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주제 酉山 丁學淵의 생애와 시세계: 본 연구는 다산학단 구성원 가운데 시문학으로 가장 두드러졌던 정학연의 교유와, 해남, 강진의 초의, 황상, 이청, 이강회 등이 서울의 학인, 문사들과 맺은 교유 양상을 살핌으로써 유배지에서 꽃피웠던 다산학이 어떻게 서울, 근기로 ...
제1주제 酉山 丁學淵의 생애와 시세계: 본 연구는 다산학단 구성원 가운데 시문학으로 가장 두드러졌던 정학연의 교유와, 해남, 강진의 초의, 황상, 이청, 이강회 등이 서울의 학인, 문사들과 맺은 교유 양상을 살핌으로써 유배지에서 꽃피웠던 다산학이 어떻게 서울, 근기로 연결 또는 확장되는지를 고찰했다.
제2주제: 다산시학의 계승과 변화: 다산 시학의 계승 양상은 "시는 經으로써 근본을 삼고, 史로써 波瀾을 삼는다.(詩以經爲根柢, 以史爲波瀾)"는 ‘經史’중시의 시론에서 확인된다. 도덕적 수양과 학문의 축적을 강조한 이 주장은 아들 유산 정학연과 외손 방산 윤정기로 계승되며 동일하게 주장되지만, 또한 각기 다른 관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산은 경세사상에 입각하여 위 주장을 전제했다면, 유산과 방산은 개성적 시세계를 창출하기 위한 기반으로 여겼다. 유산이 ‘王孟韋柳’류를 추종하며, 가을의 연작시를 즐겨지었으며, 방산 또한 ‘紅葉’과 같은 가을의 풍물을 중심으로 시세계를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경사’중시의 변화된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제3주제 李綱會의 經世思想: 다산학단은 정약용의 경세학을 계승하면서 이를 한층 더욱 발전시켰다. 기존연구에서 다산학은 근기 남인 경세학의 총집대성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다산학을 계승 발전시킨 다산학단 이강회의 경세학과 현실관은 근기 남인의 실학사상이 어떻게 최종적으로 정리되어 나갔는지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강회는 주례 연구에 북학사상을 융합하면서 다산학을 한 층 더 발전시켰다. 또한 수레와 배에 대한 선진적인 논의를 전개시켰고 군주권과 법·기강을 중시하는 경세이념을 주장하였다.
제4주제 舫山 易學의 特徵과 그 易學史的 位相: 다산학단의 일원이었던 舫山 尹廷琦는 易傳翼이라는 저작을 남겼다. 이를 통해서 다산학단 역학 연구의 일 양상을 알 수 있다. 윤정기의 역 해석은 괘와 괘, 효와 효 사이의 유기적 연관, 象의 중시로 인한 설괘전과 대상전의 중요성 강조, 효변에 의해 생성된 之卦의 괘상을 本卦 해석의 결정적 근거로 규정하는 ‘변화’ 중시의 역 해석 방법 등을 주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방산 역학의 특징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象과 爻變의 중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역학사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윤정기의 역학은 도상역을 배척하고, 상과 효변을 중심으로 하는 상수역을 근간으로 삼고 있는데, 다산학파의 상수역은 바로 주자의 그것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좀더 세밀한 고증이 필요하지만 다산과 방산이 상과 효변을 중심으로 하는 자신들의 역학체계의 근원을 주자의 역학에서 구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제5주제 이청의 정관편과 천문학 이해: 다산학단은 천문학에도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이청의 정관편은 다산학단의 천문학 연구수준이 어느 정도까지 도달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역작이었다. 이청의 정관편은 노론에 비해서 천문역산 분야의 문헌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남인, 특히 다산학단의 천문역산에 대한 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헌이었다. 19세기 편찬된 조선의 천문역산 문헌들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분량도 많은 정관편에 대한 연구는 다산학 속에서 천문학 인식과 전개과정, 나아가 19세기 조선 천문학의 발전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정관편 연구를 통해서 이청의 천문학 연구는 풍부한 자연철학적 사색을 가졌던 최한기와 전문가적인 역산지식을 가졌던 남병철의 중간적 성격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6주제 茶山學團’ 詩文學의 實學的 성격에 대하여: 다산학단 시문학이 가지고 있는 실학적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다산학단은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정약용의 사회시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전문적인 저작의 집필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다산학단 시문학의 중요한 특징들이었다.
제7주제: 다산학단연구서설: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단순한 비판에서 벗어나 대안으로 방대한 경세학을 구축했던 정약용은 당대에 이미 그 명성이 지식인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정약용은 강진지역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18년간의 세월을 보내면서 여유당전서를 집필하였다. 이 저작은 다산학단이라는 제자그룹의 도움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다산학 형성에 다산학단의 역할을 큰 것이었으며 조선후기 실학사 속에서 이들의 존재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