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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06732&local_id=10011980
李正己 一家 藩鎭과 渤海
Reports NRF is supported by Research Projects( 李正己 一家 藩鎭과 渤海 | 2004 Year | 정병준(동국대학교) ) data is submitted to the NRF Project Results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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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A00015
Year(selected) 2004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06년 05월 29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06년
Research Summary
  • Korean
  • 이정기 일가는 安史의 亂 직후인 765년에 오늘날의 산동지방에 자신의 번진을 건설하여 약 54년 동안 해당 지역을 독립적으로 지배하다가 이정기의 손자인 李師道 시대에 이르러 唐朝 중흥의 영주로 불리는 憲宗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이정기 일가의 번진에 대해서는 그들이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남북한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왔으며, 최근에 들어서는 주제가 더욱 세분화되고 또 그들이 수행한 역사적 역할을 보다 다양하게 조망하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이에 더해 외국 학자들도 그 동안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정기 일가의 平盧 번진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다.
    본고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이정기 일가의 번진과 大祚榮이 건국한 渤海의 관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부분적인 견해들이 제출되어 있지만, 아직 전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본고에서는 이정기 일가의 입장에 특히 유의하면서 그들과 발해가 어떠한 관계들을 맺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내부 상황과 주변 상황 및 당조와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정기가 역사의 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은 范陽․平盧․河東節度使를 겸임한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던 시기이다. 즉 안록산의 반란 직후에 遼西의 平盧軍이 안록산을 이반하여 번진을 들어 당조에 투항하였을 때, 이정기도 함께 참여하여 당조로부터 관직을 얻으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뒤에 당조와 평로군의 전세가 일시 불리하게 되었을 때 평로 내부에서 다시 안록산과 내통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그러면서 각 진영이 발해를 內亂에 끌어들이려 하면서 동아시아에 미묘한 파장이 일어난다.
    당시 이정기는 당조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 속에 그는 마침내 평로군의 실권을 장악하고 후희일을 藩帥로 추대하였다. 이정기의 대두는 쿠데타를 통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후 평로군의 동향은 그의 의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발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시기에 발해는 당조나 반란군 진영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안사의 난을 계기로 신라침공계획을 준비하였는데, 여기에는 발해의 의향이 적지 않게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발해는 침묵 속에서 나름의 의사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정기 일가가 산동을 지배하던 시기의 발해는 당과 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였고, 당 역시 여러 차례에 걸쳐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당과 발해의 외교적 관계 사이에는 평로절도사 이정기 일가가 겸임한 押新羅渤海兩蕃使가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압신라발해양번사에 대한 이해는 당과 발해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의 하나가 된다. 압신라발해양번사는 당시 변경의 절도사들이 겸임하고 있던 押蕃使의 하나였다. 이정기 일가는 이 관직을 이용하여 발해와 공적으로 다양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이정기 일가의 주된 관심사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당조와의 관계이다. 하지만 이정기 일가는 당과 발해․신라의 외교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입지를 고려하여 발해 등과 관계를 맺었다.
    이정기 일가는 교역활동을 매우 활발하게 전개하여 발해를 포함한 동아시아 각국과도 연결된 동아시아 교역망을 건설하였다. 그들이 발해 등과 교역을 할 때 압신라발해양번사라는 관직이 유용하였음을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 지역은 당조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지역이어서 해당 관직의 직권을 넘어 더욱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특히 교역의 경우에는 그러했다. 그러면서 이정기 일가는 상인을 유치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것이다. 평로 번진에서 사무역이 행해졌다는 것을 전하는 직접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해적에 의해 피랍된 신라인 노비가 평로 등지에서 거래되었다는 것은 이정기 일가의 번진에서 진행된 사무역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정기 일가과 발해의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소그드인이었다고 보인다. 평로절도사 후희일이 이정기에게 축출되기 직전에 巫를 데리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이었다. 이러한 것은 평로치청에 소그드인 군장이나 상인이 많았던 것을 암시한다.
