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국내외적으로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실제로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데올로기적 성격과 국제적 성격이 차츰 강화되었고, 나중에는 전황이나 승패보다는 이념적 덧칠이 교전 당사자들에게 더 중요해졌다. 6·25전쟁은 전쟁의 이념적, 도덕적 성격이 ...
6·25전쟁은 국내외적으로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실제로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데올로기적 성격과 국제적 성격이 차츰 강화되었고, 나중에는 전황이나 승패보다는 이념적 덧칠이 교전 당사자들에게 더 중요해졌다. 6·25전쟁은 전쟁의 이념적, 도덕적 성격이 이전 어느 전쟁보다 강조되었다. 그리고 전쟁 과정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던 미국의 원자탄 사용 위협, 세균전 논란, 포로송환을 둘러싼 지루한 줄다리기는 어느 것이나 전황과 관련성보다 심리전 차원에서 제기되고 강조되었다. 그렇다면 심리전은 당시의 이데올로기 전쟁이나 냉전문화의 형성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었고, 또 어떤 역사적 특성을 가졌던가.
본 연구가 삐라를 분석의 소재로 삼고, 또 교전 양측의 심리전을 분석 대상으로 한 이유는 삐라와 심리전이 전쟁의 성격은 물론 국가 간 관계, 국가와 사회, 국가와 민중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적절한 매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삐라가 일종의 의사소통 수단이라는 소재적 특성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삐라는 심리전의 도구라는 뚜렷한 작성 동기를 가지고, 작성자가 수용자를 일방적으로 설득하고 강요하는 수단이라는 제한성을 가지지만 작성자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히 전달하려 한다는 점에서 작성·살포 주체의 생각을 이만큼 잘 알려주는 자료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 삐라는 참전국가들의 정책문서보다 더 직선적으로 교전주체들의 의도와 지향을 나타낸다. 그리고 삐라의 살포와 선전 대상(target audience)은 적군에 한정되지 않았고, 적 측 민간인, 아군 측 민간인에까지 두루 미쳤다. 6·25전쟁 개전 직후 6개월 간 미군 삐라의 주 살포대상은 북한군과 중국군이 아니라 북한 점령지역의 민간인과 한국군이었다. 즉 민간인을 상대로 한 선무활동 역시 양측 심리전의 주요한 활동영역이었고, 그러한 사정은 삐라의 작성과 살포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삐라를 통해 교전 당사국들 간의 국가 간 관계, 우방국들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교전국과 상대국 민중들 사이의 관계, 교전국들 내부의 국가와 국민 사이의 관계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6·25전쟁에서 교전 당사자들이 전쟁의 발발 단계에서부터 촉각을 곤두세운 것은 전쟁의 승리뿐만 아니라 전쟁의 성격 및 교전 상대방과 아군측, 또 국외자들에게 전쟁을 어떻게 선전하고 합리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6·25전쟁은 전쟁 발발의 책임 문제와 관련해 유사이래 어느 전쟁보다 기나긴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 UN군이 자신의 전투활동을 '치안유지활동'(police action)으로 명명하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양측은 용어 하나도 가려 쓸 정도로 '말의 전쟁'(war of words)에 신경을 썼다. 또 휴전협상이 그렇게 지루하게 계속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포로의 자유송환 문제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양측은 전쟁 수행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념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이용했다. 어떤 면에서 선전(propaganda)이 전쟁의 승패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심리전은 6·25전쟁의 이러한 정치적, 이념적 성격을 그 어느 분야보다 잘 보여준다.
삐라는 작성 목적에 따라 내용적 편차가 크고, 상황 구속성이 강하지만, 전장에서 살포되었던 삐라들 가운데 수집 가능한 삐라들을 모아서 그 삐라들이 지닌 일정한 전형성을 추출하고, 그 전형성이 주장하는 논리, 관련 삐라가 일으키는 심상작용의 뿌리와 그 형성과정을 추적한다면, 그러한 논리와 심상작용으로부터 교전 당사자들의 군사전략, 점령정책, 선전정책 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분석 작업은 동시에 군인과 민간인의 전쟁에 대한 기억, 이들에 의한 전쟁의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수용양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