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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기 한의학의 제도, 이론적 근대화에 관한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식민지시기 한의학의 제도, 이론적 근대화에 관한 연구 | 2005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여인석(연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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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S0016
선정년도 2005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12월 1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연구는 한국사의 중요 주제인 사회의 근대화라는 문제를 의학 분야를 통해 천착한 것이다. 식민지시기 한의학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제도적인 차원의 변화를 모색할 수 밖에 없었는데고, 그 변화는 한의학 이론의 차별화, 정교화로 이어졌다. 즉, 한의학은 한국사회의 한 구성 요소로서 서양적 근대라는 외부적 요소에 의해 가속화된 근대화의 흐름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들은 한의학의 ‘민족성’을 강조한 결과 그 변동에 주목하지 못하거나, 비록 변화에 주목했다 하더라도 제도적인 그것만을 탐구한 결과 그 이면에 존재한 근대화의 내용이나 성격에는 시각이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연구는 기존 연구가 주목하지 못한 한의학의 근대화라는 주제를 통해 한국사회가 공통적으로 겪은 근대화가 의학, 특히 한의학 분야에서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밝혔다. 그리고 이 연구는 한국사의 주요 성과 중 하나인 구조적 분석을 의학 분야에 적용시켰다. 식민지시기 서양의학을 전공한 일본 의사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한의학에 대한 신뢰감이었다. 그 신뢰감은 한의학이 치료 효과가 있다는 임상적 관점을 넘어 지배와 피지배라는 정치적 관계, 치료비의 다과라는 경제적 관계, 전통과 외래라는 문화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한의학의 소비라는 선택의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식민지 정치, 경제, 문화적 구조에 대한 연구는 식민지시기 한의학의 문제를 소재주의를 넘어서 한국사 일반의 보편적인 문제의식 속에서 고찰하는 성과를 낳았으며 이는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식민지적 근대성을 의학, 특히 한의학 분야에서 밝힌 작업이기도 하다.
  • 영문
  • Korea opened her gate to outer world in 1876. This opening brought considerable changes to every field of Korean society and medicine was no exception. The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initiated by Western missionary boards and Japanese, offered an opportunity of comparison between Western medicine and traditional medicine. The reactions of the traditional practitioners to the newly introduced Western medicine were twofold. Some of them were active in accepting Western medicine and tried to integrate it in traditional medicine. Others showed, however, conservative and they even expressed their antipathy toward Western medicine. But in one way or the other, traditional medicine had to face this challenge and on the process of coping with this problem the identity of traditional medicine underwent considerable changes.
    The efforts for the encounter came not only from the camp of traditional medicine but also from that of Western medicine. Some Western doctors, including, missionaries and Koreans, dedicated themselves to serious studies of traditional medicine. Some attempted translation of important traditional medical texts into English, and others tried to compromise the two different traditions.
    The Korean Government was active in introducing Western medicine and adopted it in planning a new public health system. However, the Korean Government showed no predilection for Western medicine. She tried to harmonize the Western medicine, proved effective in surgical treatment, with the traditional medicine, considered competent in internal medicine. And the national health policy was carried out from this perspective.
    But the annexation of Korea by Japan had changed the policy. The Western medicine was privileg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in General and the traditional medicine was beginning to be excluded from the public sector. While the Japanese Government in General issued licence, called Eui-Sang, for traditional practitioners who had been practicing medicine, they rendered it difficult to get a new licence. This policy was aiming at reducing the number of traditional doctors by the course of time and eventually replacing them by the doctors trained in Western medicine. The policy was a partial success. The number of traditional doctors did decrease, but they were far from being replaced by the doctors of Western medicine since the number of doctors was not enough to cover all the medical demands of the country.
    The traditional doctors tried to unite themselves to fight through this challenging situation and gaining and retaining their rights. The first nation-wide society for traditional doctors was organized in 1915. But the society was suffering from internal conflicts and soon division was followed. After the failure of the first society, efforts for uniting the traditional doctors continued, and new societies were organized.
