 물에 빠진 여자를 손을 내밀어 건지지 않는 자는 예를 아는 자가 아니라 금수같은 자라 하였다. 이는 평소의 예는 삶을 돕는 것이므로 지키는 것이지만 비상시에는 비상한 방법만이 삶을 도울 수 있고 평상의 예는 때로 판단을 흐리게 할 수가 있다. 그결과 예를 위하여 삶을 외면하는 경우가 되면 이는 본질을 망각한 것이 되므로 사람을 고의로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맹자가 질책한 것이다. 신라시대 최고운(崔孤雲)도 평상시에는 에티켓을 지켜야 하지만 위험한 상황을 만나서는 그 위험을 벗어날 수 있게 처신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조선조 유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처변에 능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조선조 말기 국권침탈이라는 어수선한 상황 아래에서 많은 유자들이 옛 습속만 고집하거나 아니면 외세에 눌려 아무런 대책도 없이 허둥대기에 급급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한주는 중국에 홍수전의 난이 일어나자(1857) 그 기회에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철폐하자는 상소문을 썼고, 63세 되던 해(1880)에는 부산의 일본관(日本館)을 찾아 일인들과 대화하고, 근대적 시장을 둘러보고, 기선을 타 보기도 하는 등 한 학파의 종장으로서는 독특한 행보를 보여주었다.
    곽면우는 58세 이후로 국권상실의 위기를 당하여 한가로이 성리논쟁을 하기를 싫어하고, 서양의 사상과 종교 그리고 여러 제도 등에 관심을 나타내는가 하면,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도 의병운동에 뛰어들기 보다는 서구열강에 조선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는 등 독특한 행보를 취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성와 이인재는 일찍부터 서양문물에 관한 글들을 널리 읽었고, 나중에 서구 정치의 옳고 그런 점을 정리해서 「태서신편」 짓고, 그 학술의 정사(正邪)를 분변하여 「철학고변」을 지었다.
    성와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약육강식의 형세(=優勝劣敗之勢)’로 파악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가치로서는 중국의 옛 것을 본받고 정치는 서양의 새 제도를 본받을 것을 주장하였다.
    하회봉은 그의 「국성론(國性論)」을 통하여 "한 나라 사람이 모두 숭상하는 바를 국성(國性) 이라" 정의하고, 우리의 국성인 에의를 고수하여 서양의 "정밀한 기술", "강한 세력", "병기의 예리함"을 이길 것을 주장하였다.
    진암 이병헌은 34세 이전까지는 전통적인 성리학도의 길을 밟았지만 그가 34세 되던 해(1903년)에 서울에서 새로운 문물을 본 이후 유교를 지키기 위해서는 유교를 기독교와 같은 종교로 만드는 길밖에 없다고 보고 유교종교화의 길을 걸었다.
    중재 김황은 면문의 제자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남아 활동하면서 스스로 접한 서양철학과 20세기 변화에 잘 대처하지 못했던 격변기 유교에 대한 반성을 그의 저술에 담아내고 있다.
    이상 면우학파의 행보는 봉건사회에서 나고 봉건적 이념 속에 살았던 유가지식인들이 국권상실과 근대화라는 전혀 낯선 상황에서 그들의 신념을 고수해 가면서 낯선 상황을 받아들였던 그들만의 독특한 행보로 이해될 수 있다.
  • 영문
  • A study of Match-Change Theory in Myun-U School (Abstract)

    I studied that Gwak Myeon-U and disciples had had some peculiar action to preserve the country and learning because do downfall of Choson Dynasty postwar days in study that see and the action retained some sense.
    Gwak Myeon-U and his disciples took otherer behavior, but general Confucianists about invaders are very hostile or were surrender enemy. They expose Japan's plunder attribute to foreign embassies in department, and dispatched representative in world nations peace meeting(1919) that began in France and complain of mortified situation of our country, that did not try any other school. When the country encounters crisis of downfall, more than philosophical controversy that they enjoy ordinary times that European political ideas, religion thought, education system, political system in back be interested. Also, they than armed strife because defying in plunder of Japan, was interested in work that complain to community of nations to check plunder of Japan. This was gritty ideas and action truly as for Confucianists who lived in feudal ideology becoming in feudal society. They never that as apostate, approached in point of problem as a very intelligent person. Did not succeed olny unfortunately.
