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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남진정책의 성격과 그 영향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고구려 남진정책의 성격과 그 영향 | 2004 년 | 주보돈(경북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7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5월 24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고구려는 4세기 후반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일시적인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의 개혁을 거치면서 그를 극복하였다. 391년 영웅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영토 확장에 크게 성공을 거두어 사실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실상은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비문에 따르면 당시는 유독 남쪽 방면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 가운데 본 논문에서는 400년에 倭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한 신라의 요청으로 단행된 嶺南 지역의 고구려 出兵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 작전에 고구려는 5만에 달하는 大兵力을 파견하였다. 결과적으로 큰 戰功을 거두었는데 이를 흔히 南征이라 이름한다. 이 작전을 통하여 고구려는 신라를 침략한 倭를 축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연합한 加耶의 일부 영역까지 빼앗아 신라에 넘겨 주었다. 대부분의 병력은 철수하였으나 일부 병력은 신라 영역에 남아 있었다. 고구려는 이후 援兵을 배경으로 삼아 신라에 대해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는 말할 것도 없고 인근의 가야 지역도 자연 고구려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권에 편입되었다.
    기왕에 그 영향력의 정도를 놓고 많은 연구가 수행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基本史料라 할 광개토왕비문을 꼼꼼하게 분석하지 않고 考古資料를 恣意的으로 해석함으로써 실상보다 과장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런 논의를 總稱하여 흔히 南征論이라 부른다. 본 논문에서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문제점을 摘示하고 나아가 碑文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토대로 南征의 실제적인 내용을 밝혀보고 그것이 지닌 意義를 새롭게 究明하고자 하였다.
  • 영문
  • Though Kokurye Dynasty encountered a temporary crisis in the late 4th century due to King Kokukwon's death in battle with Bekje Dynasty, it came to overcome the crisis through King Sosurim's social reform. Kokurye Dynasty came to enjoy its heyday through the expansion of its land after the Great King Kwangketo ascended the throne in 391. The situation of that time was well expressed in King Kwangketo's inscription made in 414.
    The inscription told us that Kokurye Dynasty was especially interested in the southward expansion of the land. Among the various examples that reflect such interest, this paper is to investigate the dispatch of Kokyrye troops to the Yungnam area. This dispatch was called by Silla Dynasty, which was in crisis caused by Japan's invasion at that time. Kokurye Dynasty dispatched 50 thousand troops for this campaign. Kokurye Dynasty rendered distinguished military services, and thus the success in this campaign was named 'Conquest of Southward Expansion.' Through this campaign, not only did Kokurye Dynasty expel Japanese troops, which invaded Sylla Dynasty, but it also wrested a part of the territory of Kaya, which was allied with Japanese troops, and gave it to Sylla Dynasty. Most Kokurye troops were withdrawn but a part of them remained in Silla. Using the remaining troops, Kokurye Dynasty, since then, made a strong influence on Sylla Dynasty. Through this, not only Silla Dynasty but Kaya Dynasty was being under the strong political and cultural influence of Kokurye Dynasty.
    So far, many studies have been proposed to determine the degree of influence Kokurye Dynasty made. However, most studies failed to examine carefully the inscription of King Kwangketo, a basic historical record, interpreted pieces of archeological evidence available arbitrarily, and consequently led to conclusions exaggerated than the reality. All these studies were called 'theories of the Conquest of Southward Expansion.' This paper is to introduce previous studies in detail, pointing out problems with the studies. In addition,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reality of the Conquest of Southward Expansion through a careful investigation of the inscription of King Kwangketo and to propose a new meaning of the Conquest of Southward Expansio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광개토왕 10년(400) 왕이 5만의 대군을 신라의 원병 요구에 따라 낙동강까지 파견하여 왜 및 가야가 연합한 세력과 한판의 대결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고구려의 영향력이 이 방면에 크게 미치게 되거니와 이를 포함하여 고구려의 남정이 가지는 의미를 둘러싼 논의를 흔히 남정론이라 일컫는다. 남정론은 고구려의 남정을 낙동강 유역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라 하겠다. 이를테면 그 직전까지 김해를 중심으로 한 소위 전기가야가 이 사건을 계기로 종말을 고하고 대신 내륙의 고령에 위치한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가야가 등장하였다고 보거나, 고구려의 영향이 크게 미치게 되면서 신라에서는 이른바 새로운 묘제로서 적석목곽분이 출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문헌학과 고고학 두 학문 분야에서 동시에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두 분야에서 진행된 논의를 꼼꼼히 살펴 보면 의외로 기본적인 사항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음이 발견된다. 달리 말하면 그를 살피는데 기초자료라 할 광개토왕비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거의 소홀시하였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선행 작업을 게을리한 채 진행된 그 동안의 남정론은 어쩌면 선입견에 바탕한 해석이 아닐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게다가 그 동안 새로운 고고자료가 증가되었으므로 그와 결부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검토한 결과 과연 실제보다 지나치게 400년의 남정을 과장되게 헤석한 측면이 강하였다. 기왕의 빚어진 해석상의 오류는 근본적으로 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겨진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고고학과 문헌자료를 활용한 기초적인 연구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두 학문 분야가 결합한 분야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 동안 관련학계의 학제적인 연구를 둘러싼 논의는 무성하다고 하여도 좋지만 구체적인 시도는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그리고 기왕에 잘못 이해된 부분을 시정한 곳이 많으므로 새로이 쉽게 정리되어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학생들에게도 널리 공유될 기회를 갖기를 기대하여 본다.
  • 색인어
  • 광개토왕비, 남정론, 기본자료, 고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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