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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天災地變과 王權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고려후기 天災地變과 王權 | 2004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한정수(연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1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6월 2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2세기로 접어들면서 예종과 인종 이후 잦은 천문상의 변동과 기상이변이 잇따랐다. 이러한 고려후기 실제 천변과 재이의 발생 양상과 그에 대한 대책, 그리고 이에 대한 군주의 역할과 그 의미 등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 지배질서와 그 해석, 주자학 수용에 따른 정치사상의 변화가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검토하는데 있어 중요한 문제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를 위해 12세기 전반기 이후 고려사회의 천변재이의 양상과 그에 따른 고려왕실 및 정치권의 소재노력, 그리고 천인감응적 천명관과 왕권의 역할이라는 관점을 통하여 고려후기 천재지변과 왕권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천변재이의 양상과 그에 따른 소재노력을 통해 볼 때 고려후기 사회는 인종에서 고종대, 원종에서 충목왕대, 공민왕에서 공양왕대까지로 크게 구분되는 면을 보였다. 각각의 정치적 상황과 국제질서 속에서 고려왕실의 대응 방식 및 재이관과 소재방식의 차이가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중세사회 단계에서 고려의 천인감응적 천명관이 갖는 의미는 성리학적 성학군주가 갖는 천명관과는 차이는 있으나 고려후기 사회에서 이 양자는 공존하면서도 후자가 강조되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고려왕실이 나름대로 이해하고 적용하고자 한 천인감응적 천명관은 고려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하나의 통치이념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고려사회의 특징적 면이라 여겨진다.
  • 영문
  • Coming into the 12th century, since the reigns of Kings Yaejong and Injong, unusual changes in the weather, atmospheric disturbances and astronomical phenomena had been continuing to frequently occur. Examining how these atmospheric and astronomical events and disasters had taken place, how the government tried to handle those situations, what exactly was the King's role in dealing with the challenges and what those roles meant, are all important questions. They should be answered if we are to acquire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national ruling order, including the King's own ruling authority, and the changes that occurred inside the political ideology around the time of adoption of the Neo-Confucian philosophy.
    In this article, the natural atmospheric events that happened during the 12th century, the government's and the royal family's efforts to dissolve the disastrous effects of the atmospheric and astronomical phenomena and to also pray for no more incidents, are examined. Through such examination, acquiring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relationship between natural atmospheric disasters and the ruling authority of the King will be attempted. Also, the 'Heaven's order' theory which suggested the correlation between heaven and men, and the role of the King's authority and power, will be evaluated as well.
    Considering the atmospheric and astronomical disasters and phenomena, and the Goryeo people's response to such events, the government's position have apparently shifted more than once. Actually, three phases seem to have existed. Phase one was from King Injong's reign through King Gojong's reign. Phase two was from King Weonjong's reign through King Chungmok-wang's reign. Phase three was from King Gongmin-wang's reign through King Gongyang-wang's reign. Each phase featured its own political environment for the government, and its own international situation for the dynasty. And of course, each of them featured its own version of the Goryeo royal family's attitude toward the atmospheric and astronomical phenomena, its response to the disastrous events, and the fashions of praying for no more damages. At this medieval stage, the Goryeo society's 'Heaven's order' theory based upon the suggested correlation between heaven and men, appeared to have been very different from the Neo-Confucian view of the Holy King concept. In the Goryeo society, during the latter-half period of the dynasty, both perspectives co-existed with each other, yet the latter was becoming more prominent and influential. The 'Heaven's order' theory based upon the suggested correlation between heaven and men, which was favored, understood and utilized by the Goryeo dynasty's royal family, had played its role admirably as a ruling ideology which had contributed to the stability of the Goryeo society. And that was the characteristic of the Goryeo dynasty in this matter.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에서는 12세기 전반기 이후 고려사회의 천변재이의 양상과 그에 따른 고려왕실 및 정치권의 소재노력, 그리고 천인감응적 천명관과 왕권의 역할이라는 관점을 통하여 고려후기 천재지변과 왕권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고려시대 천문의 변이양상을 보면 의종, 희종, 강종, 충혜왕, 창왕 등을 제외하면 모두 평균이상의 천문변이가 있었으며 그 중 예종에서 고종대에 이르기까지의 천변은 고려시대 전체 천변의 48%를 점하였다. 원종 이후 충정왕대의 경우는 약 26%를 점하였으며 공민왕대 이후는 약 16.2%를 차지하고 있다. 공민왕 및 우왕대의 경우 천변이 이틀 이상 지속된 경우가 34회나 되는 만큼 그 수치는 더욱 높아질 수 있으며 공민왕, 우왕, 공양왕 3대만이 계산된 것이기에 수치는 작더라도 오히려 천변은 더 극심했던 시기였다. 천변이 심하였던 시기에 오행지 상에 기록된 재이 현상도 비례하여 나타났다. 인종, 명종, 고종, 충렬왕, 공민왕, 우왕, 공양왕대의 기상이변 기록은 더욱 뚜렷하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화산폭발로 인해 기상환경 변화가 주목되었다. 결국 이는 12세기 전반 이후 고려사회가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는 매우 불안정한 기후환경 속에 놓여졌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왕권과 정치권도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안정과 불안이 교차될 수밖에 없었다.
