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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후반 발해의 대일본외교와 교역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8세기 후반 발해의 대일본외교와 교역 | 2004 년 | 조이옥(영산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6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5월 25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8세기 후반 발해는 안사의 난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당과 신라와의 관계증진을 통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고양시키는 성과를 가져왔다. 국제관계의 재편을 조정할 정도로 국제적 위상이 격상된 발해는 일본에 대해 시종일관 상국의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강조하는 이른바 의례외교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증여와 사여의 형식을 통한 공적인 교역을 성사시키는 성과를 가져 왔던 것이다. 이것은 8세기 후반 발해가 대일본외교의 자세를 확립하는 동시에 교역을 통한 경제적인 실익도 도모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일본은 발해의 고압적 태도에 대하여 상딩히 호의적인 태도로 대발해외교를 추진하고 있어 주목된다. 8세기 중엽이래 신라와의 관계가 좀차 악화되면서 일본은 신라와의 교역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8세기 후반 견당사의 파견마저 용이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해와의 교역은 대발해외교의 중요한 축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발해의 고압적 자세에서 비롯한 외교적 마찰에도 불구하고 발해와의 관계를 호의적으로 전개시키려는 의도에서 발해사의 입조루트를 북로 대신 축자로로 규정화하는 방침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해사가 축자도를 이용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 따라서 일본은 발해와의 외교적 마찰 속에서도 발해의 교통로 및 항해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일본은 축자도의 이용을 해제하는 동시에 북로로의 방문을 승인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8세기 후반 발해를 둘러싼 대내외적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발해는 대일본외교의 자세를 확립하는 동시에 교역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일본은 발해와의 교역을 통한 실익이 대발해외교의 중심축이 되었기 때문에 율령제국가라는 명분보다는 사실상 경제우선의 외교에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 영문
  • Diplomatic relations and trade of Balhae- Japan in the later 8th century
    cho, lee-ok

    The many papers on the relations of Balhae-Japan in the later 8th century have mainly dealt with the conversion of the political diplomacy to the economic one from the Japanese point. in other words, it has been regarded as an economic reason that Balhae dispatched envoys on a large scale to janpn to talk over the trade issue when Janpanese withdrew its devil design for invading shilla.
    Balhae, however, dispatched the a large number of the envoys consisting of about 180 to 300 people to janpan five times within the short period of the later reign of king Moon from 771 to 779, it is noticeable that Balhae consisently took high-handed diplomatic policy even to cause the diplomatic friction with the sovereign's message born by a Balhae envoy. lt means the change of Balhae's diplomatic policy toward Japan that balhae dispatched a large diplomatic mission.
    Shortly, Balhae rapidly grew in the later 8th century and there was a change in both domestic and abroad situation. lt is thought that it made Balhae lead the scale trade with Japan as well as a very uncompromising position on the diplmatic issu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8세기 후반 발해와 일본의 관계에 대한 기왕의 연구는 일본의 관점에서 정치중심의 외교에서 경제중심의 외교로 전환하였다고 보는 데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즉 석정정민을 비롯한 일본학계의 연구는 764년 일본의 신라침공계획의 무산을 계기로 발해가 번국의 종속적 자세를 감수하면서 대규모 사신를 일본에 파견한 것은 경제적인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문왕대 후기에 해당하는 771년 이래 779년의 단기간에 발해가 5회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그 규모도 180명에서 300명이 넘는 대규모였다. 특히 발해사가 지참한 국서의 내용과 관련하여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야기하는 등 발해는 시종 일본에 대하여 고압적인 외교자세를 견지하였다. 이렇게 8세기 후반 외교형식을 갖춘 대규모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음은 발해의 대일본외교의 목적과 양상이 이전에 비해 변화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일본은 발해의 고압적인 태도에 대하여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로 대발해외교를 추진하였다. 8세기 중엽이래 신라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면서 일본은 신라와의 교역을 통한 당물의 수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8세기 후반 견당사의 파견마저 용이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해와의 교역은 대발해외교의 중요한 축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발해와의 외교적 마찰 속에서도 발해의 교통로 및 항해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8세기 후반 발해를 둘러싼 대내외적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발해는 대일본외교의 자세를 확립하는 동시에 교역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결과는 8세기 후반 발해의 대일본외교의 실상을 일본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한국사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인식하는데 기여하리라 생각한다. 아울러 본 연구결과는 일본학계에사도 관심이 높은 분야이므로 외국의 잡지 등에 소개함으로써 국제적인 학술교류에도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본 연구의 결과는 교육현장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대학에서 개설하고 있는 발해사 관련 수업에서 발해사에 대한 국가적 위상을 일본과의 관계를 통하여 고양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예상된다. 한국사상 발해사가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시급한 시점에서 8세기 후반 발해와 일본의 관계에 대한 연구성과는 앞으로 다각도로 활용되리라 여겨진다.
  • 색인어
  • 발해사 외교자세의 확립 교역창구 국제관계의 재편 내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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