    Today it seems to be the common view of the camp of traditional medicine that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was the period of a great persecution. But our studies shows that it was the period when the foundation for modernization of traditional medicine had been laid dow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876년 개항 이후 서양 문물과 의학이 수입되면서 기존의 한의학이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1885년 정부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에서 서양 선교의사를 고용해서 서양의술을 시술하는 한편 서양의학 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한의학에 대해서는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의학에 대한 본격적인 조치는 갑오개혁기에 처음 이루어졌다. 국가 최고의 의료기관이었던 내의원이 왕실의료에 국한되었으며, 오랫동안 관직 의원을 양성해온 기관인 전의감이 폐지되었고, 의과 역시 철폐되었다. 반면에 위생국이 설치되었고, 서양식 의학교와 병원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서양의학과 한의학에 관한 분명한 정책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동서의학의 장점을 절충하려는 정책이었다. 서양식 의학 교육기관이 설립되었고, 동서양 절충의 국가병원이 설립되었다. 한의 인력에 대한 면허제가 실시되었고, 근대적 형태의 한의학 교육 기관의 설립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
    조선(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조선의 한의약에 대한 정책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대등한 수준으로 고려했던 대한제국의 정책과 달리 식민지 통치자가 된 일본제국은 서양의학만을 공식적 의학으로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에서와 달리 한의 제도를 인정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그것을 서양의학보다 주변적인 것으로 위치 지었다. 그것은 한의를 의사보다 열등한 지위로 규정한 점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1930년대 이후 만주사변, 중일전쟁, 대동아전쟁 등 대규모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총독부의 한의학 정책에서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첫째, 한약의 재배와 채취, 한약의 연구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의약품의 부족을 한약으로 대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대대적으로 약재의 채취와 재배가 강제되었고, 경성제대 의학부에 생약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동⋅�식물 약재에 대한 한약국방이 제정되었다. 둘째,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그동안 크게 위축되어 있었던 한의약계의 ‘한의학 부흥’ 운동이 커다란 사회적 주목을 끌었다. 절반 정도로 줄어든 한의 숫자가 이들의 위기감을 촉구했고, 일본의 황한의학계의 이론적 작업과 중국의 한의학계의 성취가 조선의 한의약계에 큰 자극을 주었다. 셋째, 전쟁의 격화로 의료 인력이 크게 부족하게 되자 총독부에서는 그동안 "금기시" 했던 한의인력의 공식적인 양성을 허가했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 3년에 걸쳐 의생 단체의 주도하에 의생의 집단적인 양성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보다 조금 앞서 1934년 총독부 기관인 전염병 병원 순화원에도 한방부가 공식적으로 설치되어 진료를 시작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한의학은 서양의학이 해부학이나 생리학과 같은 구체적인 인간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며 발달해 온 점에 착목하여 인간과 우주의 상관성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서양의학이 개별적인 인간이라는 국소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이 인간과 우주,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질병에 대해 보다 종합적인 이해와 치료방식을 추구하고 있다는 대응논리를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한의학이 이미 개항 이전에 형성된 의학론에 입각해 있다 할지라도, 그중 어느 부분을 강조할 것인가는 서양의학과 대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식민지시기는 한의학의 소멸이 예견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 대응책의 모색은 보다 심각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의학이 양생이나 자연치료를 강조한 것 역시 외과 수술이나 주사 등 서양의학의 장점으로 간주되던 치료법과 다른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보인다. 서양의학의 효과가 외과학이나 전염병학을 중심으로 입증되는 상황에서 그 빈 공간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학이 조선 전체를 포괄할 만큼 공급되지 않는 조건 속에서 한의학이 독자적인 치료영역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유리했다.
    식민지시기 한의학이 강조한 개념 중의 하나는 서양의학과 달리 민중 친화적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1930년대 동서의학논쟁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조헌영은 한의학이 진료비면에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쉬운 ‘평민의술’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들이 장기간의 교육기간을 거치고 배출됨에 따라, 관립이나 공립병원이 새로운 진료설비 확보나 인력 충원을 진행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비싼 진료비를 요구하고 있었던 점에 착목한 것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조선 후기 이전까지 한의학은 왕실을 비롯한 양반지배층을 주 소비층으로 삼고 있었다. 한의학을 소비할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지 못했던 민중들은 민간요법이나 무당 등 미신적 치료법에 기대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민중의학 개념은 식민지시기에 서양의학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특히 민중개념은 식민지배라는 현실적 제약조건 아래서 민족개념을 명시적으로 거론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제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양생론이나 자연치료, 우주와의 상관성을 강조하는 측면들은 이미 전통적인 한의학에 내재되어 있던 것들이었다. 따라서 식민지시기 한의학의 정체성은 새로 개발된 측면 못지 않게 그동안 한의학이 간직해왔던 개념들 중 일부를 적극 개발한 측면이 있다. 서양의학의 약점이나 서양의학이 광범위하게 침투하지 못한 공간을 활용해야 하는 현실적 요구 속에서 전통적인 이론이나 개념들에 대한 천착과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색인어
  • 근대, 한의학, 서양의학, 의생, 한방, 면허, 의료정책, 위생, 제중원, 전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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