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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연극의 형성에 미친 「협률사」의 영향에 대한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개화기 연극의 형성에 미친 「협률사」의 영향에 대한 연구 | 2004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김재석(경북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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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G00060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5년 12월 30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5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그간의 논의에서는 고종의 칭경예식을 위하여 「협률사」를 만들었으나, 칭경예식이 연기되면서 일반 극장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러한 설명은 여러 면에서 애매한 점을 안고 있다. 먼저, 고종의 칭경예식 계획에 「협률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칭경예식을 위해 「협률사」를 세웠다면 어떠한 용도로 사용할 예정이었는지가 드러나야 할 터인데 계획 중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리고 고종의 칭경예식이 국가와 황실의 위상을 제고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보자면, 「봉상시」 건물의 일부를 사용하여 극장을 설립 했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서구의 대극장을 모범으로 삼은 극장을 건축하는 편이 칭경예식을 빛내기에 더욱 적합하기 때문이다. 「협률사」의 위치도 현재 알려진 것처럼 봉상시 구내에 있지를 않고 야주현 근처의 현 새문안 교회 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당시 언론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협률사」의 활동과 칭경예식의 진행을 비교해보면 일치되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협률사」는 칭경예식과 무관하게 영업활동을 하고 있으며, 1902년 12월에 내외진연이 거행되는 동안에 <소춘대유희>를 공연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장봉환과 같은 관헌, 혹은 당대 사회의 유력자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희대회사가 「협률사」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다. 그 당시 관료들이 주축이 되어 회사를 설립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회사들은 반관반민의 형태로 운영되어 백성들에게 혼란을 안겨 주기도 했다. 「협률사」의 경우도 그러한 관례를 이용하여 영업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06년에 「협률사」 혁파론이 일어났을 때, 「협률사」가 궁내부 소속으로 거짓행세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에서 그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협률사」는 근대적 공연 체계를 개화기 연극계에 도입 시키는 한편, 새로운 공연물을 제작하여 개화기 연극계의 변화를 선도해 나갔다.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희대회사이기 때문에 관객들의 취향을 고려하여 새로운 공연물을 계속 만들어야 했다. 「협률사」의 설립 주체들이 양반인 까닭에 그들이 접해 왔던 기녀들의 공연물과 판소리를 선택하여, 실내극장에 공연하기 좋은 형태로 해체하여 재구성하였다. 그 결과 <소춘대유희>와 같은 종합적 연행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종합적 연행물은 관객의 취향에 맞추어 계속 재구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판소리에서 창극이 생성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기생들을 공연무대에 불러들인 것도 특기할만한 사실인데, 「협률사」로 인하여 등장한 기생 출신의 배우들이 1910년대 여성 배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협률사」의 종합적 연행물은 서사성이 아주 약한 공연물이다. 그러므로 「협률사」의 공연물은 본질적으로 개화담론을 수용할 여지가 없다. 관객에게 관람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지, 관객에게 애국·계몽담론을 전하는 공연물은 아닌 것이다. 「협률사」 공연물과 영업 방침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는 1906년에 이르러 연극개량론을 촉발시킨다. 연극개량론자들은 「협률사」의 공연물이 고전극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고전극 자체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 당시로서는 추상적이고 모호하기만 했던 서구극의 효용성에 연극개량론자들의 기대가 집중된 것도 「협률사」의 공연물을 부정하는 태도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 영문
  • Up to now it was known that Hyupyul-sa was made to hold the celebration of King Kojong and it changed into an ordinary theater because the celebration was postponed. But according to the press of those days which can make us compare the activities of Hyupyul-sa with the progress of the celebration, we come to know that Hyupyul-sa was never used to hold the celebration. And unlike the fact that Hyupyul-sa was in Bongsangsi, it can be guessed that it was in the building of the Bureau of Northwest Rail Road near Yajuhyun. Hyupyul-sa had been in business regardless of the celebration of King Kojong. Even during the December of 1902 when the banquet for King Kojong was being held, Sochundaeuhee was performed in Hyupyul-sa.
    In this terms, it is more reasonable that government officials like Jang Bonghwan and the leaders of society founded Hyupyul-sa, a company of public performance. It was usual those days that the company was founded with the government officials as centering figures. These companies were managed as the company related a government, so the ordinary people were confused about them. It seemed that Hyupyul-sa also was in business taking advantage of this custom. Because of this, Hyupyul-sa was blamed for pretending to be a council for royal household, when the opinions to quit the Hyupyul-sa's public performance was brought up in 1906.
    Hyupyul-sa fixed the modern system of performance to the theatre world of an enlightened age and took the lead the change of theatre by making new works. It was that Because Hyupyul-sa was a company of performance in pursuit of profits, it had to keep on making the new works considering the audience's tastes. Because the centering figures founding Hyupyul-sa were the aristocrats, they deconstructed Pansori and the performance of show girls whom they had contacted and reconstructed them as the performances more suitable to inside theatre. As the result, the variety shows like Sochundaeuhee were made. The variety shows which seemed to be reconstructed to be fit to the audience's tastes gave the opportunity of creating Changguk from Pansori in its proces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그간의 논의에서는 고종의 칭경예식을 위하여 「협률사」를 만들었으나, 칭경예식이 연기되면서 일반 극장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러한 설명은 여러 면에서 애매한 점을 안고 있다. 먼저, 고종의 칭경예식 계획에 「협률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칭경예식을 위해 「협률사」를 세웠다면 어떠한 용도로 사용할 예정이었는지가 드러나야 할 터인데 계획 중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리고 고종의 칭경예식이 국가와 황실의 위상을 제고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보자면, 「봉상시」 건물의 일부를 사용하여 극장을 설립 했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서구의 대극장을 모범으로 삼은 극장을 건축하는 편이 칭경예식을 빛내기에 더욱 적합하기 때문이다. 「협률사」의 위치도 현재 알려진 것처럼 봉상시 구내에 있지를 않고 야주현 근처의 현 새문안 교회 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당시 언론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협률사」의 활동과 칭경예식의 진행을 비교해보면 일치되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협률사」는 칭경예식과 무관하게 영업활동을 하고 있으며, 1902년 12월에 내외진연이 거행되는 동안에 <소춘대유희>를 공연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장봉환과 같은 관헌, 혹은 당대 사회의 유력자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희대회사가 「협률사」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다. 그 당시 관료들이 주축이 되어 회사를 설립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회사들은 반관반민의 형태로 운영되어 백성들에게 혼란을 안겨 주기도 했다. 「협률사」의 경우도 그러한 관례를 이용하여 영업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06년에 「협률사」 혁파론이 일어났을 때, 「협률사」가 궁내부 소속으로 거짓행세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에서 그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협률사」는 근대적 공연 체계를 개화기 연극계에 도입 시키는 한편, 새로운 공연물을 제작하여 개화기 연극계의 변화를 선도해 나갔다.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희대회사이기 때문에 관객들의 취향을 고려하여 새로운 공연물을 계속 만들어야 했다. 「협률사」의 설립 주체들이 양반인 까닭에 그들이 접해 왔던 기녀들의 공연물과 판소리를 선택하여, 실내극장에 공연하기 좋은 형태로 해체하여 재구성하였다. 그 결과 <소춘대유희>와 같은 종합적 연행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종합적 연행물은 관객의 취향에 맞추어 계속 재구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판소리에서 창극이 생성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기생들을 공연무대에 불러들인 것도 특기할만한 사실인데, 「협률사」로 인하여 등장한 기생 출신의 배우들이 1910년대 여성 배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협률사」의 종합적 연행물은 서사성이 아주 약한 공연물이다. 그러므로 「협률사」의 공연물은 본질적으로 개화담론을 수용할 여지가 없다. 관객에게 관람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지, 관객에게 애국·계몽담론을 전하는 공연물은 아닌 것이다. 「협률사」 공연물과 영업 방침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는 1906년에 이르러 연극개량론을 촉발시킨다. 연극개량론자들은 「협률사」의 공연물이 고전극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고전극 자체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 당시로서는 추상적이고 모호하기만 했던 서구극의 효용성에 연극개량론자들의 기대가 집중된 것도 「협률사」의 공연물을 부정하는 태도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개화기 연극 연구 활성화의 계기로 활용

