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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유럽합중국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빅토르 위고의 유럽합중국 | 2005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전수연(연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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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04
선정년도 2005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7년 01월 08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849년 8월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평화회의 개막연설에서 빅토르 위고는 유럽합중국을 주창했다. 위고가 이 용어를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유럽합중국 이념의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국경 없는 하나의 유럽을 주창한 이도 위고만이 아니었지만 19세기의 어떤 작가도 정치인도 투사도 그만큼 열정적으로 유럽합중국의 복음을 전한 전도사는 없었으니 20세기 후반의 유럽 건설자들이 위고를 유럽의 아버지로 칭송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1849년은 위고의 정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점이긴 하나 그의 유럽적 사고는 1820년대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827년에 발표한 시 「방돔 광장의 원주에게」에서 이미 그는 나폴레옹의 제국을 찬양했다. 과거 황제들을 찬양하고 있는 󰡔크롬웰󰡕(1827)부터 󰡔성주들󰡕(1843)에 이르는 다수의 사극 작품에서도 사실상의 주인공은 나폴레옹이었다. 그러나 위고의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아니었다. 복고왕정 말기와 7월왕정기 위고는 그의 유럽적 사고를 표상하기 위해 황제라는 형상을 이용했을 따름이다. 낭만주의 사극이란 국민적 주제를 다루어 다양한 사회계층을 하나의 공동체 속에 융합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스탈 부인이나 프랑수아 기조의 주문과는 달리 위고의 사극은 정반대로 국가라는 좁은 울타리를 파괴하고자 했다.
    위고는 카멜레온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열렬한 정통왕조주의자였다가 보나파르트주의자로 변신했으며, 또 다시 공화주의 투사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러나 위고의 겉모습에 어떤 꼬리표를 붙이더라도 내용적으로 그는 변함없는 유럽주의자였다. 제국도 공화국도 하나의 유럽을 위한 것이었다. 유럽 통합을 위해서는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와 협조가 필수라는 기본 전제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고의 유럽관은 사실상 그의 극단적인 프랑스 중심주의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열망했던 위고에게 유럽은 프랑스의 확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진전과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유럽의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닌 수많은 위고들의 자국중심주의적 사고일지도 모른다.
  • 영문
  • At the International Peace Congress held in Paris in August 1849, Victor Hugo exposed his vision of the seminal idea of the United States of Europe. Although it was not Hugo who coined the expression, he played a decisive role in its dissemination both in France and Europe. No one announced the advent of Europe with as much constancy and conviction as Victor Hugo among writers of his century. Indeed he is considered the most lyrical champion of European union.
    Even though 1849 was a crucial and determining year in Hugo's political evolution, his idea of a United Europe can be traced back to the late 1820s. In his ode A la Colonne de la place Vendô̂me (1827) Hugo glorifies the Napoleonic Empire whose memory was maintained throughout this period and beyond by the continued development of the Napoleonic myth. Even in those historical dramas from Cromwell (1827) to Les Burgraves (1843) which evoke the greatness of past Emperors, the main protagonist is Napoleon. Hugo's Napoleon, however, is not a French national hero. During the late Restoration and the July Monarchy Hugo made use of the figure of the Emperor to represent the European idea. He chose for his theatre European themes to the detriment of national subjects, as proposed by Germaine de Staël or by François Guizot, which could gather the various classes of the nation in a same national community.
    Hugo was a chameleon. Ardent legitimist when he was young, Hugo changed, first into a fervent Bonapartist, only later still, to become a militant Republican. The label may have changed, but the content of his European idea has remained basically the same: the process of the building of Europe depends on Franco-German collaboration. But this was not to be an equal partnership, because in Hugo's united Europe France should be the first among nations and the new European language would be French. In fact his Europe seems nothing but a Grand Nation France. Furthermore, Hugo's most cherished desire was to extend France's cultural hegemony to the entire world. What his European vision represents is actually his extreme Francocentrism, a latent form of imperialism.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849년 8월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평화회의 개막연설에서 빅토르 위고는 유럽합중국을 주창했다. 유럽합중국 이념의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위고는 20세기 후반의 유럽 건설자들에 의해 유럽의 아버지로 칭송받고 있다. 그의 유럽적 사고는 182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827년에 발표한 시 「방돔 광장의 원주에게」에서 이미 그는 나폴레옹의 제국을 찬양하기 시작했고, 󰡔크롬웰󰡕(1827)부터 󰡔성주들󰡕(1843)에 이르는 다수의 사극 작품에서도 사실상의 주인공은 나폴레옹이었다. 그러나 위고의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아니었다. 복고왕정 말기와 7월왕정기 위고는 그의 유럽적 사고를 표상하기 위해 황제라는 형상을 이용했을 따름이다. 낭만주의 사극이란 국민적 주제를 다루어 다양한 사회계층을 하나의 공동체 속에 융합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스탈 부인이나 프랑수아 기조의 주문과는 달리 위고의 사극은 정반대로 국가라는 좁은 울타리를 파괴하고자 했다.
    젊은 시절 그는 열렬한 정통왕조주의자였다가 보나파르트주의자로 변신했으며, 또 다시 공화주의 투사로 노선을 바꾸었지만 위고는 변함없는 유럽주의자였다. 그러나 위고의 유럽관은 사실상 그의 극단적인 프랑스 중심주의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열망했던 위고에게 유럽은 프랑스의 확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진전과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유럽의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닌 수많은 위고들의 자국중심주의적 사고일지도 모른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9세기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위고는 혁명과 반동의 이 세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하고 그 가운데에서 불멸의 작품들을 남겼다. 예술가일 뿐 아니라 투사였고 정치가이기도 했던 위고의 작품에서 19세기의 혁명적 움직임을 감지해 낼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복고왕정말기와 7월왕정기에 집필된 그의 사극 작품은 위고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감지해 낼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된다. 본 연구는 역사학이 문학에 적극적으로 다가가 생산적인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려주려고 노력했다.
    직접적으로는 과거 유럽의 황제들을, 간접적으로는 나폴레옹을 찬양하고 있는 󰡔크롬웰󰡕(1827)부터 󰡔성주들󰡕(1843)까지 그의 사극 작품에서는 유럽제국에 대한 그의 꿈을 읽어낼 수 있다. 1849년 그는 공화주의자로 변모하지만 유럽주의자로서의 면모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유럽제국에서 유럽합중국으로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다. 이 논문은 빅토르 위고라는 19세기의 한 유럽주의자를 통해 현재 진행 중인 유럽의 문제에 접근해 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위고를 비롯하여 19세기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던 민족주의와 유럽주의의 충돌과 갈등이 현재에도 해소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가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좀 더 넓고 개방적인 공동체를 기획하고 있는 21세기 초의 우리들은 유럽의 어려운 진전의 발걸음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프랑스와 유럽의 어제와 오늘은 그들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우리에게 교사이자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기조, 나폴레옹, 뒤마, 라 로슈푸코, 라비스, 라이히슈타트, 루게, 리슐리외, 마치니, 맥케이, 미슐레, 민족주의, 뱅빌, 버릿, 베커, 보나파르트, 복고왕정, 생시몽, 샤를 10세, 샤를마뉴, 셰익스피어, 스탈 부인, 아우스터리츠, 알렌, 위고, 유럽제국, 유럽합중국, 유로, 지라르댕, 7월왕정, 카를로스(카를), 카타네오, 콥던, 크롬웰, 티에르, 프랑수아 1세, 프리드리히 1세, 플랑슈, 필립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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