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성과물 유형별 검색 > 보고서 상세정보

보고서 상세정보

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06723&local_id=10012143
6-7세기 고구려의 대왜관계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6-7세기 고구려의 대왜관계 연구 | 2004 년 | 연민수(부산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1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5월 1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6세기중엽 고구려는 왕권의 분열과 혼란, 나제동맹군에 의한 한강유역의 탈취, 북진해 들어오는 신라의 군사적 공세로 남방에서 동북방에 걸친 광역의 영토상실이라는 정세하에서 대왜외교는 착수되었다.
    570년 고구려 사절이 동해를 건너 월지방에 도착했다. 왜왕권측에서는 영빈시설을 새로 조영시키는 등 정중한 예의로써 접대하였다. 이때 고구려사가 지참한 국서에는 신라에 대한 적대감을 표시하고 고구려-백제-왜 삼국협력체제의 구축을 통한 신라고립책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用明朝(586~587) 때에 왜왕권의 고구려에 사절파견 이후 양국의 인적교류는 활발해져 갔다. 이러한 교류의 결과 고구려로부터 수많은 선진문물이 왜국으로 유입되었다.
    한편 백제측에서 볼 때 신라고립책을 추진하기 위해 왜왕권이 고구려와 협력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적어도 왜와 고구려의 긴밀한 관계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백제와 적대관계였고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왜왕권의 병력을 지원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국제정세의 변동에 따라 양국의 관계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유동성이 있었다.
    이에 대해 고구려측에서는 왜왕권이 친고구려 노선만 유지해 준다면 그 나름대로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다. 신라와 중국을 상대로 대립하고 있던 고구려로서는 왜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하였고 친백제노선을 취하고 있는 왜왕권이 남방에서 신라를 견제해 주는 것은 그만큼 북방전선에서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이다.
    推古9년(601) 왜왕권은 고구려, 백제 양국에 동시에 사절을 파견하고 고구려에 파견한 사절은 백제를 경유하여 백제에 머물고 있던 왜국사와 함께 귀국한다. 고구려로서는 수의 30만 대군과 결전을 벌인 후였고 양국의 긴장상태는 지속되고 있던 시기였다. 고구려의 대수전쟁의 승리는 왜왕권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대한 강한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며 고구려측이 구상한 삼각협력체제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라에 대해서는 7세기초까지는 고구려의 요청에 응해서 신라에 대한 강경노선을 취했지만, 반신라적으로만 갈 수 없는 조건으로서 대륙에서의 통일왕조의 성립이다. 7세기에 들어 왜왕권은 120여년간 단절되었던 대중통교를 개시하였다. 특히 견수사로 파견된 惠日 등이 귀국 복명서에서 「大唐의 나라는 法式이 완비된 훌륭한 나라입니다. 항상 왕래하심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하여 대중통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보고한다. 그런데 왜왕권의 대중국 사절단의 주요 통과코스인 한반도 남동해안과 서부해상의 중심지역이 신라의 통제하에 있었고, 게다가 견당사의 귀로에는 신라선을 종종 이용하는 등 신라의 협력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반신라적 행동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610년대 이후부터 7세기중엽까지 왜왕권의 동아시아외교는 이전의 백제 일국외교에서 고구려를 포함한 다국외교로 전환하는 실리위주의 균형외교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외교는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으로 파탄에 빠지고 왜왕권은 백제부흥을 위한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게 된다. 백제부흥운동기에 왜왕권의 고구려와의 직접적인 전략적 제휴는 없었다고 보이며 백제의 부흥을 돕는 일이 고구려를 돕는 방안으로 추진되었다. 백제의 부흥이 실패로 끝난 후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왜왕권은 고구려에 대한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고구려를 지원하기에는 국내외적 상황과 조건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고 자국의 안전을 위해 침공에 대비한 국방태세 등 권력집중을 위한 내부적 결속을 다져나갔다. 고구려에 대한 왜왕권의 군사적 지원이란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왕권의 해외파병은 백제가 유일했으며 백제를 위한 협력차원에서 대외관계도 추진되었다. 고구려가 왜왕권에 대해 선진 인적 물적자원을 제공하는 등 공들인 외교적 공략도 군사력을 지원받을 만큼의 성과는 거두기 어려웠다. 백제가 존재하는 한 왜왕권의 백제지향적 대외노선을 극복하기 어려웠고 백제멸망 이후에는 고구려를 지원하기에는 양국의 역사적, 현실적 친연성이 강고하지 못했다. 왜왕권은 멸망해 가는 고구려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채 전란으로 건너온 고구려 유민들을 수용하여 거주지를 마련해 주는데 그치고 말았다. 이것은 고구려의 대왜관계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 영문

  • Goguryeo's policy toward Japan during the 6-7th Century

    In the mid 6th century, Goguryeo's policy toward Japan had started in the amidst of serial national crisis such as breakup of royal authority, loss of the lower reaches of the Han River, and miliary attacks from Silla. In 570, the first Goguryeo envoy arrived in Japan. Goguryeo suggested to Japan that they isolate Silla by forging a three-party cooperation with Baekjae. Japan replied by dispatching her own envoy to Goguryeo. Result was that advanced Goguryeo civilization flowed into Japan.