    인종대 이후 소재노력은 이를 말해주는데, 고종대까지는 유교적 인정과 덕치, 군주의 천인감응적 책기수덕 등과 함께 불교, 도교, 민간․무속적 소재 기양이 이루어졌다. 정치적 상황은 귀족사회내의 혼란과 무인집권 등으로 어려웠으나 고려왕실은 신성 및 성인군주관에 입각한 소재노력을 통해 나름대로 통치력을 가졌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원종대 이후 충목왕대까지의 경우 군주의 책기수덕적 소재노력보다는 제사와 도량, 취무도우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공민왕대 이후에 이르러 소재노력은 인종대 이후 고종대까지의 방식과 비슷한 양상을 가졌다.
    이러한 천변재이와 그에 따른 소재노력의 양상은 고려왕실의 신성성과 통치의 당위성과 연결되었다. 천도에 순응하는 천명을 수수한 고려왕실은 그에 따라 왕도정치를 펴는 한편 신성성을 위해 불교 및 도교, 민간신앙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이것이 고려의 천인감응적 천명관이었다. 그렇지만 유교정치사상 및 성리학의 수용 이후 왕실의 신성성 면만이 강조되는 상황은 더욱 비판받기 시작하였다. 극심한 천변재이의 발생과 왕실의 소재노력이 미흡하다 본 유자들은 결국 혁명적 천명관을 지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천변재이와 소재노력을 통해 볼 때 고려후기 사회는 인종에서 고종대, 원종에서 충목왕대, 공민왕에서 공양왕대까지로 크게 구분되는 면을 보였다. 중세사회 단계에서 고려의 천인감응적 천명관이 갖는 의미는 성리학적 성학군주가 갖는 천명관과는 차이는 있으나 고려후기 사회에서 이 양자는 공존하면서도 후자가 강조되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고려왕실이 나름대로 이해하고 적용하고자 한 천인감응적 천명관은 고려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하나의 통치이념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고 생각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고려후기 천변지변과 왕권에 대한 연구는 고려시대의 이상적 정치사상인 천인감응적 왕도정치에 기반한 국가지배질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2세기로 접어들면서 예종과 인종 이후 잦은 천문상의 변동과 기상이변이 잇따랐다. 이러한 고려후기 실제 천변과 재이의 발생 양상과 그에 대한 대책, 그리고 이에 대한 군주의 역할과 그 의미 등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 지배질서와 그 해석, 주자학 수용에 따른 정치사상의 변화가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검토하는데 있어 중요한 문제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첫째, 12세기 전반기 이후 고려사회의 천변재이의 양상, 둘째 그에 따른 고려왕실 및 정치권의 소재노력, 셋째 천인감응적 천명관과 왕권의 역할이라는 시각을 설정하고 고려후기 천재지변과 왕권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결국 고려후기 천변재이와 소재노력을 통해 볼 때 고려후기 사회는 인종에서 고종대, 원종에서 충목왕대, 공민왕에서 공양왕대까지로 크게 구분되는 면을 보였다. 중세사회 단계에서 고려의 천인감응적 천명관이 갖는 의미는 성리학적 성학군주가 갖는 천명관과는 차이는 있으나 고려후기 사회에서 이 양자는 공존하면서도 후자가 강조되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고려왕실이 나름대로 이해하고 적용하고자 한 천인감응적 천명관은 고려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하나의 통치이념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통해 그 활용방안을 강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재이와 소재 방향을 데이터 처리함으로써 이 내용이 불교나 도교, 혹은 무속 및 전래적 신앙의 면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는 이러한 데이터를 분석함으로써 연구 과정과도 연결되는 면이지만 기후변동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기후변동에 대한 이해는 농사와 직접적 관련되기 때문에 농업생산방식과 그 생산력과도 연결되며, 또한 농사점 및 농사력의 출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재이와 소재노력 특히 祈雨를 중심으로 하는 祈禳儀禮와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이를 통해서는 祭儀의 본질적인 면에 대한 이해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는 고려시대 천명관에 대한 이해를 위해 앞으로 고려시대의 천관 즉 하늘관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고려전기 천변재이와 유교정치사상에 대한 연구 및 본 연구를 통해 이러한 시각에 일정정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는 고려말 조선초 성리학적 천관 및 성학군주론이라는 정치사상사적 분야의 정립을 위해 하나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시각이 제공되었다고 여겨진다.
  • 색인어
  • 천변재이(天變災異), 소재(消災),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 천명(天命), 신성군주관(神聖君主觀), 성인군주관(聖人君主觀), 고려의 천인감응적 천명관(天命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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