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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의 新羅와 日本 관계 -‘倭典’의 ‘別置’ 문제를 중심으로-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의 新羅와 日本 관계 -‘倭典’의 ‘別置’ 문제를 중심으로- | 2005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서보경(東京大學)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05
선정년도 2005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7년 07월 10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신라의 대외관계에 기초해 본다면, 675신라와 당의 대립이 전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671년부터 신라는 일본과의 교섭에 ?別獻物?이라는 형태로 다량의 물품을 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형태의 물품 증여는 679년부터 시작하여 68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대외교섭을 담당한 영객부가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일본을 대상으로 한 관사인 倭典을 별도로 설치한 것은, 對日 교섭에 소요되는 물품을 원만하게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그러므로, 內省 휘하에 왜전이 설치된 시기는 신라의 對日 교섭이 급증하는 문무왕 19(679)년경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아울러, 신라의 일본을 향한 이른바 ?別獻物? 형태의 교섭이야말로 율령국가를 정비하고 있던 일본의 필요라는 부분과도 맥을 같이하는 움직임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신라가 일본과의 교섭에 다양한 물건을 다량으로 공급하는 ?別獻物? 형태의 교섭을 취한 시기는 실재적으로 당의 위협 즉 재침의 가능성이 남아 있고, 신라 내부의 안정에도 문제가 남아 있던 때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태의 대일교섭은 신라의 전략외교를 상징하는 하나의 사례로 이해된다. 따라서, ?왜전을 별치?한 신라의 對日 외교 정책이야 말로 현실에 부응하는 외교정책의 표본이라 여겨진다.
  • 영문
  • Relation between Shilla and Japan?in?the Late 7th to the Early 8th Century
    -focused on the Additional Establishment of Waejeon-

    I tired to expound when and under what situation Waejeon was established in political changes in East Asia surrounding Shilla; I'd like to complete my theory by examining issues above mentioned.
    At first, in around 675 or 676 when the war between Shilla and Tang ended, Shilla came to almost end its relations with Tang; on the contrary, the former was being increased its negotiations wiht Japan. Based on Shilla's foreign?relations with other nations, additional establishment of officials in charge of welcoming foreign visitors can be hard to understand without taking consideration into its relationship with Japan since this step was taken under the days when Shilla's negotiations were dramatically reduced; it is apparent to understand that Ryunggaekbu was in constant charge of its negotiations with Japan. Therefore, the existing insistence is clearly indicated that Waejeon was additionally established for Shilla to make Ryunggaekbu take charge of foreign courtesy procedures for Japan by setting up Ryunggaekbu specializing in foreign affairs with Tang in 651.
    Secondly, from 671 when the opposition between Shilla and Tang began to appear full-blown, Shilla started to deliver great amount of articles called additional gifts; this kind of tributary delivery continued from 679 to the late 680. Consequently, despite the existence of Ryunggaekbu in charge of foreign negotiations, Shilla's extra establishment of Waejeon- seen as an official residence for Japan- was reflected as an action to effortlessly procure articles needed for negotiations with Japan. Accordingly, I expressed there is a possibility that the time when Waejeon was set up under Naesung one?of Shilla's many ministries- was around King Munmoo19, or 679, when Shilla showed noticeable increase in negotiations with Japan. Also, Shilla's very type of negotiations so-called additional gifts articles to Japan- were pointed out as the moves coincided with Japan's need in this context.
    ?? Finally, the time when Shilla took the negotiations through delivering-that is of Shilla supplying large amount of various goods in negotiating Japan-was when there remained threats from Tang, to put briefly when there stood?chances were Tang's second invasion upon Shilla and, at the same time, when there existed instable safety concerns in Shilla inside; this sort of Shilla-Japan's negotiations are considered just an example symbolizing Shilla's strategic diplomacy.
