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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朝 濟州三邑 鄕校의 新創, 重創, 移建에 關한 硏究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朝鮮朝 濟州三邑 鄕校의 新創, 重創, 移建에 關한 硏究 | 2004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양진건(제주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B00399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5월 2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조선조 제주삼읍 향교의 신창, 중창, 이건의 회수를 보면 제주향교가 신창 1회, 중창 6회, 이건 5회, 정의향교가 신창 1회, 중창 1회, 이건 2회, 그리고 대정향교가 신창 1회 중창 5회 이건 1회로 조사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신창은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보급하기 위하여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각 1회씩 이루어진 것이며, 중창은 비가 새거나 벽이 허물어져 보수할 필요가 있을 때 주로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 이건은 제주향교의 경우 화재로 1회 옮긴 것 외에 그 이유의 모두가 풍수지리적인 것이었다. 즉 명당을 찾아 이건을 했던 것이다.
    사학인 서원의 융성으로 향교가 급속하게 폐이(廢弛)되고 지방교육은 서원이 대행하다시피 하던 때에 제주삼읍 향교의 이건이 빈번했던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제주도의 경우는 육지부와는 달리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실직(實職)을 받지 못한 자들과 과거에 응시하지는 않았으나 양반 가문 출신의 자제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 향교를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이들에게는 향교에 출입한다는 사실 자체가 특권의 상징이었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향교는 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신분유지처로서의 기능을 했으며 그래서 중창과 이건도 빈번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 영문
  • A study about new construction, repairing transfer of Jeju three town's HyangGyo on the Chosŏn dynas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조선조 제주삼읍 향교의 신창, 중창, 이건의 회수를 보면 제주향교가 신창 1회, 중창 6회, 이건 5회, 정의향교가 신창 1회, 중창 1회, 이건 2회, 그리고 대정향교가 신창 1회 중창 5회 이건 1회로 조사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신창은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보급하기 위하여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각 1회씩 이루어진 것이며, 중창은 3개 향교 모두 비가 새거나 벽이 허물어져 보수할 필요가 있을 때 주로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 이건은 제주향교의 경우 화재로 1회 옮긴 것 외에 그 이유의 모두가 풍수지리적인 것이었다. 즉 명당을 찾아 이건을 했던 것이다.
    명당이란 풍수지리설에 근거를 둔 좋은 집터나 묏자리를 말하는데 양택(陽宅:집터)인 경우에는 주건물(主建物)의 전방이고, 음택(陰宅:묏자리)인 경우에는 무덤 앞에서 안산(案山)과의 사이 공간을 말하며,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에 둘러싸인 부분이다. 명당은 다시 내명당과 외명당으로 구분되는데 내명당은 무덤이나 건물의 바로 앞을 말하고, 외명당은 내명당 밖에 있는 넓고 평탄한 곳을 말한다. 내명당은 임금이 신하들의 조회(朝會)를 받는 정전(正殿)인 명당을 상징하고, 외명당은 곡식 창고를 뜻하여, 넓고도 앞이 활짝 트인 것을 좋은 것으로 본다. 이런 근거를 찾아 이건이 빈번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사학인 서원의 융성으로 향교가 급속하게 폐이(廢弛)되고 지방교육은 서원이 대행하다시피 하던 때에 제주삼읍 향교의 이건이 빈번했던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제주도의 경우는 육지부와는 달리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실직(實職)을 받지 못한 자들과 과거에 응시하지는 않았으나 양반 가문 출신의 자제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 향교를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이들에게는 향교에 출입한다는 사실 자체가 특권의 상징이었으며 다른 지방과는 달리 이들은 향직(鄕職)을 독점하였다. 향직은 제주도의 경우 양반임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직역(職役)이다. 어쩌면 그만큼 양반의 경우 중앙관직을 얻을 기회가 적고 과거를 통과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에 향교에의 직책(職責)과 향직을 중요시 여기고 신분유지의 수단으로 파악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향교는 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신분유지처로서의 기능을 했으며 그래서 중창과 이건도 빈번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결과는 향교의 인원구성, 운영, 기능, 경제기반 등의 제도적인 문제에 치중되어 왔던 지금까지의 향교연구의 경향을 극복함은 물론 지방교육사가 새로운 학문분야로 발전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새로 발굴된 1차자료에 의거한 본 연구의 결과는 종래 밝혀지지 않았던 조선조 제주삼읍의 향교와 관련한 새로운 사실들을 밀도있게 밝혀짐으로써 지방교육사로서 제주교육사는 더욱 큰 설명력과 과학성을 확보하게 됨은 물론 향교연구의 새로운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 색인어
  • 제주향교, 정의향교, 대정향교, 신창, 중창,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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