    In the 7th century, it was difficult for Japan to maintain anti-Silla stance, as she entered into friendly relations. For Silla was commanding major sea routes around the Korean peninsula connecting between Japan and China. Thus, for 50 years since the 7th century, Japan would maintain a multi-national diplomacy embracing Goguryeo.
    When Baekje collapsed under the attack of allied forces of Sill and China, Japan dispatched a large number of army in order to prop up collapsing Baekje. While having no direct alliance with Goguryeo, Japan had sought to restore Baekje as part of efforts to assist Goguryeo. Following the failure of restoring Baekje, allied forces of Silla and China launched a military campaign against Goruryeo. Nevertheless, Japan took no measures to assist Goguryeo. Under the worsening international and internal situations, Japan was absorbed in reinforcing its own defense to counter potential invasion from the continent.
    In the face of collapsing Goguryeo, Japan could do no more than accommodating refuges from the continent. This demonstrates the limitation of Goguryeo's relations with Japa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6세기중엽 고구려는 왕권의 분열과 혼란, 나제동맹군에 의한 한강유역의 탈취, 북진해 들어오는 신라의 군사적 공세로 남방에서 동북방에 걸친 광역의 영토상실이라는 정세하에서 대왜외교는 착수되었다.
    570년 고구려 사절이 동해를 건너 월지방에 도착했다. 왜왕권측에서는 영빈시설을 새로 조영시키는 등 정중한 예의로써 접대하였다. 이때 고구려사가 지참한 국서에는 신라에 대한 적대감을 표시하고 고구려-백제-왜 삼국협력체제의 구축을 통한 신라고립책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用明朝(586~587) 때에 왜왕권의 고구려에 사절파견 이후 양국의 인적교류는 활발해져 갔다. 이러한 교류의 결과 고구려로부터 수많은 선진문물이 왜국으로 유입되었다.
    한편 백제측에서 볼 때 신라고립책을 추진하기 위해 왜왕권이 고구려와 협력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적어도 왜와 고구려의 긴밀한 관계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백제와 적대관계였고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왜왕권의 병력을 지원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국제정세의 변동에 따라 양국의 관계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유동성이 있었다.
    이에 대해 고구려측에서는 왜왕권이 친고구려 노선만 유지해 준다면 그 나름대로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다. 신라와 중국을 상대로 대립하고 있던 고구려로서는 왜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하였고 친백제노선을 취하고 있는 왜왕권이 남방에서 신라를 견제해 주는 것은 그만큼 북방전선에서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이다.
