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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940년대 총력전하의 농촌생활연구 -일본 群馬縣 新田郡 木崎町을 대상으로 -
Reports NRF is supported by Research Projects( 일본 1940년대 총력전하의 농촌생활연구 -일본 群馬縣 新田郡 木崎町을 대상으로 - | 2004 Year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남상호(경기대학교) ) data is submitted to the NRF Project Results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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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A00060
Year(selected) 2004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06년 06월 01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06년
Research Summary
  • Korean
  • 본 연구는 개인과 단체로 구성된 사회가 어떻게 총력전체제 형성에 관련되어지는지를 밝히려는 것이며, 지역주민에게 있어서 총력전시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특히 선행 촌락연구에서 등한시하고 있는 일상생활의 영역을 복원하고자 하며 이런 작업을 통하여 국민 개개인의 일상생활 이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총력전시기의 촌락 농민 생활(생산활동과 소비생활)을 밝혀내고 이것과 국민국가와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총력전 시기의 국가권력이나 지식인들의 일상성을 가치화하는 언설을 살펴, 총력전시기는 국가가 일상생활을 간섭해가는 시대 분위기에 맞물려 이 시대의 하나의 키워드는 생활이었음을 밝혔다. 일상생활을 혁신․재편성함으로서 생산력의 확대와 고도국방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시기가 총력전 시기였다. 한마디로 총력전 시기의 시대정신의 하나는 일상에 대한 주목과 일상의 가치화였다고 보여진다.
    이 총력전시기의 생활의 실태를 群馬縣 新田郡 木崎町(現 新田町)의 赤堀(大字)에 살았던 지주 大川竹雄(오오카와 타케오)의 개인문서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살펴보았다. 당시 일본국민의 50%를 차지하는 농민은 이런 자부심과는 전혀 무관하게 사회로부터 촌놈이라 무시당하고, 농민 자신들조차 스스로를 비하하고 이농하는 현실 속에서 일본의 농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이런 현실에 대해 大川竹雄는 농민으로서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고, 農民의 경제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의도하에 「農」의 의의를 찾아 편력하게 된다. 그 결과 의의를 어디에서 찾아는가 하면 인간 生命의 維持나 당시 최고의 가치인 일본 神이나 天皇에 대한 奉仕에서 찾았고 중일전쟁 이후 새롭게 국방과 「해외발전」적 의의를 첨가하였다. 이것은 한마디로 「農道盡忠」이었다. 초라한 사회적 약자로서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당시의 최고가치였던 천황, 전쟁에 의존해 자신의 존재의의 찾았던 것이다.
    결국 大川는 농업경영의 목적이 영리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가 경영의 영리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大川는 聖職인 농업에 종사함에 있어 자기 노동을 절대적 가치인 천황과 국가에 봉사하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성실히 일하여 그 결과 얻는 농업 경영이익에 대하여는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이기까지 하였다. 즉 私益과 公益을 일체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따라서 大川은 자가 생산력향상에 필요한 농사개량과 경지개량를 위해 「과학의 응용」「능률」「합리」란 키워드 아래 당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해 간다. 이런 大川가 정부의 증산정책 중 농업생산력 향상의 측면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전시기의 통제정책 속에서도 그를 움직이게 했던 추진력의 하나는 경영 이익의 추구였던 것이다.
    이점은 마을 주민들의 반응에서도 동일하다. 소작문제의 잔존이나 마을 공동화 과정, 농작물 생산 할당, 공출 등에서 보이는 마을 주민의 실리적 대응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나아가 정부의 식량증산 구호를 역으로 사용하며 지역현안이었던 暗渠배수, 大正用水 건설등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했던 지역사업을 실현시켜 가는 능동성이 있었다.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국책에 접근해 가는 한 농민으로서의 모습의 단적인 예를 大川가 1941년 오동나무를 뽑아버리고 소작지로 전환시키는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 리더로서 구국의식이 요청된 시대상황 속에서 농업의 의의를 「農道盡忠」에 둔 인간이 자기 의도는 달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논리에 자승자박해 가는 시대의 모습을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 English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daily life as a vehicle for the acquisition, allocation, and exercise of political power in late imperial Japan.
