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서는 4세기 중·후반 이후에야 비로소 일반 민에 대하여 징병제가 시행되었고, 그 이전에는 소수의 지배층에 의하여 군대가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첫째, 4세기 이전까지의 대규모 전쟁에서 대략 2만~4만의 군사들이 동원되었는데 ...
고구려에서는 4세기 중·후반 이후에야 비로소 일반 민에 대하여 징병제가 시행되었고, 그 이전에는 소수의 지배층에 의하여 군대가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첫째, 4세기 이전까지의 대규모 전쟁에서 대략 2만~4만의 군사들이 동원되었는데, 이러한 군사들을 모두 소수의 지배층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는 점, 둘째, 통설은 중국 청동기시대의 군제와 유사한데 고구려는 漢, 魏, 後燕 등과 호각지세를 이룬 철기문화의 국가로서 고구려 군제를 너무 후진적으로 보고 있는 점, 셋째,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에서도 징병제가 실시되었는데, 바로 그 옆에 있던 고구려에서 징병제가 시행되지 못하였다고 보는 것은 국제 관계상 이해하기 어려우며, 넷째, 현존하는 어떠한 사료에도 특정한 시기에 고구려에서 징병제를 실시하였다는 기사는 없는 점 등 네 가지 이유로 기존 통설은 성립하기 어렵다고 본다. 즉 고구려는 건국 이후 줄곧 징병제를 시행하였다고 본다.
고구려에서 최고 통수권자는 왕이었다. 고구려의 군대는 왕명에 의해서만 동원될 수 있었고, 왕의 승인 없이 군대가 움직이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고구려 말기에 이르러 왕명 없이 군대가 움직이는 일이 빈번히 나타났다. 이것은 왕권이 미약해짐에 따라 나타난 특수한 상황으로서 정상적인 고구려 국정 운영의 모습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統帥權, 즉 兵權은 일반적으로 發命, 發兵, 掌兵으로 三分된다. 발명은 군사의 동원을 명령하는 것이고, 발병은 군사를 동원하여 장수에게 배속시키는 것이며, 장병은 군사를 직접 지휘·통솔하는 것이다. 고구려왕은 최고 통수권자로서 발명, 발병, 장병으로 삼분되는 국가의 병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국가의 성장·발전에 따라 차츰 고구려왕은 발명권을 제외하고 발병권과 장병권은 타인에게 위임하였다. 발병권은 왕족·右輔→國相→‘제5관등 이상 관리들의 협의체’ 순서로 위임되었고, 장병권 역시 왕족·귀족→장군 순서로 위임되었다. 이와 같은 군령제도의 정비 속에서 고구려는 4, 5세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한편 고구려의 군사제도는 新大王 이전까지는 內兵(중앙군)과 外兵(지방군)의 구분이 없다가, 신대왕 이후 내병과 외병으로 분리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내병과 외병 중 내병이 훨씬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내병은 畿內에 주둔하면서 국왕의 호위와 수도의 경비·방위 등을 담당하였고, 외병은 각 지방에 주둔하였는데, 외병의 개별 군사력은 내병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내병은 두 가지 종류의 군인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생산 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전투를 직업으로 하는 무사층과 생산 노동에 종사하면서 징병제에 의해 징발되는 농민군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무사층을 당시에는 ‘國人’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국인, 즉 무사들은 직역의 대가로 국가로부터 관직이나 토지 등을 받았다. 이들은 수도에 거주하면서 관직에 올라 大家를 이루었다. 한편 지방의 농민들은 丁男이 되면 지방군에 편입되어 복무를 하고, 또 차례에 따라 수도에 가서 중앙군에 편입되어 번상 근무를 하거나, 혹은 변경 지역에 파견되어 수자리를 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지방군 체제는 ‘대성-제성-성’의 3단계로 조직되었고, 각 단계의 지방관들은 상하 통속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방군 체제는 조선전기의 鎭管體制와 유사하였다.
고구려의 군제는 후대로 승계되었다. 징병제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무사 중심으로 군제가 운영되는 점, 父職을 계승하는 형태와 選軍制 형식으로 무사를 충원하는 점, 고위 관리의 合坐制 형식으로 발병권을 관장한 점, 3단계의 지방군 군사체제 등 많은 고구려의 군사 전통이 고려와 조선전기로 승계되었다. 이것은 고구려와 고려, 조선전기의 사회경제적, 민족적, 지리적, 문화적 조건이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