    推古9년(601) 왜왕권은 고구려, 백제 양국에 동시에 사절을 파견하고 고구려에 파견한 사절은 백제를 경유하여 백제에 머물고 있던 왜국사와 함께 귀국한다. 고구려로서는 수의 30만 대군과 결전을 벌인 후였고 양국의 긴장상태는 지속되고 있던 시기였다. 고구려의 대수전쟁의 승리는 왜왕권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대한 강한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며 고구려측이 구상한 삼각협력체제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라에 대해서는 7세기초까지는 고구려의 요청에 응해서 신라에 대한 강경노선을 취했지만, 반신라적으로만 갈 수 없는 조건으로서 대륙에서의 통일왕조의 성립이다. 7세기에 들어 왜왕권은 120여년간 단절되었던 대중통교를 개시하였다. 특히 견수사로 파견된 惠日 등이 귀국 복명서에서 「大唐의 나라는 法式이 완비된 훌륭한 나라입니다. 항상 왕래하심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하여 대중통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보고한다. 그런데 왜왕권의 대중국 사절단의 주요 통과코스인 한반도 남동해안과 서부해상의 중심지역이 신라의 통제하에 있었고, 게다가 견당사의 귀로에는 신라선을 종종 이용하는 등 신라의 협력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반신라적 행동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610년대 이후부터 7세기중엽까지 왜왕권의 동아시아외교는 이전의 백제 일국외교에서 고구려를 포함한 다국외교로 전환하는 실리위주의 균형외교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외교는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으로 파탄에 빠지고 왜왕권은 백제부흥을 위한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게 된다. 백제부흥운동기에 왜왕권의 고구려와의 직접적인 전략적 제휴는 없었다고 보이며 백제의 부흥을 돕는 일이 고구려를 돕는 방안으로 추진되었다. 백제의 부흥이 실패로 끝난 후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왜왕권은 고구려에 대한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고구려를 지원하기에는 국내외적 상황과 조건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고 자국의 안전을 위해 침공에 대비한 국방태세 등 권력집중을 위한 내부적 결속을 다져나갔다. 고구려에 대한 왜왕권의 군사적 지원이란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왕권의 해외파병은 백제가 유일했으며 백제를 위한 협력차원에서 대외관계도 추진되었다. 고구려가 왜왕권에 대해 선진 인적 물적자원을 제공하는 등 공들인 외교적 공략도 군사력을 지원받을 만큼의 성과는 거두기 어려웠다. 백제가 존재하는 한 왜왕권의 백제지향적 대외노선을 극복하기 어려웠고 백제멸망 이후에는 고구려를 지원하기에는 양국의 역사적, 현실적 친연성이 강고하지 못했다. 왜왕권은 멸망해 가는 고구려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채 전란으로 건너온 고구려 유민들을 수용하여 거주지를 마련해 주는데 그치고 말았다. 이것은 고구려의 대왜관계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고구려와 왜왕권의 공적, 사적 교류의 전체상을 파악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 활용되지 않았거나 단편적으로 밖에 이용하지 않았던 일본측 사료를 최대한 분석, 정리한 고찰을 목표로 한다. 여러 사서에 흩어져 있는 사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하는 작업은 본 학술연구가 최초이다. 따라서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일본측 사료에 대한 관심과 앞으로의 연구에 적지않은 자극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대외관계에 있어서 그동안 홀시되어 왔던 왜국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일은 이 분야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중국중심의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동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한 폭넓은 연구에 다양한 관점과 시각을 제공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양국이 최초로 공적으로 접촉하는 6세기후반에서 고구려가 멸망한 7세기후반까지 1세기에 걸친 양국관계의 종합적 고찰과 여기에서 도출된 각 시기적 특징과 성격은 금후 세부적 각론적 연구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문화사적인 면에서 왜국에 전해진 고구려의 다양한 문물을 분석하는 일에 의해 금후의 고구려의 대외 문물교류사의 연구에 관심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본다.
    최근 일본역사교과서 서술에서 고구려사절의 왜국행을 조공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에 대해 한일연구자간에 의견교환을 통해 견해차를 좁힐 수 있고, 일본학계에 대한 대응논리로서도 활용될 수 있다고 본다. 고대사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성격을 그대로 신뢰하려는 일본의 일부연구시각에 대한 문제점과, 동시에 왜국을 고구려의 하위에 두려는 국내의 일부 연구자의 자세도 비판하여 엄정한 사료적 검토와 비판을 통해 공정하고 객관적 서술을 지향한다. 국제관계의 발생은 왕권내부의 모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국가간의 이해관계에서 나온다.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오는 주관적 인식을 객관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색인어
  • 고구려.왜왕권, 신라, 동아시아, 백제, 대왜인식, 외교
  • 이 보고서에 대한 디지털 콘텐츠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 본 자료는 원작자를 표시해야 하며 영리목적의 저작물 이용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 또한 저작물의 변경 또는 2차 저작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