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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종족기원과 국가형성과정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고구려의 종족기원과 국가형성과정 | 2004 년 | 김현숙(고구려연구재단)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06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5월 2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고구려는 부여에서 기원전 1세기경부터 1세기까지 내려온 예족집단과, 이들보다 일찍 비류수일대로 내려와 주변의 맥과 역사적 경험을 같이하게 되면서 동화의 길을 걷고 있던 졸본부여를 위시한 예맥족, 그리고 압록강 중류유역의 토착세력인 맥족이 결합하여 만든 나라가 고구려였다. 이 가운데 주축은 맥족이었다. 고구려 건국 주체세력들은 처음에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었지만, 한과의 투쟁과정에서 함께 힘을 합쳐 저항하고, 결집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가체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상호간에 동화되고 융합되었다. 따라서 이들을 모두 합쳐 고구려족이라고 칭할 수 있다. 고구려족은 옥저성에 있던 玄菟郡을 공격하여 新賓으로 축출했다. 이것이 제2현토군이다. 고구려 현령은 현토군에 와서 朝服衣幘을 받아가는 고구려인들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관리했다. 고구려현이 ‘高句麗族’을 직접 통치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고구려의 대외관계가 창구단일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 ‘高句麗族’의 결속력 강화로 중국측의 分離統制策은 효력을 상실했다. 주몽의 고구려가 건국되면서 ‘高句麗族’ 내부의 결속이 이전보다 더 강화되었다. 맹주국의 위상이 더 높아졌고 소국들의 자율권은 약화되었다. 大武神王은 독립성이 강하던 세력들을 那部로 편제했다. 那部體制는 太祖王代에 이르러 완성되었는데, 연맹왕국 단계보다 왕의 권한이 더 강화되었지만, 諸家들이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보유했다는 점에서 중앙집권적 체제와 성격이 달랐다. 내부 발전에 힘입어 국제적 위상도 높아졌다. 大武神王代 後漢과의 통교와 왕 칭호의 인정은 그 증거이다. 외교·무역·전쟁 등에서 창구단일화도 이루어졌다. 고구려에서는 중국과 교류할 일이 있을 때에만 玄菟郡 동쪽 경계에 있는 幘溝漊에 와서 朝服衣幘을 가져가 사용했다. 太祖王代부터 고구려는 5나부를 벗어난 지역으로 진출했다. 동옥저와 예를 隸屬民으로 삼았고, 淸川江 以北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이를 기반으로 태조왕은 중국 군현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玄菟郡을 다시 渾河 방면으로 축출했다. 이것이 第3玄菟郡(무순 노동공원)이다. 이후 高句麗는 한군현을 계속 공격했고, 마침내 美川王代에 낙랑·대방군을 완전히 축출했다. 이 과정에서 내부의 정치체제를 국왕 중심으로 정비했고, 결국 3세기말경에는 나부체제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가 완성되었다.
    끝으로 초기 고구려의 도성과 국내로의 천도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주몽은 졸본부여의 왕성이었던 졸본성을 그대로 왕성으로 사용하다가 동명왕 4년에 성곽과 궁실을 만들었다. 졸본부여의 터전은 현재 환인댐 조성으로 인해 수몰된 지구였고, 졸본성은 나합성, 건국 후 3년 뒤에 조성한 성곽과 궁실은 오녀산성으로 비정된다. 환인 일대의 선주 토착세력인 비류국의 중심지는 하고성자성으로 비정된다. 주몽세력의 남하 이전에는 산성을 축조하여 도읍하는 예가 없었던 것 같다. 비류국이 하고성자성, 졸본부여가 나합성을 도읍을 삼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주몽 이전에는 높은 산 위에 왕성을 두는 일도 없었고, 평지성-산성의 셑트 구성도 성립되지 않았다. 높고 험준한 홀본서성산에 궁실을 구축하여 도읍으로 삼은 이후 고구려의 성격은 더욱 전투적으로 바뀌었다. 군현 세력과의 대결도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유리왕이 천도한 국내위나암성은 국내인 집안지역에 포함되면서 환도산성과 국내성이 있는 시내가 아닌 다른 곳, 그리고 높고 험준한 바위산에 있는 패왕조산성에 비정된다. 유리왕은 이 성을 왕성으로 삼고 오늘날의 집안일대를 모두 세력기반으로 삼았다. 지금의 집안시내로 수도를 옮긴 것은 동천왕 13년이었다. 이때부터 환도성이 도성이 되었다. 그러나 산상왕 2년에 丸都城을 쌓았다는 기사가 나오고 이 왕이 즉위과정에서 형과 왕위계승분쟁을 겪은 끝에 다시 新國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2세기말부터 이미 집안 지역을 집중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국원왕 12년에 국내성이 조성되면서 국내성과 환도성의 셑트 구성이 완성되었다. 동천왕 21년 환도성이 난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며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고 하는 평양성은 최근 운봉댐의 수위가 낮아짐으로써 드러난 청석진 양민촌에 있는 평지석성에 비정된다.
  • 영문
  • Koguryo Dynasty(高句麗) was established by Ye tribe(濊族) who was from Puyeo Dynasty(夫余) and Yemaek tribe(濊貊族) who already moved southward to the Bireusu(沸流水) region earlier than Ye tribe as well as Maek tribe(貊族) who was original in the middle of the Amrok River(鴨綠江). Among them, Maek played the most significant role in the founding of Koguryo for which reason they could be called as 'Koguryo tribe(高句麗族)'. Koguryo tribe attacked Hyento-gun(玄菟郡) in Hamheung(咸興) and drove them out to Sinbin(新賓), and then to Pusun(撫順). In this process, Koguryo transformed Nabu(那部) system which acknowledged the independence of each group to the political system ruled by a kingship. In the end of 3th century, the Nabu(那部) system was disorganized and the Centralization was reinforced.
