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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06683&local_id=10011590
후한말(後漢末) '구군(舊君)' 개념의 재등장과 위진시기(魏晉時期) 상복례(喪服禮)-예학(禮學)의 효용성을 중심으로-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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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A00019
Year(selected) 2004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06년 04월 10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06년
Research Summary
  • Korean
  • 後漢時期의 변화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三年喪의 정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前漢과는 달리 後漢 사회가 儒家 經典에 근거한 禮를 실행하고자 하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의 불허용 방침에도 불구하고 服喪을 위해 去官하는 자는 점차 많아졌고, 이것은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服喪은 점차 친족범위를 넘어서까지 확대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스승과 舊君, 擧將에 대한 服喪이다. 스승의 경우는 經典에 의하면 心喪이었음에도 불구하고 去官者가 생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것은 後漢時期 들어 舊君과 擧將에 대한 服喪이 행해졌다는 점이다. 이들에 대한 服喪은 後漢末로 갈수록 더욱 성행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정부의 명령보다도 우선했다. 이것은 이미 後漢 사회가 황제와 인민간의 일차적 관계로만 규정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後漢末 정부의 명령보다 스승이나 舊君, 擧將의 服喪을 행하는 것은 명성을 획득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 사회가 다양한 君臣關係를 인정하였고, 황제로부터 말단 지방의 屬吏 사이에 존재하는 누층적인 지배질서가 사대부 안에서 공공연하게 인정되었다.
    새로운 국가는 이러한 사대부들의 분권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魏와 晉이 제정한 喪葬令은 그러한 분권의 요구가 喪服禮 안에서 수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자율적인 규율이 국가에 수용되면서,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행해왔던 규범으로부터 규제받게 되었다. 그 결과 지난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禮書, 그 중에서도 喪服書가 편찬되었다. 다량의 喪服書가 편찬된 것과 관련하여, 지금까지의 연구는 그 원인을 종족의 결합을 중요히 여길 수밖에 없는 귀족제의 발전에서 찾거나 현실의 필요로부터 제기된 매뉴얼의 필요로부터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정치적 상황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해석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禮學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효용성을 축소한다. 군주권력 절대화의 지향이 무너지고 시대적으로 봉건, 즉 분권의 정치형태가 지향되던 前漢末부터 다량의 禮書가 등장했다는 것은 禮學이 권력의 근저를 보여주고 권력이 가지고 있는 범주를 확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정치질서에 대해 객관화된 근거가 필요했고, 그것이 禮書에 대한 재해석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禮學이 궁극적으로 정치적 행동과 범주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한 晉代 喪服書 역시 그 역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앞으로 魏晉南北朝 禮學의 성격 속에서 규명되어야 할 문제이다.
  • English
  •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consider the character of political order that Shi-da-fu(士大夫) would like to make through the appearance of concept of Jiu-jun(舊君) and the change of mourning dress etiquette in Later Han period. It can be said that the most remarkable thing of change in Later Han period is the settlement of mourning for three years. This means that contrast to Former Han, the society of Later Han became to reach the level executing the etiquette based on Confucian scriptures.
    Despite of the prohibition of nation, the number of people doing Qu-quan(去官) for wearing mourning became more and it became a problem of society. Wearing mourning had been extended over the relative. The representative case is wearing mourning for mentor, Jiu-jun(舊君) and Ju-jiang(擧將).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lthough the case of mentor belongs to Sin-sang(心喪), people doing Qu-quan(去官) appeared. But most characteristic thing than anything is that wearing mourning for Jiu-jun(舊君) and Ju-jiang(擧將) was done in the time of Later Han. It became more prevalent as time went to the end of Later Han, it had even priority than a government's order.
    This shows that the society of Later Han has already reached the status that can't be regulated by the primary relation between an emperor and citizens. To do wearing mourning of mentor, Jiu-jun(舊君) and Ju-jiang(擧將) became a way to get the reputation. In the society, variable relation of ruler and ruled was permitted. Namely the stratified ruling order existing between emperor and Shu-li(屬吏) of lowest level of district was approved publicly within Shi-da-fu(士大夫). New nation couldn't but admit this Shi-da-fu'(士大夫)s requirement for decentralization of power. Sang-zang-ling(喪葬令: the low for mourning and funeral service) made by Wei(魏) and Jin(晉) is that the requirement for decentralization of power was accepted in mourning dress etiquette.
