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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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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일제의 電力産業 침탈과 장악 과정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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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번호 |
B00069 |
선정년도 |
2004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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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진행현황 |
종료 |
제출상태 |
재단승인 |
등록완료일 |
2006년 05월 23일 |
연차구분 |
결과보고 |
결과보고년도 |
2006년 |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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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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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전기의 부채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던 콜브란측과 이용익은 1903년 말 러일전쟁이 임박하는 등 국제정세가 급변하자 급거 화해무드로 전환해 채무분규를 타결지었다. 당시 戰時國外中立宣言을 준비하고 있었던 대한제국 집권세력으로서는 다른 열강들의 지지와 협력이 필요하 ...
한성전기의 부채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던 콜브란측과 이용익은 1903년 말 러일전쟁이 임박하는 등 국제정세가 급변하자 급거 화해무드로 전환해 채무분규를 타결지었다. 당시 戰時國外中立宣言을 준비하고 있었던 대한제국 집권세력으로서는 다른 열강들의 지지와 협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904년 7월 18일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에서 자본금 100만불(200만원)의 유한회사로 韓美電氣會社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1902~1903년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이용익의 한성전기 경영권 장악 구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처럼 한성전기 자산의 완전한 인수가 아닌 한미합자 형태의 회사로 개편한 배경에는 향후 일본의 외압이 더욱 거세질 것을 대비해서 미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관심을 지속시키기 위한 광무황제와 중립파의 의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제는 러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한반도에 군사 점령을 단행하고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등의 체결을 강요해 ‘施政改善’이라는 명목 아래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한국을 식민지 경제구조로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따라서 일제는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전력산업을 장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제는 대한제국의 주권탈취와 식민지화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우호관계 유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일방적인 강압 수단을 사용해 한미전기를 인수할 수는 없었다. 일단 한미전기의 경영활동에 은근히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애초 계약에 따라 황궁내의 전등은 콜브란측에서 다시 受電하기로 했으나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 수전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창덕궁의 전등시설도 한미전기에서 수전하지 않고 직접 설치했다. 콜브란측의 경영권을 위협할 일본인들의 회사 설립도 추진했다. 콜브란측의 수도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임시수도 설비공사도 추진했으며 콜브란측이 획득한 광산개발권도 무효로 하려고 기도했다. 이처럼 일제가 콜브란측의 경영활동에 강력한 제약을 가했던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광무황제가 한미전기를 통해 비밀리에 ‘주권수호외교’를 전개하는 한편 비밀자금을 조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콜브란측과 갈등을 빚었던 일본의 입장은 1908년에 들어서 보다 유화적인 태도로 전환되었다. 일제는 지나친 반미감정을 선동하는 신문을 단속하기도 하고, 그간 부인해 왔던 콜브란측의 甲山鑛山 개발권을 인정해 주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한미전기의 경영권 장악을 위한 공작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우선 당시 일본 정관계 실력자들과 긴밀한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었던 澁澤榮一, 大倉喜八郞 같은 일본인 政商, 財閥들을 동원해 日韓瓦斯라는 가스회사를 설립토록 했다. 이 회사에서 熱用이나 燈火用으로 가스를 공급해 한미전기의 경영에 압박을 가하고 궁극적으로 한미전기를 매수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일한와사는 설립직후 한미전기 인수 협상에 착수했고, 결국 양측은 전체 120만원에 일한와사가 한미전기의 특허, 권리, 재산을 인수하고 50만원의 사채를 계승하기로 타결을 보았다. 1909년 6월 정식계약이 체결되고, 1909년 8월 한미전기는 日韓瓦斯(日韓瓦斯電氣로 개칭)에 인계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전력산업 경영권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향후 日韓瓦斯電氣는 새로운 식민지 경제구조 속에서 대대적인 개편이 진행될 것임이 예고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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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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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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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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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전기의 부채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던 콜브란측과 이용익은 1903년 말 러일전쟁이 임박하는 등 국제정세가 급변하자 급거 화해무드로 전환해 채무분규를 타결지었다. 당시 戰時國外中立宣言을 준비하고 있었던 대한제국 집권세력으로서는 다른 열강들의 지지와 협력이 필요하 ...