    Okawa Takeo was a successful candidate for the Diet in 1930, and joined the Seiyukai shortly thereafter. He moved rapidly towards the upper echelons of party leadership. He owed much of his strength within the Seiyukai to his considerable fortune. He urged an increase in state controls over the economy, in the interests of strong national defense. He was an ardent advocate of strengthening the defensive capabilities of both services, a position not inconsistent with his entrepreneurial interests in the defense industry. Nakajima group supported the government's domestic reform proposal and were ready to organize a new political party under Konoe.
    Nakajima Seiyukai had formulated plans that emphasized public mobilization in wartime as the key to the resuscitation of party power by the summer of 1939. Nakajima's views on the policies his party should follow to gain strength were contained in an "Outline of a Reform Policy" he draft in June 1939. To accomlish Japan's international mission, Nakajima wrote, the unique Japanese world view must be understood by the people at home. The government thus needed to win its own people's support through an extensive ideological campaign, explaining the relevance of Japan plans for a New East Asia to the lives of the Japanese people. Nakajima emphasized that an important role in this mobilization of public support should be played by a strong party.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총력전시기는 국가가 일상생활을 간섭해가는 시대 분위기에 맞물려 이 시대의 하나의 키워드는 생활이었다. 일상생활을 혁신․재편성함으로서 생산력의 확대와 고도국방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시기가 총력전 시기였다. 한마디로 총력전 시기의 시대정신의 하나는 일상에 대한 주목과 일상의 가치화였다고 보여진다.
    이 총력전시기의 생활의 실태를 群馬縣 新田郡 木崎町(現 新田町)의 赤堀(大字)에 살았던 지주 大川竹雄(오오카와 타케오)의 개인문서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살펴보았다. 근대 일본은 明治유신으로부터 불과 50여년이 지난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는 세계5대 강국의 하나란 국제적 지위를 얻게되면서 일본인들은 일등국, 일등국민이란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국민의 50%를 차지하는 농민은 이런 자부심과는 전혀 무관하게 사회로부터 촌놈이라 무시당하고, 농민 자신들조차 스스로를 비하하고 이농하는 현실 속에서 일본의 농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이런 현실에 대해 大川竹雄는 농민으로서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고, 農民의 경제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의도하에 「農」의 의의를 찾아 편력하게 된다. 그 결과 의의를 어디에서 찾아는가 하면 인간 生命의 維持나 당시 최고의 가치인 일본 神이나 天皇에 대한 奉仕에서 찾았고 중일전쟁 이후 새롭게 국방과 「해외발전」적 의의를 첨가하였다. 이것은 한마디로 「農道盡忠」이었다. 초라한 사회적 약자로서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당시의 최고가치였던 천황, 전쟁에 의존해 자신의 존재의의 찾았던 것이다.
    결국 大川는 농업경영의 목적이 영리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가 경영의 영리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大川는 聖職인 농업에 종사함에 있어 자기 노동을 절대적 가치인 천황과 국가에 봉사하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성실히 일하여 그 결과 얻는 농업 경영이익에 대하여는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이기까지 하였다. 즉 私益과 公益을 일체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따라서 大川은 자가 생산력향상에 필요한 농사개량과 경지개량를 위해 「과학의 응용」「능률」「합리」란 키워드 아래 당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해 간다. 이런 大川가 정부의 증산정책 중 농업생산력 향상의 측면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전시기의 통제정책 속에서도 그를 움직이게 했던 추진력의 하나는 경영 이익의 추구였던 것이다.
