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서원 태동의 배경, 서원 제도, 서원 경영, 서원의 기능, 서원의 입지 및 배치의 관점에서 한국과 중국의 서원을 비교한 것이다.
서원 태동의 배경 관점에서 비교하여 보면, 중국과 조선의 서원은 공통적으로 과거를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 성리학을 제대로 연구 ...
본 연구는 서원 태동의 배경, 서원 제도, 서원 경영, 서원의 기능, 서원의 입지 및 배치의 관점에서 한국과 중국의 서원을 비교한 것이다.
서원 태동의 배경 관점에서 비교하여 보면, 중국과 조선의 서원은 공통적으로 과거를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 성리학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한 장소로 삼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서원은 아직 성리학이 중앙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시기에 흥성하기 시작하지만, 조선시대의 서원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사림 세력에 의해 성리학이 꽃을 피우면서 건립되기 시작하는 점이 중국과 대조를 보인다.
서원 제도의 관점에서 비교하여 보면, 조선시대의 서원은 주희의 서원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주희의 "백록동서원게시"를 "백록동학규"로 삼아 서원 교육의 목표로 삼았지만, 퇴계의 노력으로 주희가 제기한 중국의 서원제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 특유의 서원으로 정립하였다.
서원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은 주희가 은거(隱居)하고 강학(講學)했던 무이산(武夷山)을 가장 이상적인 자연으로 생각하고, 주희의 '무이구곡도'의 무이구곡과 같이 빼어난 산수를 갖춘 곳을 찾아 그 곳에 ‘구곡(九曲)’을 경영하였으나, 이러한 구곡 경영은 주희가 경영한 현장을 실제로 보지 않고 단지 문헌과 그림을 통한 것이었기 때문에 구곡이 지닌 자연 경관의 특성, 서원건축의 입지 조건 등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해를 하지 못한 한계를 안고 있다.
서원의 기능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 시대의 서원은 기본적으로 중국 서원의 기능을 그대로 수용하지만,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 강학 기능 면에서 조선의 서원과 중국의 서원은 공통점을 갖지만, 조선의 서원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포함한 성현도 모신 중국의 서원과 달리 선현만 모셨다.
서원의 입지 및 배치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서원은 비록 배향(配享)하고자 하는 선현의 연고지에 설립되었지만, 산수가 뛰어난 곳에 세워졌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세운 서원의 좌향과 건축형식은 중국과 조선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