  • English
  • Lee, jeong-ki(李正己) Family and balhai(渤海)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본고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이정기 일가의 번진과 大祚榮이 건국한 渤海의 관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전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부분적 견해들은 제출되어 있다. 혹자는 이정기 일가가 고구려인의 후예이기 때문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 반면, 신라에 대해서는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서 발해와 신라가 각각 당에 파견한 사신의 횟수, 또 해적들이 신라인들을 잡아다가 이정기 일가의 번진에서 노비로 팔았다는 것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의 민족 개념 또는 국민국가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이해한 것일 수 있다.
    또 혹자는 이정기 일가의 번진은 산동지역을 지배한 강력한 독립국가였다고 하면서 당과 발해․신라의 외교관계에 대해서 이정기 일가가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정기 일가는 비록 자신의 번진을 독립적으로 지배했다고 해도, 당조의 官爵을 계속 원했고 따라서 기본적으로 당조로부터 완전 독립을 지향하지는 않았다. 이정기 일가와 발해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당․발해 관계의 일부라는 성격이 강하였다. 하지만 이정기 일가의 번진에는 당조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이정기는 당과 발해의 관계에 있어서 언제든지 자신이 유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또한 독자적으로 발해와 필요한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다.
    이외에도 몇몇 연구자들이 몇 가지 사안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 보인다.이정기 일가와 발해의 교역과 압신라발해양번사에 대한 견해가 그것이다. 이 중 후자는 이정기 일가가 당조로부터 공식적으로 제수받은 관직이다. 이정기 일가와 발해의 교역에 대한 당조의 통제력은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전혀 통제를 가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정기 일가는 그들대로, 또한 발해도 그들의 이익에 따라 서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하지만 양자가 당조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당조의 입장을 고려하면서도 서로간의 이해를 중시하였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연구결과에 따른 활용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高句麗의 후예들에 관한 연구에 도움이 된다. 이정기는 고구려인의 후예이고,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다. 따라서 양자는 모두 고구려의 후손 또는 계승국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들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후손들이 각각 어떠한 상황 속에서, 또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갔는가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는 渤海史의 이해에 도움을 둔다. 본 연구는 발해사 그 중에서도 특히 발해의 외교사과 관련된 것이다. 발해사에 대해서는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현존 사료를 해독하고 해석할 때 보다 폭넓은 지식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이정기 일가는 직접 간접으로 발해와 관련이 있다.
    셋째는 당시 東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준다. 이정기 일가 번진과 발해의 관계는 바꾸어 말하면 일차적으로 唐과 渤海의 관계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발해와 당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연구가 나와 있지만, 그 사이에 개재되어 있는 이정기 일가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당과 발해 및 이정기 일가의 관계는 당시 신라까지 포함한 동아시아 각국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넷째는 韓國民이 中國史에 미친 역할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된다. 安史의 亂은 중국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은 대사건이다. 곧 안사의 난을 계기로 중국이 이른바 ‘唐宋變革期’라는 약 200년에 걸친 기나긴 격동과 변혁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인데, 이정기는 그러한 안사의 난 중에 등장하여 반독립적인 번진을 건설하는 과정에 藩鎭史에서 최초로 쿠데타를 일으켜 이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다섯째는 이정기 일가에 대한 이해는 우리 민족의 끈기와 당당함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게 할 것이다. 특히 이정기 일가는 조국 고구려는 멸망하였지만 당당하게 살아남아 고구려를 멸망시킨 바로 그 당 나라의 중심부에서 광대한 영토를 사실상 독립적으로 지배하는 大번진을 건설하였다.
    여섯째는 한반도의 남북관계와 국제사회를 바라보는 시야의 폭을 넓게 할 것이다. 이정기 일가와 발해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당과 발해의 관계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이정기 일가의 독자적인 논리도 함께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적 역할관계가 작용하였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 Index terms
  • 이정기 일가, 발해, 안사의 난, 안록산, 번진, 교역, 압신라발해양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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