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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06935&local_id=10011666
조선전기 광주 순백자에 관한 연구
Reports NRF is supported by Research Projects( 조선전기 광주 순백자에 관한 연구 | 2004 Year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이희경(서울대학교) ) data is submitted to the NRF Project Results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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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G00008
Year(selected) 2004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06년 06월 30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06년
Research Summary
  • Korean


  • 본 연구결과 도출된 결론은, 첫째, 조선초왕실이 白瓷라는 중요 그릇을 어기 및 제기로 선택하는 배경에는 明 皇室의 경우를 모델로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같이 명의 경우를 따른 배경에는, 정치적 상황 및 對明外交 關係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나타난다. 성리학자 관료들은 친명정책을 추구하였다. 명은 漢族이 세운 국가이며 儒敎인 性理學을 기치로 내건 中華국가로서 적법성과 정통성을 띠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러한 관료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조선의 정책은 많은 부분에서 명의 모델을 좇게된다. 易姓革命의 과정에서 조선 태조는 명의 권위를 빌려 새로운 왕조에 합법성을 부여할 필요를 느꼈으나, 국초부터 명은 이씨 왕조의 적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금,은 歲貢을 요구한 상황에서 외교적 고려는 왕실 그릇의 사용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외교적 상황으로 인하여 조선은 명과의 의전관계에서, 儒敎的 身分構造 내에 맞도록 禮의 균형을 잡는 문제에 고도로 신경을 쓰게되었다. 이때 명황실에서는 어기는 물론 제전의 제기의 상당부분을 백자기로 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은 매우 유능한 정치가로서 명과의 외교적 관계를 성공적으로 개선시켰다. 王室儀禮에 대한 편찬은 세종하에 가속화되었다. 왕실의 중요제전인 文昭殿의 백자기 채택 및 여타 제전의 제기 채택은 이러한 조선과 명의 관계 및 당시 동아시아 국제 외교적 상황과 유교적 질서를 세심하게 고려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둘째, 廣州 백자요지 출토 도편의 분석결과이다. 지면의 한계상, 현재 발굴이 되어있고 가장 대표적인 요지로 여겨지는 도마리에 대한 본연구의 분석결과를 한례로 살펴본다

    반출된 干支銘, 중국청화도편의 양식, 출토 광주도편의 기형양식 및 도편의 유구조 분석을 종합하여 편년한 결과, 도마리의 경우, 반출 중국도편의 문양양식, 안료 특성면에서 중국 成化年間의 특징, 그리고 하한으로는 正德年間의 특징까지도 보이고 있는데, 한편으로 양식적, 제법적 특성면에서는 중종 前半년간까지 하한이 내려갈 수 있는 특징들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의 결과로는 성종 후반년간- 중종 前半년간 까지에 걸치는 시기가 도마리의 존속시기로서 대체로 고급품질의 백자가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이 시기라고 추정된다. 16세기 중. 후반으로 편년되는 요지에서는 다소 간의 질적 쇠퇴가 관찰된다.

