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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전반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3세기 전반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 | 2004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여호규(한국외국어대학교& #40;글로벌캠퍼스& #41;)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9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5월 30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3세기 전반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고구려 대외정책에 대해 고찰했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後漢 붕괴 이후 遼東일대에서는 公孫氏 政權이 패자로 부상했고, 이는 고구려에도 영향을 미쳐 주변의 피복속집단이 동요했다. 그렇지만, 중국대륙의 삼국은 220년대까지 동방정책을 적극 추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손씨 정권은 이들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세력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 반면, 고구려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공손씨를 견제할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는 公孫氏의 침공과 피복속집단의 동요를 고려하며 본거지 외곽에 군사방어체계를 강화했다.
    한편 220년대 말부터 孫吳와 蜀漢이 본격적으로 조위에 대한 북벌을 단행했다. 특히 蜀漢은 선비족, 孫吳는 공손씨와 연계해 조위에 대한 협공을 시도했다. 孫吳는 요동에 전진기지를 건설하려 했지만, 公孫氏의 돌변으로 인해 실패했다. 공손씨에 감금되었던 孫吳 사절단 일부가 고구려로 도망옴에 따라 양국 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孫吳는 曹魏를 협공하기 위해 동방정책을 추진한 반면, 고구려는 公孫氏 정권을 격파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다만 孫吳도 요동지역에 전진기지를 건설하려면 공손씨를 공략해야 했기 때문에 양국은 공손씨 격파라는 목표를 일시적으로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234년 蜀漢의 제갈량이 사망함에 따라 손오와 촉한의 북벌은 중대한 위기에 빠졌다. 이를 틈타 조위가 동북방 공략을 본격 개시했다. 고구려로서는 공손씨 정권을 제거할 확실한 파트너를 만난 셈이다. 이에 고구려는 236년 손오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238년에는 조위의 공손씨 토벌을 적극 도왔다. 그런데 동방으로 진출한 조위는 공손씨보다 더욱 강력하게 고구려 세력권을 위협했다. 이에 고구려는 여러 방면에서 동시에 가해지는 曹魏의 원심력을 차단하기 위해 242년 西安平을 공격했다. 이에 조위도 244-245년 고구려 세력권을 대대적으로 공략한 다음, 분할지배정책을 추진했다.
    이로써 3세기 전반 고구려의 대외정책은 파경을 맞게 되었다. 다만 고구려는 피복속집단의 동요까지 고려하여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에 중심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빨리 회복하고, 조위의 추가 침공을 방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3세기 후반 서진의 대외정책이 완화되는 틈을 타 주변 피복속집단에 영향력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 영문
  • After Hu-Han/後漢 dynasty collapsed, the Gongson-shi/公孫氏 regime newly came to present itself as the new ruler of the Liaodong/遼東 region. This kind of power shift clearly affected the internal stability of the Koguryo dynasty, as subordinate groups such as Sosumaek/小水貊 and Dongyae/東濊 started to waver, causing the region to be de-stabilized. Yet, the Three dynasties of China continued to fight each other viciously through the 220s, so they were in no position to launch a solid Eastern policy at the time. Thanks to the situation, the Gongson-shi regime was able to establish a strong power base throughout the region, without being interrupted.
    On the other hand, Koguryo was out of diplomatic options to maintain the Gongson-shi regime in check. So, the Koguryo government chose to designate an emergency military defense fortress as the temporary capital city, and construct a series of mountain fortresses along the right side(右岸) of the Hun-jiang/渾江 river in a fairly concentrated fashion. These military efforts of defensive reinforcement were part of the overall response to the military threats of the Gongson-shi forces, but it was also meant to be utilized in maintaining internal security of the dynasty, keeping the subordinate groups in place.
    Since the end of the 220s, the Oh dynasty ruled by the Son House('Son-Oh/孫吳') and the Chok-Han/蜀漢 dynasty formed an alliance, and immediately launched an aggressive Northern campaign. Especially the 'Son-Oh/孫吳' tried to launch a joint operation with the Gongson-shi House and attack the 'Joh-Wei/曹魏'(the Wei dynasty ruled by the Joh House). The Oh dynasty attempted to establish a military installation in the Liaodong region by dispatching a huge military there, but the sudden changes in the Gongson-shi House's position prevented the efforts from being ever implemented.
    The relationship between Koguryo and Son-Oh was initiated, as several members of the Son-Oh delegation that was sent to visit the Gongson-shi regime fled to Koguryo asking for protection. At the time, the Son-Oh government was outraged by the betrayal of the Gongson-shi regime, so it was easy for Son-Oh to establish a joint front against the Gongson-shi regime with the Koguryo dynasty. But in 234, even before such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both entities had the opportunity to be settled, Jaegal-Ryang of the Chok-Han dynasty died, and his death seriously endangered the joint Northern campaign which was based upon the joint efforts of Chok-Han and Son-Oh.
