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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06614&local_id=10011633
페레야슬라프 조약이 러시아-우크라이나에 끼친 영향과 역사적 평가: 정교회의 변혁과 우크라이나인의 민족정체성 형성을 중심으로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79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5월 26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전통적 시각에서 볼 때 페레야슬라프 회의는 우크라이나인(카자크)들이 자발적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수용하고 차리의 통치를 인정했는데 이는 정교 신앙이 바탕이 되고 키예프 루시의 공통적 역사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몽골통치와 폴란드의 지배로 인해 상실되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통합이 페레야슬라프 회의의 결과 재통합된 것이며 이는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폴란드에 대한 카자크들의 저항은 하나의 민족해방의 차원에서 본 해방전쟁이었고 러시아가 카자크들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러시아는 카자크들을 지원하는 대가로 폴란드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위험을 감수해야 하였다. 왜냐하면 카자크들의 활동 지역이 정치적으로 폴란드의 영향력이 미치던 곳이었고, 또한 카자크들은 오래 전부터 오스만 투르크의 종속국가이던 크림 한국과 친선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러시아로서도 17세기 초반에 있었던 국가적 혼란기를 극복하고 수습하던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와의 충돌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차리 알렉세이는 그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카자크들의 자발적인 지원요청은 향후 지배의 합법성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페레야슬라프 회의로 인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재통합'되고 흐멜리츠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최근 대두되고 있는 진보적 진영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이러한 진영에는 물론 우크라이나 사학자들이 다수 포함되고 있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페레야슬라프 회의의 법적 근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또한 카자크의 독립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현존하는 문건이 부재하다는 이유로 페레야슬라프 회의는 단지 흐멜리츠키의 구두선언에 불과했고 그때의 내용은 수정되어 모스크바 조약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카자크들은 외교적인 주권을 제한받았지만 독자적인 행보를 계속진행했고 페레야슬라프 회의 직후에도 폴란드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즈보로프 조약, 모스크바 조약, 가쟈치 조약, 페레야슬라프 조약 등 연속적으로 전개되었던 일련의 일들은 카자크들의 독립성과 독자성을 반증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흐멜리츠키의 역할은 민족해방 투쟁의 차원에서 크게 평가되고 있다. 페레야슬라프 회의 또한 러시아의 지원으로 카자크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일시적인 전술에 불과한 것이지 완전히 러시아에 예속되려는 의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페레야슬라프 회의 이후 전개되었던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에서 찾아질 수 있다. 카자크들은 여전히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서 갈등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양상은 카자크들이 이들 국가들에 완전히 의존하고 종속당하기보다는 자체적인 독립을 위해 일시적인 협력을 구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페레야슬라프 회의 그리고 이를 주도한 흐멜리츠키 때문에 과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종속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그리고 당시 이후 러시아의 지원없이 현재의 우크라이나가 존립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확답도 내릴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페레야슬라프 회의로 인해 카자크들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부각되었고, 보그단 흐멜리츠키의 민족해방적 노력 또한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여 오늘날 두 나라의 독립성으로 인해 새로운 역사서술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일이다. 러시아로서는 18-19세기에 주로 구축되었던 역사서술이 오늘날에도 수정없이 적용될 수 있는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과연 재통합이라는 용어로 기술되어도 무방한 지에 대한 검토가 있을 수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존립과 역사에 대한 러시아의 공헌에 대한 가치판단도 아울러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로서는 보다 자유로운 러시아 의존성과 카자크의 독자성 그리고 국가형성의 개념까지도 필요하게 되었으며, 페레야슬라프 회의의 주역인 흐멜리츠키에 대한 긍정적이고도 부정적인 즉 이중적 평가 또한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폴란드에 저항하여 민족해방적 전쟁을 감행했던 흐멜리츠키의 노력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역사에서 볼 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흐멜리츠키가 성공시킨 페레야슬라프 회의결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본격적으로 팽창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우크라이나를 지배할 수 있었던 비극이 초래되었다는 점에서 흐멜리츠키와 페레야슬라프 회의는 새로운 해석에 관한 도전과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 영문
  • The Influence and Historical Evaluation of the Pereyaslavskaya Rada on Russia and Ukraine

    The Pereyaslavskaya Rada in 1654 was the historical arena for the kazaki led by Hetman Bogdan Khemel’nitskii to obtain the Russian support and cooperation in the course of getting independence from the Poland’s rule. In result Russia succeeded in expanding her territory to the southern part, the current Ukraine with the rationale of the rule.
    I want to classify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event as two contradictory but relevant point of views: one traditional and the other liberal. From the former the Pereyaslavskaya Rada was considered as the kazak’s voluntary council and treaty to get the Russian rule in Ukraine. So Russia had a good reason to be there on the basis of the orthodox religion and the common history of Kievskaya Rus. Russia and Ukraine regained the unification by the Rada since the Mongol and Poland’s rule existed. The kazak’s struggle against Poland has the legitimacy in view of national liberation, so it is natural for Russia to support kazaki.
