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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唐代) 황실 여성의 생활과 지위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당대& #40;唐代& #41; 황실 여성의 생활과 지위 | 2004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김호(University of Washington)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7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7월 26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唐初의 后宮制는 정1품의 4夫人, 정2품의 9嬪, 정3품의 9婕妤, 정4품의 9美人, 정5품의 9才人, 정6품의 27寶林, 정7품의 27御女, 정8품의 27采女로서 정원 총수는 121명이었다. 이는 전통 중국의 이상적인 왕조였던 周代의 官制를 염두에 두면서도 이전 왕조의 제도를 수렴하여 하나의 계통을 세웠다고 할 수 있겠다. 이른바 조정 관료제도를 모방한 여성들만의 위계질서를 세웠던 것이다. 황후를 제외한 妃嬪 이하를 내관이라 하며, 이들의 의례와 일상생활을 시봉하는 궁관이 있었다. 내관과 궁관을 아울러서 內職 또는 모두 여성이 담당하기 때문에 女官이라고도 한다. 당대 궁관은 尙宮局,尙儀局,尙服局,尙食局,尙寢局,尙功局의 6尙에 소속되어 내관의 일상과 의례를 돕는 일을 관장했으며, 명목상 황제를 시봉하기 위해 구중궁궐에 들어온 많은 궁인들이 여기에 배치되어 있었다. 황실의 여성들은 황후를 중심으로 다양한 의례활동에 참여하며 하루하루를 엮어 나아갔다. 황실여성의 의례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황후 朝會儀禮와 親蠶儀禮이다. 황제가 신하들과 조회의례를 통해 君臣間의 질서를 시각적으로 확립하며 한해를 열고 마무리짓듯이, 황후는 내외명부와의 조회의례를 갖음으로써 마찬가지로 그 상하질서를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친참의례는 魏晉 이래로 황제의 籍田禮와 서로 比附되었고, 唐代에 들어와 그 예의 절차를 황제의례에 거의 그대로 따름으로써 의례의 내용을 체계화하였으며, 宋元 왕조는 기본상 唐制를 답습하였다.조회와 친잠과 같은 중요 의례에 참여하는 황후나 비빈들은 결국 황제의 寢殿 侍奉者로서 황제의 총애에 의지하게 되지만, 황제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일반 비빈들은 지극히 한가로운 일상을 보내게 되며, 더군다나 황제의 여성이란 명목으로 궁에 들어온 많은 궁인은 가족과의 이별로 고독하게 보내기도 한다.황후와 비빈들의 정치적 지위를 보면 당후반기로 갈수록 점차 약화되어 갔다. 그것은 다음의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唐 皇室의 胡的 성격과 관련이 있다.즉 당후기로 접어들수록 호적 성향이 약화되어 갔던 것이 황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8세기 중엽 이후 정치 무대에 등장하는 황후는 없었다.둘째는 당 후반기 유학사상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면서 황실여성들도 유학적 소양이나 덕목을 지녀야함이 강조되었던 것이다.끝으로 황실여성은 황제와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이른바 황권이 안정되어 있었다는 당 전반기에 오히려 황후들의 정치적 참여가 현저했다. 황후 조회의례에는 내외명부 뿐만 아니라 일반 신하들까지도 황후를 朝見하도록 했었던 것은 조정 내에서 황후의 위상이 당연 부각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肅宗 乾元時期 황후가 신하들에 받았던 朝見 절차를 폐지함으로써 이제 8세기 후반부터 황후는 황제의 부인으로서만 존재할 뿐 더 이상 政事에 간여하거나 정치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 영문
  • The Tang Dynasty continued and improved upon the ideals set forth by the previous Zhou System. The Tang Liu Dian describes the Imperial Harem System, the result of Tang's improvement and formalization of the Zhou, and shows us 121 consorts placed into nine ranks in a manner similar to the system used to rank regular government officials. Tang consorts lived lives filled by the rites and ceremonies presided over by the Empress. Many of these ceremonies were similar to those of performed by the Emperor, but served slightly different, though related ends; a division of responsibility between sovereign man and woman. The Court Conference, and Mulberry Culture ceremonies are worthy of note among these responsibilities. The Emperor's Court Conference Ceremony served to establish order between the sovereign and his subjects, while the Empress's Court Conference served to establish the same relationship between the Empress and Imperial Harem. Although the lives of the Empress and concubines seemed glamorous and their responsibilities important, the only assured life of ease and luxury was that granted by the Emperor on those he favored. Women in the seraglio who did not attract an emperor's attention lived tedious, solitary lives devoid of contact with their friends and family outside the palace, and very often without any contact with even the emperor, a nominal consort. These women often found solace only through poetry. Without hope of such pity, the women could only dream of becoming an emperor's real consort, or even the empress. Such positions close to the emperor offered not only to alleviate their loneliness, but perhaps also the possibility to take an active role in the emperor's court.The possibility of political power within the imperial harem steadily declined from during the Tang, and by the late period, the harem had become politically powerless.There were three reasons they were unable to maintain political power. The first reason is the Tang Imperial family, government clique, and imperial consort's Turkish heritage. This gave the court many Turkish characteristics, for example, the Turkish tradition of allowing women to enjoy a strong role in decision-making processes. The Empresses and imperial concubines were often able to use this role in usurping power away from the throne, even governing until the middle of the eighth century. The Tang Imperial family, government clique, and imperial consort's Turkish characteristics made it possible, in the early Tang, for the imperial harem to usurp political power, giving them opportunities to prove themselves able politicians and rivals to their male contemporaries. The middle of 8th century, however, marked a significant decline in the Turkish character of The Tang court, and this decline brought a corresponding decline in the power of the imperial harem and empress until rendered powerless and unable to participate in the political process.
