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민족 담론의 역사적 실체 해명과 비판적 객관화. 민족과 국민국가가 발생하는 지점으로 돌아가 그 발생이 갖는 의의와 시대적 소명, 또 그 변동을 확인할 수 있다. 네이션 체제의 이완, 사회주의의 현실적 파산과 함께 역설적으로 확장된 이론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
첫째, 민족 담론의 역사적 실체 해명과 비판적 객관화. 민족과 국민국가가 발생하는 지점으로 돌아가 그 발생이 갖는 의의와 시대적 소명, 또 그 변동을 확인할 수 있다. 네이션 체제의 이완, 사회주의의 현실적 파산과 함께 역설적으로 확장된 이론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계와 이론의 유동성[液狀化]․불투명성에 대한 신경증적인 공포와 불안의 한 귀결로서 존재하는 것이 또한 오늘의 민족 담론이 아닌가 한다. 언문일치(언어학), 문자 선택, 번역(외국어), 공간적 곤란(컨텍스트의 외부성)과 역사주의의 압박과 같은 논제들이 포함하는 간학제적(間學制的) 난점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연구해야 하는 의의와 활용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문명의 전환기야 말로 지금 흔들리는 문명의 기원에 다가가야할 이유가 된다.
둘째, 개념 발생과 유통의 문화사로서 활용될 수 있다. 문명, 문화, 국가, 민족, 국어, 국문, 정체성, 재현 이 모든 말이 번역어로서 생성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개념의 발생과 유통 자체가 근대 문명의 이해와 수용사의 표면을 이루고, 그 번역의 논리가 태도의 심연을 보여준다.
셋째, 문학사적 의의로서 개화, 개항기 문학의 연구에 활용될 수 있다. 최근 갑오경장에서 ‘경술국치’까지의 역사적 격변기에 대한 연구들이 적잖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개항에서 개화에 이르는 시기에 대한 문학적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며, 이를 문화의 정치학으로 펼쳐나가는 것은 따라서, 중요한 인문학적, 국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
본 연구는 결국 개화 공간의 견문 양식에 드러나는 표상 체계, 재현 체계의 변동들에 관한 이해라는 지평에서 출발한다. 눈에 보이는 차원의 근대, 눈으로 본 차원의 문명은 어떠한 것이었고, 어떻게 서술되고, 판단되었는가. 외국어를 주리격설(亻朱離鴃舌)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하고, 의사소통의 체계를 신성한 묵어(漢文)로 한정짓는 통념은 만국 체계 속에서 요구되는 네이션 재현의 필요와 함께 점차 의심되기 시작했다. 가장 뚜렷한 일례로, 외교적 구어 상황․타자의 언어들 속에서 진문이 한문으로 한문이 한자로 한자가 중국의 글자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어가 있었고, 또한 그 뒤에 영어가 있었다. 그것은 일단 정치적 문자와 눈에 보이는 문명의 산물, 표상 공간으로 도착했고, 그 위에서 그것을 서사화하는 방식으로 문학이 시작되었다.
순종성의 상징인 민족과 그 공론적 장을 표시하는 국민은 그러니까 근대 네이션의 재현, 다언어적 세계의 배치물, 간문화적 재현의 결과로서 시작되었다. 통공간적 이동이 표상의 이동을 가능하게 했다. 근대 네이션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그것의 매개이자 타자성의 발견이 먼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절대적 타자의 등장이 절대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요청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 대표 간의 대화 상황, 간문화적 얽힘으로 먼저 경험되었다는 의미에서 ‘국민’보다는 ‘국가’를 우선적으로 매개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들어온 단일한 국민이라는 개념은 점차 신문이나 연설과 같은 공론장의 형성을 통해 점차 국가와 구별할 수 없는 동체가 되었고, 마지막으로 문화 개념으로서의 민족이 네이션의 기표(nation)에 합류했다.
타자 체험과 자기 재현의 문제를 언급하며, 가장 선명한 사례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언어의 문제이다. 근대 네이션과 내셔널 랭귀지 자체가 일단은 내적인 부분보다는 외적인 부분, 타자에의 경험을 통해 먼저 알려졌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될 필요가 있다. 네이션을 최소 단위로 하는 만국 체제 속에서 제대로 된 일개 국가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외적으로라도 근대 네이션이라는 국가 양식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찬가지로, 외교적 구어 상황이란 그것을 재현하는 국어 즉 내셔널 랭귀지의 확보의 필연적으로 요구했다 할 것이다. 가장 혼종적인 장소로서의 항해의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를, 또 그가 소속된 정치체를 외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틀로서 조선인, (독립국인) 조선국, 조선글이라는 새로운 표상 체계를 시험하게 되었다. 그 과정의 장면화된 해명은, 정치사, 문학사, 외교사, 사학, 민족지, 비교문명사 연구에 폭넓게 참조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