    Taking advantage of the situation, the Joh-Wei launched its own Eastern campaign. Apparently, Koguryo also favored such launch, as the Koguryo government beheaded the Son-Oh emissaries in 236, sent their heads to Joh-Wei, and joined the Joh-Wei dynasty's conquest of the Gongson-shi regime in 238. But Joh-Wei chose to pursue a separative-ruling policy even more strongly than the Gongson-shi regime. Such policy was a direct threat to the Koguryo security. In response to such threat, Koguryo launched a preemptive strike against the Seoanpyeong region in 242. Joh-Wei also retaliated upon all fronts, and maintained the separative-ruling policy.
    These series of events that happened during the early half period of the 3rd century, significantly changed the foreign policy of the Koguryo dynasty. But the Koguryo dynasty designed its own military defense system with taking the disturbances that might occur among the subordinate groups into account, and implemented it throughout the outskirts of the central, so Koguryo was able to restore control of the central areas, and deflect additional assaults of the Joh-Wei dynasty rather efficiently. Koguryo also took advantage of the situations when the foreign policies of Joh-Wei or West-Jin showed any weaknesses, to reinfor its control over the subordinate groups throughout the regio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後漢 붕괴 이후 遼東일대에서는 公孫氏 政權이 패자로 부상했고, 이는 고구려에도 영향을 미쳐 小水貊이나 東濊 등 피복속집단이 동요했다. 그렇지만, 중국대륙의 삼국은 220년대까지는 치열한 각축전으로 인해 동방정책을 추진하기 힘들었다. 이로 인해 공손씨 정권은 이들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강력한 세력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
    반면, 고구려는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공손씨를 견제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고구려는 비상시 군사방어성을 임시 왕성으로 삼고 渾江 右岸에 山城을 집중적으로 구축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이러한 군사방어체계의 강화는 公孫氏의 침공에 대한 대비책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피복속집단의 동요까지 고려한 것이었다.
    220년대 말부터 孫吳와 蜀漢이 吳蜀同盟을 바탕으로 북벌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孫吳는 공손씨와 연계하여 조위를 협공하려 했다. 孫吳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요동에 전진기지를 건설하려 했지만, 公孫氏의 돌변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고구려와 손오의 관계는 공손씨에 감금되었던 사절 일부가 고구려로 도망옴에 따라 시작되었다. 당시 孫吳는 공손씨에게 배신당한 직후였기 때문에 공손씨 격파라는 목표를 고구려와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양국 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도 전인 234년, 蜀漢의 제갈량이 사망함에 따라 촉한과 손오의 북벌은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다.
    이를 틈타 조위가 동방경략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고구려도 이에 부응하여 236년 손오의 사자를 참수해 조위에 보내는 한편, 238년에는 조위의 공손씨 토벌에 참여했다. 그런데 조위는 공손씨보다 강력한 분할지배정책을 구사하며 고구려 세력권을 위협했다. 고구려는 曹魏의 원심력을 차단하기 242년 西安平을 선제공격했다. 그러자 조위도 고구려 세력권을 대대적으로 공략한 다음, 분할지배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로써 3세기 전반 고구려 대외정책은 파경을 맞았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피복속집단의 동요까지 고려해 본거지 외곽에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에 중심부에 대한 지배력을 빨리 회복하고, 조위의 추가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아울러 조위나 서진의 대외정책이 완화되는 틈을 타 주변 피복속집단에 대한 지배력도 회복할 수 있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상의 연구를 통해 필자는 3세기 전반 고구려의 대외정책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연계하여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와 대적했던 공손씨 정권이 성장할 수 있었던 국제적 배경을 새롭게 밝혔으며, 중국대륙의 정세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손오와 조위 동방정책의 변화가 고구려에 미친 영향을 새롭게 규명했다. 이와 더불어 당시 고구려의 가장 중요한 외교적 과제가 무엇이었는지, 이를 위해 대내외적으로 어떠한 대외정책을 구사했는지 등을 다각도로 고찰했다.
    이러한 연구성과는 3세기 전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기본성격과 국제관계의 전체 흐름에 대한 균형된 시각을 제공할 뿐 아니라, 냉엄한 국제정세 속에서 다양한 외교정책을 놓고 갈등하였을 고구려인들의 인간적 고뇌에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도 될 것이다. 그리고 급변하는 21세기 신국제질서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외교정책 수립에도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제공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결과는 학계뿐 아니라 외교정책을 비롯한 각종 정책입안자에게도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나아가 일반 국민들의 균형있는 국제감각을 제고하는 데에도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본 연구자는 연구결과물을 저명학술지에 기고하여 관련 학계에 연구자료로 제공하는 한편, 관련 학회의 홈페이지 등에 간략한 요약문을 게재하여 각종 정책입안자나 일반 국민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겠다. 그리고 각 대학의 관련 학과나 연구소 홈페이지 등에도 요약문을 게재하여 대학의 전공교육이나 교양교육에도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
  • 색인어
  • 고구려, 동아시아 국제질서, 공손씨 정권, 조위, 손오, 촉한, 고구려의 대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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