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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 韓中 關係의 이해: 韓國獨立에 관한 中華意識의 二重性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20세기 중반 韓中 關係의 이해: 韓國獨立에 관한 中華意識의 二重性 | 2004 년 | 이재령(단국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20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4월 28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글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국 국민당정부의 한국독립에 관한 인식과 대응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중관계에 드러난 중화의식의 이중성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중국신문 중 영향력이 컸던 󰡔申報󰡕·󰡔中央日報󰡕와 영자신문들에 비친 한국독립에 관한 인식을 분석하였다.
    전후 한국문제 처리와 관련하여 중국 국민정부는 임정을 중심으로 신속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구상하였다. 여기에는 현실적으로 한반도문제가 중국의 안위에 중요하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특히 소련의 공산세력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한국독립을 통해 주변 열강의 세력균형에 의한 완충지대 역할을 기대하였다. 또한 한중관계의 오랜 역사 속에 내재된 宗主國 관념이 전후문제 처리과정에서 보호자의 역할로 표출되었다. 다만 戰後 한중관계는 對美, 對蘇 관계보다 하위개념으로 미·소의 한반도 구상과 정책에 의해 제한받았다.
    전후 중국의 대한인식은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의한 수직관계와 국방·외교의 현실적 필요에 따른 수평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전자는 중화주의에 기인한 것으로, 비록 ‘형제’의 우호관계를 내세웠지만 ‘후원자’ 혹은 ‘보호자’로서의 우월의식을 드러냈다. 후자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한 것으로, ‘완충지대’의 역할을 기대하며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정착에 한국독립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또한 한중관계를 ‘脣齒’ 혹은 ‘手足’으로 비유하듯이 항일투쟁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였다. 戰後에는 공산주의세력을 공동 적으로 삼아 한·중 연대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중국의 한국인식은 中華主義의 틀 속에서 지속되어 온 측면과 근현대를 거치는 동안 변용되어 온 측면이 함께 존재한다. 이러한 지속과 변용의 변주 속에서 현대 중국의 이중적 한국인식이 형성된 것이다.
    전후 국민정부는 한국독립과 관련하여 자기구상을 가지고 일관된 주장을 폈지만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중국은 戰後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맏형’을 자임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후원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대응은 변용된 중화의식의 표출이었고, 전후문제 처리과정에서 좌절된 중국의 對韓構想은 근현대 중화주의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영문
  • This paper is planned to survey how the Guomindang understand and cope with the Korean Independence after the end of the World War Ⅱ. Then, we also aim to examine the dualism of the Chinese Ideology appeared in the Korean-Chinese Relationship. With intent to confirm these facts, here is intended to analyze the viewpoint connected with the Korean Independence and reported in the Chinese Press; the Shin-Bo, the Jung-Ang Ilbo, and a few English Papers which had a great influences at that times.
    In relation to handling several problems of postwar Korea, the Chinese government represented by Guomindang made a plan to speedily organize a unified government with a provisional government as the central figure. There was actually an inner thought that the political state of the Korean Peninsula might have had a vital importance to the destiny of China. Especially, under the circumstance that the Communist bloc was extended by the U.S.S.R., China intended to play an important role as a buffer zone by keeping the balance of power among the western and surrounding powers. The historical concept of a suzerain state to be immanent between Korea and China was also expressed as a guardian's position in the process of solving some postbellum problems. However, the influencing power of China was inferior to the U.S. and the U.S.S.R. after the war and it could help but be restricted by two countries' politic conception and diplomatic policy toward Korea.
    We can make out China's diplomatic policy toward Korea in those days as the relationship of master and servant derived from historic and cultural backgrounds and the cooperative relationship resulted from practical needs for its national security and diplomacy. The former originated in the Chinese Ideology, although it presented friendly relations of brothers, showed its sense of superiority as a supporter or a patron. In the latter, China took notice of Korea's geopolitics expected to play a role as a buffer zone and regarded the Korean Independence as a precondition to establish the stability and peace of East Asia. Thus, China's understanding toward Korea had shown the complicated aspects not only kept in frame of the Chinese Ideology but also transfigured for modern ages. The dualism of contemporary China on Korea was founded though these variation and continuance.
    Although Guomindang after the war held its own idea and expended its consistent policy, in relation to the Korean Independence, it couldn't have an critical influence on Korea on account of dynamic or diplomatic relations. In the process of reorganizing the new order of the postwar, China posed as 'the eldest' and supported the liberation and the independence of an opposed people. These movements of China expressed that the Chinese Ideology was undergone a complete transfiguration and, also, revealed that the Chinese purpose to Korea was broken down in the course of solving several postwar problems. In short, we can appreciate that these facts at that time are certain to show symbolically the limitation of the Chinese Ideology in moder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 서론: 중국의 東北工程에 관한 문제의식이 고조되면서 한중관계에 관한 역사적 재검토작업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해방정국에 관한 중국의 인식은 현대 한중관계를 이해하는데 주요한 관건이다. 이 글에서는 해방 직후 한국독립에 대한 국민당 정부의 인식을 바탕으로 20세기 중반 한중관계에 드러난 중화의식의 이중성을 규명할 것이다. 아울러 해방이후 한중교류의 역사적 재인식을 통해 한중관계사의 이해를 넓히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학문적으로 대응하려는 時宜的 목적도 있다. 이를 위하여 당시 중국신문들 가운데 영향력이 컸던 申報·中央日報와 대외문제를 비중 있게 다룬 영자신문들에 비친 한국독립에 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분석, 이해할 것이다.
