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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06736&local_id=10012058
13-14세기 고려와 요동지역의 경제적 교류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13-14세기 고려와 요동지역의 경제적 교류 | 2004 년 | 위은숙(영남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9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5월 2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고는 주로 정치, 외교사 연구에 머무르고 있었던 요동과 고려의 관계사를 경제적 교류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밝혀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연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간섭기 이후 고려에서 요동으로 흘러들어간 인구는 사료상으로 짐작컨대 최저 3~4만명에서 최대 8~9만명에 달한다. 이들 요동지역의 고려인이 고려와 요동의 경제적 교류의 인적 토대가 되었다.
    둘째. 양 지역간 교역은 원대 이전부터 꾸준히 전개되어 왔으나, 원간섭기에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것은 원조정이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상업을 적극적으로 활성화시켰던 상업정책과도 관련이 있으며, 고려도 왕실부터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위해 적극적으로 교역에 나서는 등 교역이 활발해 질수밖에 없었던 여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요동에는 懿州에 국왕의 어용을 위해 해전고점포가 개설되어 있었고 고려의 물자가 대량으로 요동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짐작된다. 더 나아가 고려와 요동상인간의 활발한 왕래가 사료를 통해 확인된다.
    세째, 원대에는 유라시아대륙 전체를 연결하는 역참제도가 확립되었다. 수도인 대도를 중심으로 대원울루스 전체를 방사선으로 연결하는 역참제는 대원울루스 운영의 동맥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교통망을 통해 움직이는 것은 군사뿐 아니라 바로 물자였다. 원은 고려에게도 이 대원울루스에 연결되는 역참설치를 요구하였다. 이 교통로 확립이 요동과 고려와는 물론이요, 고려와 원과의 교역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당연하다. 요양성과 고려의 국경도시 의주 사이에는 8개의 참역이 있었고, 요양과 심양사이에는 영성이리간이 설치되어 양 지역간 경제적 교류의 토대가 되었다.
    네째, 요동은 요양행성에 편입되어있었고, 고려는 원의 간접통치권역이었다. 원은 요동지역을 고려와 분리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은 요동지역과 고려가 가진 정치적 특수성으로 인해 근접재정권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요동에 기근이 들 경우 고려의 비축미를 이용하기도 하고, 거꾸로 고려에 기근이 들 경우 요동비축미가 기근구제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요동과 고려와의 꾸준한 경제 공민왕말기 요.심지역을 당연히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는 영토의식의 한 배경이 된다고 생각된다.
  • 영문
  • The Economic Interchange of Goryeo(高麗) and Yodong(遼東) in 13~14 Centry

    During intervention era of the State of Won(元) in 13~14 centry, Many of Goryeo race was emigrated to Yodong(遼東) region. the State of Won(元) was established Simyangro(瀋陽路) for mandatory of these Goryeo race(高麗人). Simyangro's natives was hazardoused nearly 30,000 people about the record 5183ho(戶). but even if circumstances of Goryeo race was return to Goryeo and Joseon(朝鮮) avoid the State of Won 's confusion, it will be more than 8~90,000. and many of Goryeo race keep one's residence, it was human base of economic interchange of Goryeo and Yodong.
    Goryeo and Yodong region was sprightly trade before the State of Won 's intervention. but at the State of Won's era, the political was active commercial policy for scale up tax income. maybe it was contribute to activate not only trade of Goryeo and the State of Won but also trade of Yodong and Goryeo in to route the State of Won. that era, Goryeo also sprightly trade for appropriation short of finances. there was goods store in Yodong, and activate interchange among Goryeo and Yodong, the State of Won's capital 'daedo(大都)'.
    Though the State of Won's demand, there was maintenance a traffic networt two region. posthouse establishment of Dae Won(大元)-Ulus military rute and physical distribution rute was wide contribute to commerce revitalization of more than comparison before era.
    The post-town(驛站) between Goryeo and the State of Won was rute through penetration in Dae Won-Ulus. and it could wide contribute to commerce revitalization of more than comparison before era. between Yoyangseong(遼陽省) and the border of Goryeo-Euiju(義州) was eight post-town(站驛), and also, Irigan(伊里干) establish was contribute to commerce revitalization between Yoyang(遼陽) and simyang(瀋陽).
    The other side, Goryeo was not directly rule over by the State of Won, because of there was many Goryeo race trailerite, the State of Won was look to be grasp Goryeo and Yodong. That is, when Yodong was famine era, relive to Yodong by mobilize of Goryeo's foodstuffs.
    in this context, because of continue human and material sprightly trade of long time, Goryeo was spread recognition which that Yodong was own a territory, that is, appeared Yodong Reconery War.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고는 주로 정치, 외교사 연구에 머무르고 있었던 요동과 고려의 관계사를 경제적 교류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밝혀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연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간섭기 이후 고려에서 요동으로 흘러들어간 인구는 사료상으로 짐작컨대 최저 3~4만명에서 최대 8~9만명에 달한다. 이들 요동지역의 고려인이 고려와 요동의 경제적 교류의 인적 토대가 되었다.
    둘째. 양 지역간 교역은 원대 이전부터 꾸준히 전개되어 왔으나, 원간섭기에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것은 원조정이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상업을 적극적으로 활성화시켰던 상업정책과도 관련이 있으며, 고려도 왕실부터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위해 적극적으로 교역에 나서는 등 교역이 활발해 질수밖에 없었던 여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요동에는 懿州에 국왕의 어용을 위해 해전고점포가 개설되어 있었고 고려의 물자가 대량으로 요동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짐작된다. 더 나아가 고려와 요동상인간의 활발한 왕래가 사료를 통해 확인된다.
    세째, 원대에는 유라시아대륙 전체를 연결하는 역참제도가 확립되었다. 수도인 대도를 중심으로 대원울루스 전체를 방사선으로 연결하는 역참제는 대원울루스 운영의 동맥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교통망을 통해 움직이는 것은 군사뿐 아니라 바로 물자였다. 원은 고려에게도 이 대원울루스에 연결되는 역참설치를 요구하였다. 이 교통로 확립이 요동과 고려와는 물론이요, 고려와 원과의 교역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당연하다. 요양성과 고려의 국경도시 의주 사이에는 8개의 참역이 있었고, 요양과 심양사이에는 영성이리간이 설치되어 양 지역간 경제적 교류의 토대가 되었다.
    네째, 요동은 요양행성에 편입되어있었고, 고려는 원의 간접통치권역이었다. 원은 요동지역을 고려와 분리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은 요동지역과 고려가 가진 정치적 특수성으로 인해 근접재정권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요동에 기근이 들 경우 고려의 비축미를 이용하기도 하고, 거꾸로 고려에 기근이 들 경우 요동비축미가 기근구제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요동과 고려와의 꾸준한 경제 공민왕말기 요.심지역을 당연히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는 영토의식의 한 배경이 된다고 생각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정치외교사에 머무르고 있던 요동과 고려의 관계사를 경제적 교류라는 측면에서 밝혀보고자 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이 시기 요동지역과 고려 사이에는 단순히 인간적 교류만이 아니라 물적 교류도 활발하였고, 하나의 경제권이라는 인식이 확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토대가 되어 요동을 우리의 영토라는 여기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연구를 통해 요동지역이 가진 한국사에서의 역사적 의미를 더욱 분명히 밝히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 색인어
  • 요동의 고려인구수, 심양로, 동녕부, 의주해전고점포, 상세, 노걸대, 역참제, 영성이리간, 선성이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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