    I wished to derive genuine evaluation about Gwak Myeon-U and his disciples' action through this stud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국가가 비상한 시대를 만나면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선비가 붓 대신에 칼을 쥐거나 국가보전을 위해서 술수를 사용하게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처변(處變)의 태도라고 부른다. 구한말의 비상상황에서 최면암(崔勉庵) 이나 유의암(柳毅庵) 그리고 김척암(金拓菴) 등이 기의(起義)한 것은 선비가 붓 대신 칼을 든 명쾌한 경우이다. 그러나 전간재(田艮齋)가 "동학에도 관심 없고, 서학에도 관심 없다. 사는 것도 묻지 않고 죽는 것도 묻지 않고, 오직 도만 지킨다."라고 선언하고 섬으로 나가 육지를 밟지 않는 것으로 자부한 것은 옛날 백이와 숙제 형제가 "주곡을 먹지 않으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었다"는 '이제(夷齊)의 도'에는 부합했을지 모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잘 납득이 안 되는 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곽면우가 기의(起義)에 참여하기를 회피하고, 외국공관을 기웃거렸던 일은 보기에 따라서는 당시 한 학파의 대사(大師)로서 의연하지 못하다는 오해도 있을 법하였다. 그러나 명쾌하다고만 해서 반드시 잘한 일도 아니고 그렇지 않았다고 잘못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전간재와 곽면우 양인의 행보를 통해서 느낄 수가 있다. 양인은 적어도 그 제자들에게는 지극히 존경받았고, 그 학문이 광복 이후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근대유학사에 독특한 지위를 누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곽면우가 왜 무장봉기에 참여하기 보다 외국공관을 기웃거렸고, 기미년 봉기에 참여하는 대신 파리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나라의 처지를 호소하고 일본의 죄과를 성토하여 나라를 되찾는 계기로 삼으로 했던 행위가 그의 독특한 처변철학에 근거한다고 보고 그의 처변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무엇이었던가를 밝혀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혹 오해가 있었지만 한주학파의 맏형격인 허후산(許后山)이 끝까지 면우를 질책한 적이 없었고, 면문제자들이 한결같이 면우를 존경했으며, 궁극적으로 동일한 행보를 보여주었던가를 밝힘으로써 19세기를 넘어 20세기 중, 후반기까지 걸쳐 가장 장수한 유가학파 중 하나인 면문사제의 학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조선의 유학이 그 말미에 의병장 몇 명을 배출하고 끝난 것으로 보지 않고 그 뒤도 살아남아 아직도 그 행보를 계속하고 있는 국학의 주류사상으로 자리매김 하고자 하는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4. 학술 및 사회에 대한 기여

    종교의 계율은 불변을 고집할 수 있을지 몰라도, 유가사상은 철학이기 때문에 변할 수밖에 없고 또 변해야 한다. 때문에 과거 특정한 시대에 형성된 어떤 학설을 금과옥조처럼 떠 받드는 것은 참된 유학의 참된 정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유학하면 퇴계와 율곡 그리고 그들이 일궈놓은 사상이 전부이고 나머지 학자들의 사상은 마치 그들의 아류인 것처럼 들리게 만든 것은 과거 철학하는 이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계나 우암 그리고 대산이나 정재의 학술이 주리, 주기 양가 각각의 정통이 되고 나머지는 윤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정윤(正閏)의 논리 또한 현대적 인식으로는 부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한주학파의 학술을 퇴계학파의 아류로 보는 퇴계학 연구자에게 덜 중요하게 취급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제 한주뿐만 아니라 면문사제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진행됨에 따라 이 같은 인식이 차츰 불식되어가고 있다.
    학문은 진보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과거의 잣대로만 재려고 할 때, 진보는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진정한 학문은 과거의 것을 소화하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주학이 퇴계학을 넘어 나아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어리석은 사람들의 인식이 이를 인정하지 못하였다.
    한주와 그 문하생들의 학술이 여전히 제대로 도니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학술이 독창적이고 그 독특한 처변의 행보 때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본 『면문사제의 처변논리연구』에서는 구한말 학자 중 가장 국제적 변화를 넓게 읽고 처신했던 한주-면우학파 학문의 독창성과 그 처변의 정당성을 드러냄으로써 조선의 유학이 산위의 호수처럼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에서 시작하여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로 흘러가는 역동적인 학문임을 드러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역으로 조선유학에 대한 인식을 퇴·율 중심의 정체된 시각에서 보지 아니하고 끝없이 환경에 적응해 유연을 이어가고자 하는 유기체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조선유학사를 보는 안목 또한 성장하게 될 것을 기대해 본다.
  • 색인어
  • 조선유학, 한주학, 면문사제, 처변논리, 정도와 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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