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에서는,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치는 朝鮮前期 京畿道 廣州제작의 純白瓷의 기형과 제법을 분석하면서, 이들이 中國 明初의 순백자기로부터 어떤 영향을, 왜 받았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받았는지, 이후 어떠한 독자적 전개를 보였가를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일본의 아리타 ...
본 연구에서는,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치는 朝鮮前期 京畿道 廣州제작의 純白瓷의 기형과 제법을 분석하면서, 이들이 中國 明初의 순백자기로부터 어떤 영향을, 왜 받았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받았는지, 이후 어떠한 독자적 전개를 보였가를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일본의 아리타 백자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인가에 관하여서까지도 고찰한다.
첫 번째 작업으로서 조선전기 광주백자의 제작양상에 대해서 고찰한다. 생산 백자의 기형양식 및 제법, 특히 유의 상태를 분석하고 이를 절대 및 상대편년 자료들과 비교함으로써 조선전기 광주요의 편년을 시도한 후, 이 결과를 바탕으로 조선전기 백자의 발달 상황을 생산양, 기종 및 기형양식, 시유된 유의 양상, 백자의 질면에서 파악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광주 순백자가 청화백자와, 철화백자와는 기형, 제법면에서 어떠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하는가를 고찰한다. 두 번째 작업으로서는, 왕실의 의례제도에 대해서 고찰한다. 우선, 조선전기 왕실의 의례와 기명사용의 관계, 조선왕실 기명과 관련된 의례를 복원한다. 다음으로는, 조선전기 대중관계 및 사회적 환경을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의례적 배경 하에 새롭게 명의 양식을 수용하고 조선의 독자적 전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과정을 분석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광주 순백자가 에도시대 백자생산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이러한 영향과정을 가능케 할 수 있었던 사회 배경을 살펴본다.
본 연구 결과, 첫째, 조선초왕실이 白瓷를 어기 및 제기라는 중요그릇으로 선택하였고 이는 明 皇室을 모델로 한 것이며, 이와같이 명의 경우를 따른 배경에는, 對明外交 關係를 의식한 儒敎儀禮에서 禮의 균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나타난다. 둘째, 廣州 백자요지 출토 도편의 분석결과, 성종 후반년간- 중종 前半년간 까지에 걸치는 시기가 도마리의 존속시기로서 대체로 고급품질의 백자가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이 시기라고 추정된다. 이를 기준으로 해서 여타 주요 요지를 편년한 결과의 기반에서 살펴보면, 釉下彩자기에 비해서 순백자가 궁중기명에서 차지하는 비율, 기형, 기종, 유의 양상, 유상채의 경우 문양 등에 있어서 조선의 독자적 생산양상은 이미 15세기로부터 시작되어 16세기 중. 후반으로 부터는 더 두드러진다. 이와같이 독자적 양상을 보이는 이유는 이시기에는 이미 대명긴장관계가 매우 완화된 상태였고, 조선왕실의 경우, 점차 유약해지는 명황실의 경우와 달리, 16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이념면에서는 性理學이 왕실 및 학자관료층에 더욱 뿌리를 깊게 내렸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추세는, 적어도 궁중 도자의장에 있어서는 해이해진 명의 예을 본받을 필요가 없이 독자적인 의장을 결정해서 쓰게 된 배경으로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분석된다. 이와같이 발전한 조선기술은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에 전파되었는데, 일본인들은 조선백자질과 같되, 문양면에서는 동시기의 조선유하채자기의 것과는 다른 古染付를 완성시키게 된 배경은, 일본의 경우에는 조선 백자제법에 더해서, 장식문양으로는, 이미 전래되어 있던 조선전기 회화를 백자기면위에 적절히 포치하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