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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07182&local_id=10012122
중간자적 존재로서의 임나일본부
Reports NRF is supported by Research Projects( 중간자적 존재로서의 임나일본부 | 2004 Year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정효운(동의대학교) ) data is submitted to the NRF Project Results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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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A00056
Year(selected) 2004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06년 05월 18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06년
Research Summary
  • Korean
  • 531년 筑紫君磐井의 야마토왕권에의 항복과 532년의 金官加耶의 新羅에의 투항은 「古代韓․日地域世界」의 재편을 가져왔다. 특히 任那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던 「倭宰」집단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왕권의 신라 歸附에 반발하여 인접한 安羅나 対馬 등의 섬들로 거점을 옮겨 540년까지 신라와 전쟁을 하면서 任那復興運動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군사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百済에게 원조를 구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백제에 접근하여 倭왕권의 의지가 任那의 부흥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협력을 해준다면 倭王権으로부터 군사 협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속인 결과, 541년 4월에 百済에서 「第一次任那復興会議」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新羅와 通謀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백제의 군사력을 이용하려 하였지만, 百済는 加耶諸国을 지배하려는 정치적 의도 있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任那 부흥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실제적인 군사 행동에는 나서지 않았다. 이에 「倭宰」집단은 재차 己麻奴跪를 보내어 倭王의 의사인 것처럼 하여, 百済가 점령하고 있던 下韓의 百済郡令과 城主를 자신들의 휘하에 귀속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倭宰」집단의 외교정책은 백제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百済는 서서히 「倭宰」집단이 전해주는 정보에 의문을 가지고 사실 확인을 위해 조사하려고 加耶諸国과 「倭宰」을 소집하였지만 사실이 밝혀질 것을 두려워 한 「倭宰」는 핑계를 대며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 정보원의 배경에는 「倭宰」였던 吉備臣․加不至費直․阿賢移那斯․佐魯麻都 등의 인물이 관여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린 백제는 그들을 임나에서 추방하려 하였다. 그래서 백제는 직접 왜 왕권에 사신을 보내어 정보의 신빙성을 확인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백제는 왜 왕권의 정치적 의도가 임나의 부흥보다는 선진문물의 입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서서히 百済王権으로부터의 선진문물과 우수한 인적 집단의 제공과, 倭王権으로부터의 병력 제공에 의한 협력 체제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安羅에 있던 「倭宰」집단과 加耶諸国의 反百済 움직임을 방지하기 위해 동시에 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544년에는 허울뿐인 「제 2차 任那復興会議」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백제 왕권과 왜 왕권의 직접적인 정보교류 루트가 성립됨에 따라 전자의 군사적 요구와 후자의 선진 문물 입수라고 하는 양 왕권의 의사를 파악하여 그 가운데서 임나 부흥이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던 「중간자적 존재」로서의 「倭宰」집단의 염원은 성취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신라를 포함하여 당시의 국가들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후 왜와의 교섭 주도권은 백제가 장악하게 되어 「倭宰」집단은 백제왕권의 영향력 하에 두어지고 서서히 자립적인 기능을 잃어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 English
  • So-called "Mimananihonhu" is a term looking like "only Kimmeki" except an example. Therefore, though should have interpreted the historic positioning in dynamics relations of the politics situation of "the area world with "the East Asia area world" in the middle on Korea day" in the sixth century, it was thought that was the engine which carried out the will faithfully in an influence bottom of Yamato sovereignty as far as watched history of study; it seems that came. There was the time when it was placed when it was the engine which governed "Mimana" of a wide sense once. I am becoming a tendency to take the influence of Yamato sovereignty thin, but it is still understood intention of Yamato sovereign as the existence that Kudara can stream down now. Why is it necessary Yamato sovereign ignores a faithful friend and sends a messenger to direct Kudara, and to negotiate if such a viewpoint is right In addition, I do not dispatch a messenger for Yamato sovereign from "Mimananihonhu" either. In that case, on earth what kind of person was "Mimananihonhu" in a royal edict of Yamato sovereign is rather conveyed through Kudara by "Mimananihonhu" as far as I just believe historical materials. A problem is not only it. What was it that Yamato sovereign was going to get through "Mimananihonhu" A political purpose of reconstruction in Kaya demands ruined "Mimana" and "Mimananihonhu" is not seen for the reliable trace that worked for profit of Yamato sovereign either. Why will be it that it has been understood with examination about such problems being unknown
     Judging from such a meaning, recognition common to "sense of history of modern times one-country-one-nation" and "an idea of legal codes nation" may be said to be Yamato sovereignty center sense of history. Would not these recognition give big influence to interpretation of conventional "Mimananihonhu" either However, it seems that conversion of a viewpoint came to be seen in a direction of a recent study in Japan. There is it towards independence of will of the other country and a direction making much of viewpoint characteristics. In other words it is a viewpoint to "East Asia". On the other hand, the various area world of "the world local on Korea day" or "the Korea middle area world" is overlap in "the East Asia area world" and coexist. I think that there is the core of a problem how you evaluate substance of so-called "middle existence" that you bound together between these local world intervals, the sovereignty that there was in each local world again.