    이점은 마을 주민들의 반응에서도 동일하다. 소작문제의 잔존이나 마을 공동화 과정, 농작물 생산 할당, 공출 등에서 보이는 마을 주민의 실리적 대응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나아가 정부의 식량증산 구호를 역으로 사용하며 지역현안이었던 暗渠배수, 大正用水 건설등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했던 지역사업을 실현시켜 가는 능동성이 있었다.
    그러나 관료에게 있어서 農의 의의는 정부정책에 따라 묵묵히 식량증산에 정진하는 「臣民」의 모습이었다. 官과 民이 추구하는 목적에 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재배 농작물의 선정에서의 자율성의 제한, 배급제도의 모순, 과중한 공출량, 암거래 등으로 「시국에의 불평」은 끝이 없었다. 大川로서는 「농민은 公租公課의 불공평, 도시편중의 정책등 정치 경제적으로 압박」받는 현실, 「조세에, 문화적으로도 냉대 받고 경제적으로는 농산물 지수 123, 구입농가용품156」이라는 현실에 대해서 「지금 이대로 놔둘 수밖에 없는가」하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농민은 사회로부터 천민시되어 농촌 내부에서도 자연스럽게 이농자가 늘어만 갔다. 전업농가인 오오카와는 도시발전 제한, 도시와 농촌격차 해소 등을 주장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없었다.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국책에 접근해 가는 한 농민으로서의 모습의 단적인 예를 大川가 1941년 오동나무를 뽑아버리고 소작지로 전환시키는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 리더로서 구국의식이 요청된 시대상황 속에서 농업의 의의를 「農道盡忠」에 둔 인간이 자기 의도는 달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논리에 자승자박해 가는 시대의 모습을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일본 역사학계의 기존연구는 일본역사학계의 문제관심 상, 주로 국민지배의 관점에서 파시즘체제 형성을 문제시해왔다. 파시즘체제의 촌락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런 체제에 어떤 계급이 조직되어져 갔는가를 밝히는 연구가 주이다. 日常性의 구조를 문제시하는 시점이 희박했다.
    본연구에서는 선행 촌락연구에서 등한시하고 있는 일상생활의 영역을 복원하고자 하며 이런 작업을 통하여 국민 개개인의 일상생활이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총력전시기의 촌락 농민 생활을 밝혀내고 이것과 국민국가와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총력전 시기의 국가권력이나 지식인들의 일상성을 가치화하는 언설을 살피고, 나아가 그것을 論이나 정책 레벨에서 그치게 하지 않고 생활의 場인 촌락사회를 접목시켜 어느 정도까지 일상생활의 세부에까지 국가권력이 개입해오는가, 국가권력의 일상생활 개입에 대해 대응하며 실제로 촌락주민의 일상생활과 생활관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촌락주민의 입장에서 살펴봄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파시즘적 재편성론 일변도의 촌락사회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고자 했다.
    본연구는 국가와 촌락 농민생활과의 관계를 한 분석대상지를 필드로 하여 극밀하고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방법이다. 미시사에 속하는 지역사 연구로 중앙사를 다루는 입장에서 보면 소외받아 왔던 분야이다. 그러나 총력전체제를 구축해가는 정치과정이나 그 사상연구와 더불어 총력전시기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불가결한 과제이다. 학문의 균형발전을 위해 소외된 분야의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나아가 총력전시기에 생활의 역사가 대두되었듯이 일상성이 주목받던 시기였다. 따라서 일상생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촌락사회 차원에서 규명해야 하는 작업은 필수불가결한 작업이다.
    이런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2006년 2월 일본학회에서 중간발표, 2006년 5월 역사학대회에서 중간발표를 했다.
    이후 연구성과를 학술지(역사학보 혹은 일본학보)에 발표함으로써 연구성과를 학계에서 공유하고자 한다


  • Index terms
  • 총력전, 생활사, 국민생활론, 일상생활, 소비와 생산, 농도진충, 농본주의, 식량증산정책, 농업통제, 시간, 건강, 민간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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