    King Dongmyong(東明王) utilized Jolbonseong(卒本城), the capital of Jolbonbuyo(卒本扶餘) at the tim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state. After four years, he constructed a walled city and royal palace. Jolbonseong is supposed to be Nahabseong(喇哈城), and Heulseunggolseong(屹升骨城) is assumed to be Onyeosanseong Fortress(五女山城). And the capital of Bireu Dynasty(沸流國) is probably Hagoseongjaseong(下古城子城).
    Gungnaewinaamseong(國內尉那巖城) to which King Yuri(琉璃王) moved the capital is presumed to be Paewangjosanseong(覇王朝山城). It was in the 13th year during the reign period of King Dongchen(東川王) that Koguryo moved the capital to Ji'an(集安). Since that time, Hwandoseong(丸都城) became the capital of Koguryo. However, since the end of the 2nd century, Koguryo already concentrated on developing the Ji'an region. After then, in the 12th year of King Gogukwon(故國原王), Gungnaeseong(國內城) was finally constructed. Pyeongyangseong(平壤城) where Koguryo moved the capital in the 21st year of King Dongchen(東川王) is supposed to be stone fortress where is confirmed at Yangminchon(良民村)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고구려는 부여에서 내려온 예족집단과, 이들보다 일찍 비류수일대로 내려와 있던 예맥족, 압록강 중류유역의 토착세력인 맥족이 결합하여 만들었다. 이 가운데 주축은 맥족이었다. 고구려 건국 주체세력들은 처음에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었지만, 한과의 투쟁과정에서 함께 힘을 합쳐 저항하고, 결집해 나라를 세우고 국가체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동화되고, 융합되었다. 이들을 합쳐 고구려족이라고 칭할 수 있다. 고구려족은 옥저성에 있던 玄菟郡을 공격해 新賓(永陵鎭古城, 제2현토군)으로 축출했다. 고구려 현령은 현토군에 와서 朝服衣幘을 받아가는 고구려인들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관리했다. 당시 고구려현은 ‘高句麗族’을 직접 통치하지 못했고, 고구려의 대외관계는 창구단일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高句麗族’의 결속력 강화로 중국측의 分離統制策은 효력을 상실했다. 주몽의 고구려가 건국되면서 ‘高句麗族’ 내부의 결속이 이전보다 더 강화되었다. 맹주국의 위상이 더 높아졌고 소국들의 자율권은 약화되었다. 大武神王은 독립성이 강하던 세력들을 那部로 편제했다. 那部體制는 太祖王代에 이르러 완성되었는데, 연맹왕국 단계보다 왕의 권한이 더 강화되었지만, 諸家들이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보유했다는 점에서 중앙집권적 체제와 성격이 달랐다. 외교·무역·전쟁 등에서 창구단일화도 이루어졌다. 고구려에서는 중국과 교류할 일이 있을 때에만 玄菟郡 동쪽 경계에 있는 幘溝漊에 와서 朝服衣幘을 가져가 사용했다. 태조왕은 玄菟郡을 다시 渾河 방면(무순 노동공원, 제3현토군)으로 축출했고, 美川王代에는 낙랑·대방군을 완전히 축출했다. 이 과정에서 내부의 정치체제를 국왕 중심으로 정비했고, 결국 3세기말경에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가 완성되었다.
    주몽은 졸본부여의 왕성이었던 졸본성을 그대로 왕성으로 사용하다가 동명왕 4년에 성곽과 궁실을 만들었다. 졸본부여의 터전은 현재 환인댐 조성으로 인해 수몰된 지구였고, 졸본성은 나합성, 건국 후 3년 뒤에 조성한 성곽과 궁실은 오녀산성으로 비정된다. 비류국의 중심지는 하고성자성으로 비정된다. 주몽 이전에는 높은 산 위에 왕성을 두는 일도 없었고, 평지성-산성의 셑트 구성도 성립되지 않았다. 유리왕이 천도한 국내위나암성은 패왕조산성에 비정된다. 지금의 집안시내로 수도를 옮긴 것은 동천왕 13년이었다. 이때부터 환도성이 도성이 되었다. 그러나 2세기말부터 이미 집안 지역을 집중개발했다. 이후 고국원왕 12년에 국내성이 조성되면서 국내성과 환도성의 셑트 구성이 완성되었다. 동천왕 21년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긴 평양성은 청석진 양민촌에 있는 평지석성에 비정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고의 검토과정을 통해 고구려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고, 초기 고구려의 고고학적 현황에 대한 파악도 할 수 있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향후 고구려의 국가적, 사회적 성격에 대해 보다 밀도있는 검토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백제와 신라 등 다른 고대 국가의 성립, 발전과정에 대해서도 비교사적인 측면에서 검토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고구려의 중국사 귀속을 주장하는 논의에 대해 보다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 색인어
  • 예, 맥, 예맥, 고구려족, 고이족, 상인, 염제족, 민족, 종족, 나부, 나부체제, 중앙집권체제, 주몽, 유리왕, 대무신왕, 산상왕, 동천왕, 비류국, 소노부, 졸본부여, 현토군, 낙랑군, 적석총, 졸본성, 나합성, 패왕조산성, 오녀산성, 환도산성, 평양성, 천도, 평양동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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