    But as autonomous rules of Shi-da-fu(士大夫) were accepted to nation, they became to be controlled by the norm themselves had been practicing. As the result of that, many ritual book incomparable to last time, especially book of mourning dress were compiled. For compiling of many book of mourning dress, the research as yet has been found the reason from development of a noble system or need of manual. But this conclusion reduces the political role of ritual study that provides basis for the specific political situation. This point that many ritual book appeared from the end of Former Han when absolute power of emperor had been destroyed and the political form of decentralization of power had been intended shows what the political efficiency of ritual study is well. Shi-da-fu(士大夫) needed the objective basis for the political order that they wanted to make newly. And for this, they redefined the ritual book. It's because ritual study shows the basis of power and decides the category of power. If ritual study performs a role that provides the justice for the political behavior and category finally, book of mourning dress in Jin(晉)period can't be also free from the role. This is a topic to be investigated on the character of ritual study in Wei-Jin-Nan-Bei-Chao(魏晉南北朝) from now.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이 글의 목적은 後漢時期 舊君 개념이 재출현한 것과 관련하여 첫째, 前後漢 喪服禮의 변화를 통해 당시 사대부들이 만들고자 했던 정치질서의 성격을 규명하고, 둘째 그러한 정치질서와 깊은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는 禮學의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데 있다.
    後漢時期의 변화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三年喪의 정착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前漢과는 달리 後漢 사회가 儒家 經典에 근거한 禮를 실행하고자 하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의 불허용 방침에도 불구하고 服喪을 위해 去官하는 자는 점차 많아졌고, 이것은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服喪은 점차 친족범위를 넘어서까지 확대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스승과 舊君, 擧將에 대한 服喪이다. 스승의 경우는 經典에 의하면 心喪이었음에도 불구하고 去官者가 생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것은 後漢時期 들어 舊君과 擧將에 대한 服喪이 행해졌다는 점이다. 이 때 舊君이라 함은 春秋 중기 이후 출현한 것으로 많은 비혈연적인 國君과 家臣이 관계를 맺음으로 만들어진 개념으로, 독점적이고 유일한 권력체가 등장하면 사라지게 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황제지배체제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었다. 그러나 後漢末 복수의 정치권력의 존재를 의미하는 舊君이란 개념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服喪은 갈수록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정부의 명령보다도 舊君에 대한 服喪이 우선했기도 하였다. 이것은 이미 後漢 사회가 황제와 인민간의 일차적 관계로만 규정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後漢末 정부의 명령보다 스승이나 舊君, 擧將의 服喪을 행하는 것은 명성을 획득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 사회가 다양한 君臣關係를 인정하였고, 황제로부터 말단 지방의 屬吏 사이에 존재하는 누층적인 지배질서가 사대부 안에서 공공연하게 인정되었다.
    다른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왕성하게 주장되던 封建論은 당시 사대부들이 설정하는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새로운 국가는 이러한 사대부들의 분권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魏와 晉이 제정한 喪葬令은 그러한 분권의 요구가 喪服禮 안에서 수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자율적인 규율이 국가에 수용되면서,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행해왔던 규범으로부터 규제받게 되었다. 국가에 의해 禮制가 제정되고, 그 禮制에 의해 사대부들이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행하던 家禮가 간섭 당한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자신들만의 禮制가 국가의 공적 질서로 변화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을 억압하는 기재로 변화한 것에 대해 사대부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야 하는 필요가 발생하였다. 결과 지난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禮書, 그 중에서도 喪服書가 편찬되었다. 다량의 喪服書가 편찬된 것과 관련하여, 지금까지의 연구는 그 원인을 宗族의 결합을 중요히 여길 수밖에 없는 귀족제의 발전에서 찾거나 현실의 필요로부터 제기된 매뉴얼의 필요로부터 찾았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정치적 상황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해석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禮學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효용성을 축소한다. 군주권력 절대화의 지향이 무너지고 시대적으로 봉건, 즉 분권의 정치형태가 지향되던 前漢末부터 다량의 禮書가 등장했다는 것은 禮學이 권력의 근저를 보여주고 권력이 가지고 있는 범주를 확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정치질서에 대해 객관화된 근거가 필요했고, 그것이 禮書에 대한 재해석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禮學이 궁극적으로 정치적 행동과 범주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한 晉代 喪服書 역시 그 역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앞으로 魏晉南北朝 禮學의 성격 속에서 규명되어야 할 문제이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후한말 사대부들의 자율적인 세계의 성립과정을 당시 행해지던 상복례를 통해 분석한 「후한말(後漢末) ‘구군(舊君)’ 개념의 재등장과 위진시기(魏晉時期) 상복례(喪服禮)-예학(禮學)의 효용성을 중심으로-」라는 글은 고대 정치 주체의 하나인 사대부들의 속성을 파악하고 당시 중국 고대 사회의 정치·사회·사상적인 측면을 파악하는데 다각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전후한 사대부의 자각과 정치주체로서의 성격 정립과정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②중국 고대 사대부들이 구현하려고 했던 자율적 질서와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③위진시기의 시대정신과 위진의 국가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④후한과 남조를 연속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⑤동아시아 고대 예학이 성격을 파악하는데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 Index terms
  • 구군, 거장, 삼년상, 예학, 상복례, 예서 舊君, 擧將, 三年喪, 禮學, 喪服禮, 禮書 Jiu-jun, Ju-jiang, mourning for three years, ritual study, mourning dress etiquette, ritual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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