    그 동안의 연구 상황을 고려할 때, 미발굴 대본의 발견이라는 획기적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한 개화기 연극에 대한 연구는 미시적 시각에서 진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신문·잡지에 실린 개화기 연극 관련 기사와 연극인들의 평문·회고담에서 의미 있는 자료들을 추출하여 보완함으로써 개화기 연극 관련 지형도를 구축하는 일이 급선무이겠다. 이번 연구를 통해 「협률사」의 구체적 모습이 밝혀진다면, 개화기 연극의 초창기 모습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리라고 본다. 「협률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고전극(전통극)에서 근대극으로 전환되는 시기 한국 연극의 역동적 움직임을 포착함으로써 한국 연극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가 있게 될 것이다. 「협률사」에 대한 이번 연구의 결과는 한 동안 주춤하고 있는 개화기 연극 연구를 다시 활성화하는 계기로 충분히 작용하리라 믿고 있다.

    2) 한국 연극사 서술에 활용

    「협률사」의 설립과 운영 측면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이번 연구는 올바른 한국연극사 서술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개화기 연극의 성격을 제대로 밝혀내지 않고서는 한국연극사 서술이 어렵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통극과 근대극의 관계, 일본연극과 한국연극의 관계, 전통연극의 배우들과 신극 배우들의 성향 등등의 산적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개화기 연극 속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에서 다루는 「협률사」는 최초의 서구적 연극 공연장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개화기 연극을 기획하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개화기 연극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특별한 존재라 하겠다. 따라서 이번 연구에서 얻어진 성과는 한국 연극사 서술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중요하게 활용될 것이다.
  • 색인어
  • &#65378;협률사&#65379;, 극장, 고종의 칭경예식, 개화기, 연극개량, 종합적 연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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