    위에서 소개한 필자의 예제적 접근결과와 필자의 요지도편 분석결과를 비교시 세종년간에 어기, 일부 제전의 그릇 등 제한된 곳에 사용되던 백자기가 15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궐내의 여러 종류의 제기로서 용도가 확대되었다가 중종-명종년간 사이에 다시 이들 제기가 상당량 다시 유기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발견된다. 한편, 16세기의 광주요지는 명의 경우와는 달리 순백자를 더 많이 생산하였고, 釉下彩자기의 경우 역시, 공예의장화된 장식화에서 소재를 따온 명의 자기양식과는 다르다. 문인화풍의 필치로 그린 문양위주이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와같이 독자적 양상을 보이는 이유는, 이시기에는 명나라로부터의 은세공 요구가 이미 사라졌고, 대명관계에서의 긴장은 더욱 이완되었으며 조선전기에 그랬던 것 만큼 조선왕실에서 명을 적절한 유교적 실천의 모델로서 여기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과 큰 관련이 있다. 명의 황실은 성리학적 실천의 엄격성을 잃고 점차 유약하고 퇴폐적으로 변했던 반면 조선왕실의 경우 16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이념면에서는 性理學이 왕실 및 학자관료층에 더욱 뿌리를 깊게 내렸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는, 적어도 궁중 도자의장에 있어서 명의 예를 본받을 필요가 없이 독자적인 의장을 결정해서 쓰게 된 배경중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발전한 조선기술은 일본에 전파되어, 有田窯에서는 古染付를 만들어 유럽을 포함한 외국에 무역을 하여 굴지의 자기국가로서 발돋움한다. 주지하다시피 백자제법은 조선도공 이참평이 17세기초 백토광산을 발견하면서 전파될 수 있었으나, 자기의 문양은 일본에 전래되어 있던 조선전기의 회화, 특히 南畵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 English
  • This study explores specific processes through which white porcelain wares were adopted as a type of important vessel at the royal court of the early Choson dynasty, particularly from the reign of King Sejong, and transmitted the manufacturing technique to Japan.

    First of all, the author approaches the process of the adoption of white porcelain wares, in terms of Confucian-style rites practised in the state ceremonies and at the royal court. An important consideration is the political relationship between Choson and Ming. These two states based their diplomatic relations on Confucian rites.

    To enhance the position of the Ming in international relations, Hongwu Emperor constructed an international order with an emphasis on discriminating rites between the Ming and the surrounding countries by using Confucian rituals. In this ritual system, the surrounding countries were evaluated on the basis of hierarchy under the Ming which was placed at the top. From the beginning of the newly established Choson dynasty, Neo-Confucian officials were dependent on the authority of, and had close diplomatic relationships with, the newly- born Ming dynasty. Government policies were pursued in line with Ming political and administrative models, driven by the influence of Neo-Confucian scholar-officials. As widely known, in the course of usurping, the first sovereign of the Choson dynasty, Yi Song-kye needed to confer legitimacy on the authority of the new dynasty in China, Ming. Yet, from the beginning, Ming never easily acknowledged the legitimacy of Yi. This difficult relationship appears to have driven Choson to pay extra attention to handling the matter of balancing rites and etiquette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the context of an international hierarchy defined in Confucian terms. In particular, King Sejong was a highly competent politician who successfully improved the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Ming emperors. Research and compilation of royal rituals were accelerated under King Sejong. The king, while being extremely careful to practise the rites which fit to the position of Choson in the Confucian world order, but also aimed at keeping pace with the trend of contemporary Ming etiquette in details. He paid a great attention to not being behind the trend of the time and to be seen to be as equally sophisticated and refined as, if not superior to, China in conducting rites. This is because, as mentioned above, he desired to achieve Choson's own authority and to receive respect in the international society.

    Scholarly attention has hardly been paid to the types of wares employed in the similar functions in later periods, probably under the premise that the situation continued. This research shows how gold, silver and brass vessels again replaced white porcelain wares of important functions inside the royal house, and how the use and value of white porcelain wares began to rapidly shift particularly from sometime between the late 15th and early 16th centuries. Based upon the author's results of the specific date attribution and analysis of Kwangju kiln sherds from the 15th and 16th centuries, it further examines how the types and styles of Choson underglaze white porcelain wares, underglaze blue and underglaze copper red wares from the 16th century evolved showing Choson's own characteristics. It also exam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is shift, and political and ideological elements, as well as economic conditions of the society. Thus, this study evidences how the shift exercised a significant influence on the evolution of white porcelain wares during the 15th and 16th centuries. Finally, this study shows that it was the fabulous combination of the early Choson painting style previously transmitted to Japan and the manufacturing technique of white porcelain wares that played an important role in achieving the unique feature of the world-famous ko-imari.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본 연구에서는,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치는 朝鮮前期 京畿道 廣州제작의 純白瓷의 기형과 제법을 분석하면서, 이들이 中國 明初의 순백자기로부터 어떤 영향을, 왜 받았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받았는지, 이후 어떠한 독자적 전개를 보였가를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일본의 아리타 백자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인가에 관하여서까지도 고찰한다.