한성전기의 부채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던 콜브란측과 이용익은 1903년 말 러일전쟁이 임박하는 등 국제정세가 급변하자 급거 화해무드로 전환해 채무분규를 타결지었다. 당시 戰時國外中立宣言을 준비하고 있었던 대한제국 집권세력으로서는 다른 열강들의 지지와 협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904년 7월 18일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에서 자본금 100만불(200만원)의 유한회사로 韓美電氣會社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1902~1903년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이용익의 한성전기 경영권 장악 구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처럼 한성전기 자산의 완전한 인수가 아닌 한미합자 형태의 회사로 개편한 배경에는 향후 일본의 외압이 더욱 거세질 것을 대비해서 미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관심을 지속시키기 위한 광무황제와 중립파의 의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제는 러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한반도에 군사 점령을 단행하고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등의 체결을 강요해 ‘施政改善’이라는 명목 아래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한국을 식민지 경제구조로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따라서 일제는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전력산업을 장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제는 대한제국의 주권탈취와 식민지화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우호관계 유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일방적인 강압 수단을 사용해 한미전기를 인수할 수는 없었다. 일단 한미전기의 경영활동에 은근히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애초 계약에 따라 황궁내의 전등은 콜브란측에서 다시 受電하기로 했으나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 수전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창덕궁의 전등시설도 한미전기에서 수전하지 않고 직접 설치했다. 콜브란측의 경영권을 위협할 일본인들의 회사 설립도 추진했다. 콜브란측의 수도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임시수도 설비공사도 추진했으며 콜브란측이 획득한 광산개발권도 무효로 하려고 기도했다. 이처럼 일제가 콜브란측의 경영활동에 강력한 제약을 가했던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광무황제가 한미전기를 통해 비밀리에 ‘주권수호외교’를 전개하는 한편 비밀자금을 조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콜브란측과 갈등을 빚었던 일본의 입장은 1908년에 들어서 보다 유화적인 태도로 전환되었다. 일제는 지나친 반미감정을 선동하는 신문을 단속하기도 하고, 그간 부인해 왔던 콜브란측의 甲山鑛山 개발권을 인정해 주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한미전기의 경영권 장악을 위한 공작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우선 당시 일본 정관계 실력자들과 긴밀한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었던 澁澤榮一, 大倉喜八郞 같은 일본인 政商, 財閥들을 동원해 日韓瓦斯라는 가스회사를 설립토록 했다. 이 회사에서 熱用이나 燈火用으로 가스를 공급해 한미전기의 경영에 압박을 가하고 궁극적으로 한미전기를 매수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일한와사는 설립직후 한미전기 인수 협상에 착수했고, 결국 양측은 전체 120만원에 일한와사가 한미전기의 특허, 권리, 재산을 인수하고 50만원의 사채를 계승하기로 타결을 보았다. 1909년 6월 정식계약이 체결되고, 1909년 8월 한미전기는 日韓瓦斯(日韓瓦斯電氣로 개칭)에 인계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전력산업 경영권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향후 日韓瓦斯電氣는 새로운 식민지 경제구조 속에서 대대적인 개편이 진행될 것임이 예고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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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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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를 통해 대한제국이 자주적으로 전력산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설립한 한성전기가 1904년 한미합자의 한미전기로 개편되고 1909년 일본인 민간회사인 일한와사에 합병되는 과정을 명확히 확인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미전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영되었는지, 그리 ...
연구를 통해 대한제국이 자주적으로 전력산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설립한 한성전기가 1904년 한미합자의 한미전기로 개편되고 1909년 일본인 민간회사인 일한와사에 합병되는 과정을 명확히 확인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미전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영되었는지, 그리고 한미전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미국과 일본의 갈등양상과 그 해소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간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던 한미전기의 일한와사로의 합병과정을 확인함과 동시에 전력산업사연구를 체계화하는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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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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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전기, 한미전기, 일한와사, 일한와사전기, 澁澤榮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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