     When watched historical materials concerned, a problem of "Mimananihonhu" was described mainly on Kudara sovereignty and Yamato sovereign but, actually, various countries in Kaya and Silla sovereignty picked quarrel; when is a political issue of "the area world on Korea day", may watch it. It was separated in the sea and, from interest to the existence that I bound together between groups of politics of "the area world on Korea day" that words had constitution of a different family toward, tried to elucidate a problem of "Mimananihonhu" as keyword with "sea area" and "words" and two to say.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이른바 「任那日本府」․「日本府」라는 것은 한 예를 제외하고는 『日本書紀』의 「欽明紀」 밖에 보이지 않는 용어이다. 따라서 그 歴史的 자리매김에 대해서는 6세기 중반의 「동아시아 지역세계」와 「한․일 지역세계」의 정치 상황의 역학 관계 가운데서 해석하여야함에도 불구하고 연구사를 살펴보면 야마토 왕권의 영향 아래에서 그 의사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기관이었다고 생각되어진 주장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견해는 「任那日本府」의 연구가 학문적인 영역보다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満鉄」의 자금에 의해 당시의 帝国主義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당시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의 합병을 합리화하기 위해 바꾸어 말하자면 왜 왕권에 의한 고대 한반도 남부의 영유라고 하는 대전제를 입증하기 위해 「任那日本府」 문제도 교묘하게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8세기 일본 律令国家의 주변 제국에의 蕃国視 사상 즉, 야마토 왕권의 일방적인 이념적 타자관념을 나타내고 있는 『日本書紀』를 근대국민국가의 史観이라고 하는 방법론에 의해 증명하려고 하였던 점에 잘못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近代国民国家의 史観」과 「律令国家의 観念」에 공통하는 인식은 야마토 왕권 중심사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종래의 「任那日本府」 해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의 근년의 연구 동향을 살펴볼 때 시점의 전환이 보이고 있다. 상대국의 주체성과 입장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즉, 「동아시아」에의 시점인 것이다.
    「동아시아지역세계」에는 「한․일 지역세계」라든지 「한․중 지역세계」 등의 다양한 지역세계가 중층적으로 병존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지역세계나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왕권을 연결해 주는 담당자로서의 이른바 「中間者的인 存在」의 상정도 가능할 것이다. 이와 같은 「中間者的인 存在」의 실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任那日本府」 문제는 관련 사료를 보면 百済王権과 倭王権이라는 두 개의 왕권과의 교섭을 중심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任那諸国과 新羅王権도 얽혀있는 「韓․日地域世界」의 정치문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바다로 떨어져 있고 말이 다른 족적 구성을 가진 「古代韓․日地域世界」의 정치적 집단 사이를 연결해 주었다고 보아지는 「中間者的인 存在」를 전제로 하여 「海域」과 「언어」의 두 가지를 중심 단어로 생각하여 「任那日本府」의 문제를 재조명하여 보았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연구결과를 평가하자면 「任那日本府」는 倭王權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任那」의 「倭宰」 즉, 임나의 외교와 교역을 담당하던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6세기 가야사와 한일관계사의 재평가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본 연구의 활용방안으로는 첫째, 연구 성과의 학문에 대한 반영이다. 종래 「任那日本府」 연구의 핵심적 논란이 주체의 문제 즉, 倭王權의 영향력에 대한 과대평가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둘째, 식민지 사관과 반식민지 사관으로 전개되어온 한일고대사 학계의 고대한일관계사 연구의 방향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는 『日本書紀』의 고대한일 관계기사의 재검토로 이어지며 「欽明紀」의 「任那日本府」 기사는 왜왕권의 가야지역 지배의 실체를 증명하는 자료가 아니라 멸망 한 「任那(金官加耶)」의 「倭宰」집단의 독립운동 기록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역사교육에 있어서의 활용이다. 잘못된 「任那日本府」의 해석을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여 역사교육에 적용하려는 「새역사교과서」와 같은 우익적 사고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증거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제시대의 조선 합병을 합리화하기 위해 시작된 가야사 연구와 한일관계사 출발점의 왜곡을 지적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넷째, 역사 연구에 있어서의 인식의 외연 확대에 기여할 것이라 생각한다. 종래 역사의 해석에 있어서 왕권대 왕권, 중앙대 중앙이란 시점에서 접근을 하였지만, 왕권과 왕권을 이어주는 존재,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중간자적 존재」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현해탄이란 바다를 매개로 전근대의 역사가 전개되어 왔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海域」과 「言語」란 관점은 또 다른 연구 영역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Index terms
  • 임나일본부, 안라일본부, 일본부, 임나부흥, 임나부흥회의, 흠명기, 중간자적 존재, 해역, 언어, 가야, 임나, 야마토, 백제, 신라, 안라, 금관가야, 대가야, 왜왕권, 백제왕권, 근대국민국가사관, 율령국가관념, 동아시아지역세계, 한일지역세계, 야마토왕권중심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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