    Another reason is the social fabric of China at the time. Beginning after the mid-8th century, Confucianism dominated Chinese society; which began to demand that women conduct themselves with proper Confucian ethics and behavior. The harem's power stemmed directly from, and so was dependent upon the acquiescence of the Emperor. The early Tang period was a time of peace and stability, and the emperor welcomed the empress's political participation. To emphasize her dignity, and political power, previous emperors required not only palace women also all high officials to attend the empress's court conference ceremony. The Emperor Suzong, however, abolished the attendance of his officials at the ceremony, and thereafter the empress, having no inherent power of her own, became nothing more than a wife and mother. Unable to develop political status or ascend the throne, the political power of the imperial harem was broken forever.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중국 역사상 宋 이후 관인층의 세습성이 약화되어 사회계층의 유동성이 증대된 점을 큰 특색으로 들 수 있는 반면, 여성의 지위는 남성들과는 상대적으로 관념과 제도의 속박에 더욱 얽매이게 된 점은 매우 흥미롭다.때문에 중국의 여성사 연구자들에게 唐代 여성은 큰 매력으로 다가서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소수의 여성들이었지만 황실에 들어가 상당한 자유를 누리며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오늘날 정치무대에서 활약하는 여성들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본 연구는 당대 황후,비빈,궁인의 제도와 생활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규명한 것이다. 漢 이래로 각각의 왕조에서 후궁제도를 나름대로 갖추었다고는 할 수 있어도, 체계적으로 정비된 것은 隋唐代에 들어와서였다.이른바 내관과 궁관에게 각각의 품계를 책정함으로써 조정 관료제도를 모방한 여성들만의 관료 위계질서를 세웠던 것이다.여기에 소속된 황실의 여성들은 황후를 중심으로 다양한 의례활동에 참여하며 하루하루를 엮어 나아갔다. 황실여성의 의례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황후 朝會儀禮와 親蠶儀禮이다. 황제가 신하들과 조회의례를 통해 君臣間의 질서를 시각적으로 확립하며 한해를 열고 마무리짓듯이, 황후는 내외명부와의 조회의례를 갖음으로써 마찬가지로 그 상하질서를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친참의례는 魏晉 이래로 황제의 籍田禮와 서로 比附되었고, 唐代에 들어와 그 예의 절차를 황제의례에 거의 그대로 따름으로써 의례의 내용을 체계화하였으며, 宋元 왕조는 기본상 唐制를 답습하였다. 정치적이었던 황후들이 당 전기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 주목되었고, 그들의 정치적 지위는 후반기로 갈수록 점차 약화되어 갔는데, 첫째는 唐 皇室의 胡的 성격과 관련이 있다.즉 당 후반기로 접어들수록 약화된 호적 성향은 황실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8세기 중엽 이후 정치 무대에 등장하는 황실여성은 없었다.둘째는 유학이 부흥되는 당후반기의 사회 분위기가 황실여성에까지도 영향을 끼쳐 이들의 정치 참여도가 낮아지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들 수 있겠다. 이것은 송대에 들어가 더욱 뚜렷해지는 경향으로 비록 태후의 섭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제도적으로 구속해 놓음으로써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것이 되어 당 전기의 실질적인 정치참여와는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황권이 안정되어 있었다는 당 전반기에 오히려 황후들의 정치적 참여가 현저했음은 황실여성들이 황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중국 여성에 대한 연구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주제로 꾸준히 진행되고 있지만, 황실 여성 자체만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에 본 연구자는 唐代 황실 여성의 생활과 이를 통해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규명해 봄으로써 중국 여성사 연구에 일조하였다고 생각된다. 당대 황후를 비롯하여 妃嬪制度와 또 이들을 시봉하는 별도의 기구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唐代 후궁제도의 일부를 해명하고, 唐 後期까지 황실여성의 생활과 지위를 살펴봄으로써, 그 조직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또 唐代 후궁 조직의 연원을 파헤쳐 이전 시기와는 어떤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지를 알아보았다. 또한 이를 통해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조명해 보았다. 이러한 작업은 향후 宋代,元代,明淸代 황실 여성에 대한 관심도 증진시키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본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이후 시기의 후궁 조직에 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 색인어
  • 황실여성, 후궁(제), 황후, 비빈, 궁인, 궁정, 지위, 황후조회의례, 황후친잠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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