    첫 번째 작업으로서 조선전기 광주백자의 제작양상에 대해서 고찰한다. 생산 백자의 기형양식 및 제법, 특히 유의 상태를 분석하고 이를 절대 및 상대편년 자료들과 비교함으로써 조선전기 광주요의 편년을 시도한 후, 이 결과를 바탕으로 조선전기 백자의 발달 상황을 생산양, 기종 및 기형양식, 시유된 유의 양상, 백자의 질면에서 파악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광주 순백자가 청화백자와, 철화백자와는 기형, 제법면에서 어떠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하는가를 고찰한다. 두 번째 작업으로서는, 왕실의 의례제도에 대해서 고찰한다. 우선, 조선전기 왕실의 의례와 기명사용의 관계, 조선왕실 기명과 관련된 의례를 복원한다. 다음으로는, 조선전기 대중관계 및 사회적 환경을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의례적 배경 하에 새롭게 명의 양식을 수용하고 조선의 독자적 전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과정을 분석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광주 순백자가 에도시대 백자생산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이러한 영향과정을 가능케 할 수 있었던 사회 배경을 살펴본다.

    본 연구 결과, 첫째, 조선초왕실이 白瓷를 어기 및 제기라는 중요그릇으로 선택하였고 이는 明 皇室을 모델로 한 것이며, 이와같이 명의 경우를 따른 배경에는, 對明外交 關係를 의식한 儒敎儀禮에서 禮의 균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나타난다. 둘째, 廣州 백자요지 출토 도편의 분석결과, 성종 후반년간- 중종 前半년간 까지에 걸치는 시기가 도마리의 존속시기로서 대체로 고급품질의 백자가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이 시기라고 추정된다. 이를 기준으로 해서 여타 주요 요지를 편년한 결과의 기반에서 살펴보면, 釉下彩자기에 비해서 순백자가 궁중기명에서 차지하는 비율, 기형, 기종, 유의 양상, 유상채의 경우 문양 등에 있어서 조선의 독자적 생산양상은 이미 15세기로부터 시작되어 16세기 중. 후반으로 부터는 더 두드러진다. 이와같이 독자적 양상을 보이는 이유는 이시기에는 이미 대명긴장관계가 매우 완화된 상태였고, 조선왕실의 경우, 점차 유약해지는 명황실의 경우와 달리, 16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이념면에서는 性理學이 왕실 및 학자관료층에 더욱 뿌리를 깊게 내렸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추세는, 적어도 궁중 도자의장에 있어서는 해이해진 명의 예을 본받을 필요가 없이 독자적인 의장을 결정해서 쓰게 된 배경으로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분석된다. 이와같이 발전한 조선기술은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에 전파되었는데, 일본인들은 조선백자질과 같되, 문양면에서는 동시기의 조선유하채자기의 것과는 다른 古染付를 완성시키게 된 배경은, 일본의 경우에는 조선 백자제법에 더해서, 장식문양으로는, 이미 전래되어 있던 조선전기 회화를 백자기면위에 적절히 포치하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본 연구결과 도출된 결론은, 첫째, 조선초왕실이 白瓷라는 중요 그릇을 어기 및 제기로 선택하는 배경에는 明 皇室의 경우를 모델로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같이 명의 경우를 따른 배경에는, 정치적 상황 및 對明外交 關係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나타난다. 성리학자 관료들은 친명정책을 추구하였다. 명은 漢族이 세운 국가이며 儒敎인 性理學을 기치로 내건 中華국가로서 적법성과 정통성을 띠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러한 관료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조선의 정책은 많은 부분에서 명의 모델을 좇게된다. 易姓革命의 과정에서 조선 태조는 명의 권위를 빌려 새로운 왕조에 합법성을 부여할 필요를 느꼈으나, 국초부터 명은 이씨 왕조의 적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금,은 歲貢을 요구한 상황에서 외교적 고려는 왕실 그릇의 사용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외교적 상황으로 인하여 조선은 명과의 의전관계에서, 儒敎的 身分構造 내에 맞도록 禮의 균형을 잡는 문제에 고도로 신경을 쓰게되었다. 이때 명황실에서는 어기는 물론 제전의 제기의 상당부분을 백자기로 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은 매우 유능한 정치가로서 명과의 외교적 관계를 성공적으로 개선시켰다. 王室儀禮에 대한 편찬은 세종하에 가속화되었다. 왕실의 중요제전인 文昭殿의 백자기 채택 및 여타 제전의 제기 채택은 이러한 조선과 명의 관계 및 당시 동아시아 국제 외교적 상황과 유교적 질서를 세심하게 고려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둘째, 廣州 백자요지 출토 도편의 분석결과이다. 지면의 한계상, 현재 발굴이 되어있고 가장 대표적인 요지로 여겨지는 도마리에 대한 본연구의 분석결과를 한례로 살펴본다

