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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 遼東지역의 農具와 農業기술--牧農의 접점과 관련하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古代 遼東지역의 農具와 農業기술--牧農의 접점과 관련하여-- | 2004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최덕경(부산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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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번호 A00043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5월 23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요동지역은 그런 점에서 수많은 민족이 이합집산과 정치세력의 교체가 거듭되었던 곳이다. 전국시대 이후 燕의 세력권이었던 遼東이 漢 武帝의 東進정책으로 군현에 의해 직접적인 지배가 전개되면서 고구려와의 세력범위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본고는 요동지역의 농업실태를 통해 당시의 세력판도를 파악해보고 한다. 그 방법으로 기존과 같이 민족의 이동으로 국가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은 종족을 대상으로 하기보다 당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인 농업의 물질자료를 대상으로 하였다. 다시 말해 戰國, 秦漢시대 요동에서 출토된 농업 생산수단과 농업실태를 분석하여 그 문화적 영향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산수단이나 동반출토유물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 새로운 文化의 移入과 發展을 살피려는 것이다.
    특히 고대 요동지역의 경우 일찍부터 靑銅 무기와 農, 工具類가 많이 출토되는 것은 물론이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생산수단이 鐵器로 대체되면서 遼東지역에 대한 외부의 정치적인 세력도 확대된다.
    戰國시대 이후 청동기와는 달리 鐵器는 中原 內地의 權力확대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철기의 출토지점이 이전의 청동기 출토지점과 지역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은 漢代의 권력기반이 기존의 토착세력을 장악하면서 동북지역 동쪽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철제농구의 형태변화를 통해 볼 때, 중원의 내지나 화북지역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 토착민이 내지의 文物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의미이다.
    물론 수용과정에서 철제농구의 형태변화도 수반되었을 것이다. 동북지역의 철기문화는 청동기와는 달리 농구에서 독자적인 문화가 발견되는 것은 동북의 동쪽 끝 高句麗 시대이다. 이는 集安에서 출토된 많은 철제 手農具의 형태가 鑄造보다 鍛造型이 많았으며, 자루 끼우는 부분이 단조로 제작되어 柄을 삽입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근래까지 한반도 남부의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독자적인 양식이었다. 이것은 동북의 토착문화가 어떤 지역에서 보전되었으며, 어떤 단계에 출현했는가를 잘 말해준다.
    아울러 이러한 농구형태의 변화를 통해 권력의 침투과정도 살필 수 있다. 현재까지 문헌사료의 부족으로 구제적인 실태를 파악하기 곤란했으나, 최근 출토되고 있는 진한시대 서북 邊境이나 중부 내륙지역의 竹簡자료를 보면 변경에 대한 지배가 상당히 철저했음을 살필 수 있다. 향후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영문
  • On that point, Liaodong is the place there were repeating shifts in the alignment of many nations and political authority. Direct ruling over Liaodong, Yan(燕)s' sphere of influence after Zhanguo period, began by system of commanderies(郡) and prefecture(縣) as Han Emperor Wu Di adopted the policy of proceeding east. Thus, Han's range of influence against Koguryo takes an important part
    This article is a study on the state of power through agriculture at that time. The study method is based on agricultural material data, which can be concrete traces of lives, unlike existing methods which have been based on nation of unclear location owing to racial migration. In other words, through analysis in excavated agricultural instruments, this study examines the cultural influences, and the changes in means of production or unearthed relic with time, and then researches into the influx and development of new culture.
    Especially, a lot of bronze arms and agricultural, industrial implements were unearthed in old Liaodong. In addition external political intervention was extended as iron ware substituted for bronze one in Chunqiuzhanguo(春秋戰國).
    After Zhanguo period, unlike bronze ware, iron ware was closely related with expansion of power in the interior of Zhongyun. The fact that the place iron ware was excavated is similar to one where bronze ware was means that the power of Han times was expanded to northeastern region, holding indigenous power.
    Especially, similarity of type change of iron implements in the interior of Zhongyun and Huabei region means that natives accepted the interior civilization actively.
    Naturally, there seemed to be the changes of their shapes in process of acceptance. In iron culture of the northeastern region unlike bronze culture, independent culture of agriculture implements has been discovered in Koguryo, the farthest area of northeastern. Forged iron implements were excavated much more in Jian than cast ones, and the hilt part made by forge was inserted into handle. It is an independent style which we could frequently find in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up to recently. It shows where the native culture of the northeastern region was preserved and at what stage it appeared.
    We can also know the penetration process of power through the changes in shapes of agriculture implements. Until now, to grasp the concrete situation has been difficult because of a shortage of record materials. But it seems that the control over the frontier was strict through zhujian(竹簡) materials in the northwestern frontier and the central inland during Qin-Han period. It will be necessary to approach concretely this subject hereafter.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고는 변경에 위치한 요동지역이 외부세력, 특히 중국 내지의 변화를 어떻게 수용했는가를 농구의 형태나 농업기술의 상황을 통해 살핌으로서 그 변화의 중심점과 외부세력의 접근성의 여부와 확산정도를 유추해보고자 한다.