    ??? In short, Shilla's very foreign policy of additionally establishing Waejeon will be thought of as an illustration of realistic one corresponding to its situation at that tim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倭典이 別置’된 시기와 배경이 무엇인지를 신라를 둘러싼 동아시아 정국의 변화상 속에서 밝혀보고자 했다. 검토의 결과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우선, 신라는 나당전쟁이 종결되는 675․676년경이 되면 당과의 관계를 거의 단절하기에 이르지만, 일본과의 교섭은 이와는 반대로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신라의 대외관계에 기초해 본다면, 675년에 이루어진 領客府의 관원 增置는, 대당교섭이 급격히 감소하는 시기에 이루어진 조치였던 만큼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영객부가 대일교섭을 지속적으로 담당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신라가 651년에 당과의 외교를 전담할 영객부를 설치하면서, 일본과의 외교의례를 담당하게 할 목적으로 왜전을 별치했다는 논리는 재고되어야 할 것임을 명시했다.
    다음으로, 신라와 당의 대립이 전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671년부터 신라는 일본과의 교섭에 ‘別獻物’이라는 형태로 다량의 물품을 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형태의 물품 증여는 679년부터 시작하여 68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대외교섭을 담당한 영객부가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일본을 대상으로 한 관사인 倭典을 별도로 설치한 것은, 對日 교섭에 소요되는 물품을 원만하게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그러므로, 內省 휘하에 왜전이 설치된 시기는 신라의 對日 교섭이 급증하는 문무왕 19(679)년경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아울러, 신라의 일본을 향한 이른바 ‘別獻物’ 형태의 교섭이야말로 율령국가를 정비하고 있던 일본의 필요라는 부분과도 맥을 같이하는 움직임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신라가 일본과의 교섭에 다양한 물건을 다량으로 공급하는 ‘別獻物’ 형태의 교섭을 취한 시기는 실재적으로 당의 위협 즉 재침의 가능성이 남아 있고, 신라 내부의 안정에도 문제가 남아 있던 때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태의 대일교섭은 신라의 전략외교를 상징하는 하나의 사례로 이해된다. 따라서, ‘왜전을 별치’한 신라의 對日 외교 정책이야 말로 현실에 부응하는 외교정책의 표본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고대의 한,중,일 관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현재의 한․중․일 관계에 대한 현실 인식 提高
    21세기의 동아시아는 종래와 같은 국경의 개념을 초월한 인적, 물적인 왕래를 통해, 유대 관계를 한층 심화해 나갈 것이라 예견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독도’ 문제를 비롯한 한국과 일본 간의 영토 분쟁과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문제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 간의 논쟁에서도 나타나듯이 대립 양상 역시 엄연히 존재한다. 따라서,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개별 국가간에는 ‘평화’와 ‘화합’을 지향하는 측면과 함께 ‘충돌’과 ‘대립’을 지향하는 측면이 아울러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과 인식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에 대한 확고한 견해와 인식의 틀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고대의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한․중․일 삼국의 움직임 속에서 유기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은 양국 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안이 된다고 생각된다.

    국외 연수의 효과를 수업과 세미나에 연계
    한․일 관계 기사에 등장하는 한․일 간의 교섭의 루트나 기항지로 알려진 지역에 대한 답사를 통해, 문헌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때 파생될 수 있는 결함을 보완하고자 했다. 이 경우, 답사과정에서 촬영한 생생한 영상자료는 이후 강의를 위한 멀티미디어 교재로 활용하고자 한다.
    또한, 연수 기간 중에 正倉院 관계 세미나와 ‘사료학 세미나’를 통해 얻은 일본 고대 사료학에 대한 지식을 한국에서의 강의와 세미나 과정에서 전달할 예정이다.
  • 색인어
  • 倭典, 賓禮, 領客典, 領客府, 別置된 왜전, 內省, 井上秀雄, 三池賢一, 鈴木靖民, 李成市, 濱田耕策, 詳文師, 通文博士, 聖德王 13년, 眞德王 5년, 文武王 19년, 天武天皇, 持統天皇, 熊津都督府, 吐蕃, 調物, 別獻物, 金智祥, 金健勳, 金霜林, 唐 高宗, 則天武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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