    반출된 干支銘, 중국청화도편의 양식, 출토 광주도편의 기형양식 및 도편의 유구조 분석을 종합하여 편년한 결과, 도마리의 경우, 반출 중국도편의 문양양식, 안료 특성면에서 중국 成化年間의 특징, 그리고 하한으로는 正德年間의 특징까지도 보이고 있는데, 한편으로 양식적, 제법적 특성면에서는 중종 前半년간까지 하한이 내려갈 수 있는 특징들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의 결과로는 성종 후반년간- 중종 前半년간 까지에 걸치는 시기가 도마리의 존속시기로서 대체로 고급품질의 백자가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이 시기라고 추정된다. 16세기 중. 후반으로 편년되는 요지에서는 다소 간의 질적 쇠퇴가 관찰된다.

    위에서 소개한 필자의 예제적 접근결과와 필자의 요지도편 분석결과를 비교시 세종년간에 어기, 일부 제전의 그릇 등 제한된 곳에 사용되던 백자기가 15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궐내의 여러 종류의 제기로서 용도가 확대되었다가 중종-명종년간 사이에 다시 이들 제기가 상당량 다시 유기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발견된다. 한편, 16세기의 광주요지는 명의 경우와는 달리 순백자를 더 많이 생산하였고, 釉下彩자기의 경우 역시, 공예의장화된 장식화에서 소재를 따온 명의 자기양식과는 다르다. 문인화풍의 필치로 그린 문양위주이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와같이 독자적 양상을 보이는 이유는, 이시기에는 명나라로부터의 은세공 요구가 이미 사라졌고, 대명관계에서의 긴장은 더욱 이완되었으며 조선전기에 그랬던 것 만큼 조선왕실에서 명을 적절한 유교적 실천의 모델로서 여기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과 큰 관련이 있다. 명의 황실은 성리학적 실천의 엄격성을 잃고 점차 유약하고 퇴폐적으로 변했던 반면 조선왕실의 경우 16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이념면에서는 性理學이 왕실 및 학자관료층에 더욱 뿌리를 깊게 내렸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는, 적어도 궁중 도자의장에 있어서 명의 예를 본받을 필요가 없이 독자적인 의장을 결정해서 쓰게 된 배경중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발전한 조선기술은 일본에 전파되어, 有田窯에서는 古染付를 만들어 유럽을 포함한 외국에 무역을 하여 굴지의 자기국가로서 발돋움한다. 주지하다시피 백자제법은 조선도공 이참평이 17세기초 백토광산을 발견하면서 전파될 수 있었으나, 자기의 문양은 일본에 전래되어 있던 조선전기의 회화, 특히 南畵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 Index terms
  • 백자, 조선전기, 명, 왕실, 대명외교, 유교, 왕실의례, 제기, 어기, 광주, 기형양식, 문양양식, 유구조, 금, 은, 성리학, 일본, 유전요, 백자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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