    From the other point of view, the concept of ‘reunification’ is severely challenged by the emerging Ukrainian historians. They all have questioned the rationale of the Rada in the meaning of international law. And They emphasized the independent tendency of the kazaki. They regard the Pereyaslavskaya Rada as the simple and oral declaration by Bogdan Khemel’nitskii. So it was not important. The Pereyaslavskaya Rada was the temporary tactics by the kazaki. The kazaki always pursuited for independence under the situation of the struggle between Russia and Poland.
    In conclusion, Khemel’nitsky’s efforts to struggle against Poland can be evaluated as positive from the point of Ukrainian history. But his efforts and the Pereyaslavskaya Rada have simultaneously the negative evaluation because it gave the legitimacy of invasion of Russia over the Ukrainian territory and its long tragic rul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654년의 페레야슬라프 회의는 보그단 흐멜리츠키가 주도하는 카자크들이 폴란드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 독립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의 원조와 협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역사적인 場 이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이를 계기로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본격적으로 팽창할 수 있었고 적어도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을 실제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결과 페레야슬라프 회의와 이를 주도한 흐멜리츠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관한 논의가 쉽지 않게 되었다. 물론 제정러시아 시기와 소련 시기에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였으나 현재 독립된 상태의 우크라이나의 경우 과거 역사를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러시아의 경우도 이 문제에 대한 재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페레야슬라프 회의의 진실성에 관한 것과 이를 성공시켰던 흐멜리츠키의 역사적 평가에 관한 것이다.
    전통적 시각에서 볼 때 페레야슬라프 회의는 우크라이나인(카자크)들이 자발적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수용하고 차리의 통치를 인정했는데 이는 정교 신앙이 바탕이 되고 키예프 루시의 공통적 역사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몽골통치와 폴란드의 지배로 인해 상실되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통합이 페레야슬라프 회의의 결과 재통합된 것이며 이는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폴란드에 대한 카자크들의 저항은 하나의 민족해방의 차원에서 본 해방전쟁이었고 러시아가 카자크들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러시아는 카자크들을 지원하는 대가로 폴란드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위험을 감수해야 하였다. 왜냐하면 카자크들의 활동 지역이 정치적으로 폴란드의 영향력이 미치던 곳이었고, 또한 카자크들은 오래 전부터 오스만 투르크의 종속국가이던 크림 한국과 친선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러시아로서도 17세기 초반에 있었던 국가적 혼란기를 극복하고 수습하던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와의 충돌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차리 알렉세이는 그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카자크들의 자발적인 지원요청은 향후 지배의 합법성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페레야슬라프 회의로 인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재통합'되고 흐멜리츠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최근 대두되고 있는 진보적 진영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이러한 진영에는 물론 우크라이나 사학자들이 다수 포함되고 있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페레야슬라프 회의의 법적 근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또한 카자크의 독립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현존하는 문건이 부재하다는 이유로 페레야슬라프 회의는 단지 흐멜리츠키의 구두선언에 불과했고 그때의 내용은 수정되어 모스크바 조약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카자크들은 외교적인 주권을 제한받았지만 독자적인 행보를 계속진행했고 페레야슬라프 회의 직후에도 폴란드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즈보로프 조약, 모스크바 조약, 가쟈치 조약, 페레야슬라프 조약 등 연속적으로 전개되었던 일련의 일들은 카자크들의 독립성과 독자성을 반증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흐멜리츠키의 역할은 민족해방 투쟁의 차원에서 크게 평가되고 있다. 페레야슬라프 회의 또한 러시아의 지원으로 카자크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일시적인 전술에 불과한 것이지 완전히 러시아에 예속되려는 의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페레야슬라프 회의 이후 전개되었던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에서 찾아질 수 있다. 카자크들은 여전히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서 갈등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양상은 카자크들이 이들 국가들에 완전히 의존하고 종속당하기보다는 자체적인 독립을 위해 일시적인 협력을 구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페레야슬라프 회의 그리고 이를 주도한 흐멜리츠키 때문에 과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종속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그리고 당시 이후 러시아의 지원없이 현재의 우크라이나가 존립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확답도 내릴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페레야슬라프 회의로 인해 카자크들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부각되었고, 보그단 흐멜리츠키의 민족해방적 노력 또한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현재 국가적 중요도에 비해 국내연구가 미진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제공해준다.
    2) 러시아에 편중된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식을 우크라이나적 시각과 함께 보다 객관적인 인식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역사적 논문이다.
    3) 우크라이나 지역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4) 우크라이나에 진출하고자 하는 외교관 및 기업가 또는 유학생들에게 우크라이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다.
    5)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교연구적 접근에 필요한 내용을 전해줄 수 있다.
  • 색인어
  • 페레야슬라프 회의(Pereyaslavskaya Rada), 보그단 흐멜리츠키(Bogdan Khmel'nitskii) 카자크(kazak), 우크라이나(Ukra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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