    2. 전후 한국문제의 구상과 실재: 전후 중화민국은 한국의 독립과 자유회복을 명분으로 그동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임정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아 환국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정통성을 갖춘 親中政權을 세우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중국의 관점은 한반도를 자국의 안위에 필요한 脣亡齒寒의 관계로 보는 전통적 우호의식과 종속관계에 의한 과거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우월의식 및 앞으로 아시아에서 경쟁관계가 될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는 현실적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차선책으로 중국은 미·소 주둔군의 분할통치에 반대하면서 미·영·중·소 4개국의 공동신탁관리를 지지하였다. 미국은 전쟁기간에 소련의 對日 견제역할을 중시한 전략에서 벗어나 전후 유럽과 아시아에서 공산세력의 확산을 저지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런 가운데 對蘇 방어전략과 반공정책이 미국의 對韓政策으로 자리 잡았고 구체적 결실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었다. 그러나 종전 후 미·소 중심의 동아시아질서가 형성되면서 중국은 국제적으로 소외되었고, 심각한 내전상황 때문에 적극 대응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해방전후 중국의 대한인식을 쇠락한 大國의 자조적 방관이 아닌 중화의식의 변용시기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3. 金九·李承晩에 관한 중국 인식: 국민정부는 항일독립운동을 통해 김구와 개별적 비공식적 연대관계를 맺었고, 해방정국에서도 지속, 강화시킬 요량이었다. 그러나 미·소의 분할지배에 따른 중국의 영향력 상실과 김구의 취약한 정치기반 때문에 양자관계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다. 반면 이승만은 전후 냉전체제에서 반공을 한중관계의 새로운 공동목표로 내걸고 적극적인 연대를 모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蔣介石과 국민정부는 통일을 앞세운 김구보다 반공과 독립을 주장한 이승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戰後 국민정부를 중심으로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인식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처음 국민정부는 김구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만큼 이승만에게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인 대미외교와 철저한 반공노선을 편 이승만에 대해 국민정부 지도자들의 관심이 점차 높아졌다. 특히 남한 단독선거에 의한 정부수립 절차가 진행되면서 이승만의 지지성향이 높아졌다. 그리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민정부는 신속한 외교승인과 더불어 이승만 개인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보여주었다. 전후 양국의 현안이 된 반공문제를 통로로 蔣介石과 이승만의 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4.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국민정부: 국민정부는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에 즈음하여 “아시아의 ‘맏이’인 우리 中華民國이 분발하여 강대해지고, 창의를 앞세워 아시아 독립 민주의 신생국가들을 연합하여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보호한다면 동아시아의 빛나는 미래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전후 중국이 구상한 아시아관, 곧 동아시아질서는 종속적인 중화체제나 사대관계는 아닐지라도 ‘중심국가’로서 ‘보호자’의 역할에 의한 중화의식의 변용을 보여주고 있다. 전후 국민정부의 처음 한국구상은 미·소의 영향력을 배제한 親中 성향의 통일정부, 곧 김구와 임정에 의해 정통성을 가진 정부였다. 이에 중국은 미·소의 남북한 분할지배에 반발하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4개국의 공동신탁관리안을 추진하였다.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역량을 활용하여 소련 및 공산주의세력을 배제 혹은 저지할 수 있는 친미반공정부이었다. 반공이란 새로운 공동목표를 중심으로 이승만과 미국 그리고 국민정부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5. 결론: 전후 국민정부는 한국문제와 관련하여 자기구상을 가지고 일관된 주장을 폈지만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자기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없었다. 이 시기 중국의 對韓構想은 일찍이 역사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변용된 중화의식의 표출이자 20세기 중반이후 새롭게 모색된 신중화주의의 맹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전후 동아시아세계 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맏형’을 자임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후원하려던 중국의 모색과 대응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전후문제 처리과정에서 좌절된 중국의 구상은 근현대 중화주의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전후 중국이 구상한 아시아관 곧 동아시아세계는 종속적인 중화질서나 事大관계가 아닐지라도 ‘후견인’으로서 변용된 중화의식을 엿볼 수 있다.
    활용방안: 이 연구는 기존연구에서 결여되어 있던 20세기 중반 중국의 韓國觀의 역사적 형성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기존 연구의 공백을 보완할 수 있다. 또한 현대중국의 對韓認識에 대한 원초적 이해를 통하여 21세기 한중관계사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날로 고조되어 가는 중국의 자민족 중심주의적 中華意識의 문제점을 객관적 논리로 비판할 수 있는 학문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해방 전후 중국의 韓國觀 변화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고찰함으로서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고구려사 왜곡의 현재적 대응책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연구결과물은 <중국근현대사연구> 제29집(2006. 3)에 이미 발표 출간되어 후속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동아시아국제관계사>, <한중관계사> 등의 관련 학과목에서도 본 연구의 성과는 강의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 색인어
  • 韓中關係, 中華意識, 對韓認識, 韓國獨立, 信託統治, 金九, 李承晩, 南韓單獨政府, 中國言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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