    이때 요동지역의 토착민과 외부의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했을 것이며, 그러한 영향은 생산수단이나 농업기술에도 흔적을 남겼을 것으로 보인다. 출토되고 있는 철제농구의 형태나 동반 유물을 보면 자연 외부세력의 침투정도와 문화의 수용력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요동지역의 정치세력의 향방을 이해하는데도 크게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농업과 농업기술은 전통 속에서 배태된 것이기에 비록 삶의 질을 변화시킨다고 하더라도 수월성 때문에 낙후된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때문에 농업기술이나 생산수단의 변화가 보였다는 점은 외부세력의 강제가 있었거나 아니면 주민교체나 지역민의 기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철제농구의 보급과 형태분석을 통해 中原 내지 權力이 요동지역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어느 정도 살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中原지역이 기원전 천 년 전부터 유목민에 의해 서아시아에서 오아시스국가를 거쳐 청동기, 철기, 마차와 전술 등을 수용한 사례로 유추해보면,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소수민족은 西아시아의 각종 선진문화를 일정 정도 공유했다고 볼 수 있다.
    秦末漢初와 魏晉시대에 민족간의 이동이 활발해짐과 더불어 동북의 고조선, 고구려지역에도 中原에서 농업인구나 기술이 유입되고 문물의 교류가 증대되면서 농업활동이 점차 구체화되면서 경제의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했던 것 같다. 이것은 토지의 중요성과 함께 農牧境界線이 북쪽으로 다소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볼 때 동북지역 역사 발전에서 주요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던 요인은 서아시아 등 주변민족으로부터의 다양한 農牧문화의 수용과 더불어 漢四郡설치 이후의 중국문화의 유입이 동북의 토착농업과 잘 결합되어 이 지역의 生産性을 높였던 것 같다.
    토착문화의 기반 위에 동북지역의 농업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기친 것은 역시 금속기였다. 금속기 문화의 유입에 대해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을 거쳐 전래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전술한 古賀登의 지적이나 출토유물에서 보듯 서아시아로부터 농업기술과 군사기술이 유목민의 의해 유입되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동북은 이러한 서쪽으로부터의 농업기술을 근거로 주변 민족의 통합을 위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갖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钁, 鋤, 鎬 등의 起土용 농구는 發土 이외에 作條用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런 철제 手勞動농구와 함께 출토된 길림 集安부근에서 출토되었던 燕의 明刀錢이나 集安, 楡樹老河深墓地에 등장하는 漢代의 五銖錢 등은 중원과의 문화교류가 동북의 동쪽까지 깊숙하게 전달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동북지역의 鐵製농구가 각종 청동기문화와 마찬가지로 북방계 유목문화와 더불어 漢人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선사시대부터 농업을 영위해왔던 松花江, 嫩江 유역을 비롯한 각처에서 초기의 유목적인 원시농경방식 위에 北方 내지 西域의 농업기술이 첨가되고, 나아가 진한시대 이후 중원의 철제농구와 집약적 華北농업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동북의 풍토에 적합한 농업으로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농기구를 이용한 경작기술과 작무법이 파악되면, 토지활용이나 시비법과 같은 農作法도 검토 가능할 것이며, 그로 인해 生産力의 推移도 살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게다가 당시 요동지역에 근거했던 고구려에 桴京이라는 小倉이 존재했으며, 集安의 禹山墓區의 積石墓나 東台子遺蹟에서도 각종 陶倉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麻線一號墓 南側室에 그려진 倉廩 벽화는 일반 家戶의 小倉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비교적 거대한 干欄式 倉廩으로 규모로 미루어 많은 양식을 저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干欄式 倉廩은 지면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건축된 倉房으로 지금도 “苞米樓子”라고 한다.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수레는 인적, 물적 수송에 활용되었을 것이지만, 그 중 상당부분은 곡물의 생산과 운송에 활용되었다고 보면 생산력과 유통의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국시대 이후 청동기와는 달리 중원 내지의 權力확대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철기의 출토지점이 이전의 청동기 출토지점과 지역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은 한대의 권력기반이 기존의 토착세력을 장악하면서 동북의 동쪽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를 통해 동북지역의 농업실태를 파악하게 된다면 무엇보다 요동지역이 일정한 정체성을 지닌 채 강력한 세력을 성장할 수 있었던 경제적 토대를 밝힐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농업적 기반은 어떤 무엇보다 동북지역이 지닌 특수성을 밝히는데 주요하게 이용될 것이다.
    요동지역이 농경과 유목이란 양대 문명의 충돌지점이고, 전 중국역사의 진행과정에서도 견제와 두려움의 대상지역이었다는 점에서도 분명 농경의 漢문화나 遊牧문화와는 다른 요동문화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과거 중원중심, 華夷관념에서 벗어나 세계사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망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더구나 이 지역은 고조선이 출현한 한국 역사의 발원지이며, 이어서 등장하는 고구려는 韓 민족의 자존심이자 긍지 그 자체이다. 그런 점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성장토대와 아이텐티티를 밝히는데 일조할 것으로 판단된다.
    게다가 고구려의 南下는 바로 양대 문화의 우수성을 한반도에 이식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특히 동북지역의 旱田 농법이 한반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한반도 農法"으로 정착하는데 기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연구를 통해 이제까지 자료의 한계로 인해 체계적인 접근이 곤란했던 고대 요동지역의 농업사, 한국사의 입장에서 볼 때 고구려 농업사를 밝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西域史와 별개로 한반도를 포함한 "요동사(東北史)"도 중국중심이 아닌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 색인어
  • 요동, 철제수농구, 농목, 토지의 관리, 동북농업, 요동리,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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