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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기 어문 운동이 문학에 미친 영향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해방기 어문 운동이 문학에 미친 영향 | 2005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김동석(연세대학교& #40;미래캠퍼스& #41;)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104
선정년도 2005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7년 01월 1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민족 국가 수립이라는 해방기의 역사적 과제 앞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민족어로서의 모국어 회복 운동은 좌우익의 정치 이념적 대립을 떠나 찬반 이론의 여지가 있기 어려운 것이었다. 모국어 상실 위기로까지 치달았던 일제 강점기 경험은 민족의 운명과 언어의 운명을 동일시하게 한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훼손된 모국어의 회복을 통해 민족 정신을 보존할 수 있고 민족 국가의 기반을 확립할 수 있다는 믿음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일본어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어로서의 순수한 모습을 되찾기 위해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모국어회복 운동은 정부 차원의 어문 정책에 그대로 반영됨으로써 우리말과 글이 국어로서의 지위와 위상을 부여받고 본격적으로 규범화 제도화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8월 20일 조선어학회는 새로운 국어회복을 위한 당면 방침을 정하고 8월 25일 열린 임시 총회에서 간사 6명을 선정함으로써 재건되었다. 그 구체적인 활동방향은 국어 교원 양성, 국어 교과서 편찬, 한글지의 속간, 국어 사전 편찬 등이었다. 민족어로서의 모국어 회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 시기 어문 운동은 비단 어학자만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기 문인들에게 또한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으로 다가왔다. 한 좌담회에서 과거 일제 시대 모국어를 버리고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한 사람들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를 감추지 않은 이태준의 발언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민족어로서의 모국어 회복 문제는 당시의 지식인 대부분이 별다른 이견 없이 동의했던 바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는데, 본 논문은 이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이 시기 어문 운동에 대한 문인들의 반응과 문제 의식을 우선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영문
  • A Linguistic movement and literary men`s response in the Liberaton era
    A recovery movement of their own language as a nation`s language was spreading out actively under the historical subject of establishing a nation-state in the Liberation era. An experance of the colonial era by japanese imperialism was enough to be a moment to regard a language`s destiny in the same light as the nation`destiny. A Linguistic movement of the Korean Language Society to clear off vestiges of Japanese and to regain a purity as a nation`s language had an direct effect on a language policy of the government. At this point, the korean language was get down to standard and organizaton with status as a nation`s language.
    The Korean Language Society fix a confrontation task to establish a new nation`s language on August 20, 1945 and made a restart opening an extraordinary general meeting on August 25, 1945. They took an active part in training korean teachers, editing materials for korean instruction, a continuation of publication the society organ, and the compilation of a korean dictionary. The korean problems come up to not only linguists but literary men, importantly and susceptively in this era. The speech of Lee Tae-joon, criticized in acrid tones about authors writing in japanese, was showing that such being the case. The majority of the intellectuals in the Liberaton era subscribe to a recovery movement of their own language as a nation`s language. but they come into conflict in concerning the details. This paper aims to inquire into a linguistic movement and literary men`s response in the Liberaton era.

    Key-words : linguistic movement, controversy over the abolition of Chinese characters, a survey of public opinion, nation language, literary styl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의 목적은 해방기 어문 운동과 이 시기 문학 사이의 영향 관계를 탐색하는 데에 있다. 이에 본 연구자는 크게 두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하나는 해방기 어문 운동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관련된 이 시기 문인들의 대응 양상과 문제 의식에 대한 것이다. 해방 직후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로 다가온 것은 일제 잔재 청산 문제였다. 일제 식민지 통치 하에 살아야 했던 대부분의 작가들은, 스스로가 이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황도문학 수립의 기치를 내세우고 결성되었던 조선문인보국회(1943.4.17)가 있었던 자리(종로 한청빌딩)에, 해방된 바로 다음 날(1946.8.16), 문인들이 모여 치욕스러운 옛 간판을 내리고 조선문학건설본부라는 새 간판을 내걸었던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방 직후 전개된 일련의 자기 비판 논의는 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각종 언론 매체에서는 자기 비판 논의를 의제로 앞다투어 유명 작가들을 초빙하여 좌담회를 개최하였는데, 아서원 좌담회니 봉황각 좌담회 등은 모두 이에 해당한다. 과거의 자기 삶과 문학에 대한 전반적 비판과 새로운 방향 정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대한 응답이 이른바 문인들의 자기 비판 논의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이 시기 어학자들은, 자기 비판 논의의 한 가운데 있었던 문인들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그러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일제 말기 조선어학회 사건(1946. 10.1)으로 인하여 주요 관련자들이 검거되고, 해방된 이후에야 이들이 감옥에서 풀려났다는 사실은 일제 치하에서의 우리말 연구가 곧 일제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하였고, 이는 민족 운동으로서의 우리말 연구가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과 그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8·15 해방으로 함흥에서 출옥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을 맞이한 <조선어학회>는 1945년 8월 20일, 신속한 국어 회복을 위한 당면 방침을 정하고, 8월 25일, 임시 총회에서 간사 6명을 선정함으로써 재건되었다. 그 구체적인 활동 방향은 국어 교원 양성, 국어 교과서 편찬, 《한글》誌의 속간, 국어 사전 편찬 등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조선어학회는, 당시 극심했던 좌우 정치적 이념 대립의 직접적 소용돌이로부터 빗겨나, 각계 각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출발했다. 한편, 민족어로서의 모국어 회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 시기 어문 운동은, 비단 어학자만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기 문인들에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다시 말해, 민족어로서의 모국어 회복 문제는 당시의 지식인 대부분이 별다른 이견 없이 동의했던 바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구체적인 사안과 방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는데, 이에 대한 면밀한 자료 조사를 통해, 크고 작은 편차를 고려한 이 시기 문인들의 언어 의식과 민족 의식에 대한 지형도를, 개괄적으로나마, 도출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개항 이후 19세기 말 언문일치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일제 시대 어문 운동의 특징적 면모는, 식민지적 근대와 민족주의적 근대가 혼재된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조선어에 대한 일제의 국책(‘언문철자법’)에 협조하는 성격을 지녔는가 하면, 또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국책(‘민족어 말살 정책’)에 저항하는 성격을 지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록 타력에 의한 것일지언정,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은, 이른바 ‘민족 담론’과 관련하여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식민지적 근대에 대한 치열한 비판과 민족주의적 근대에 대한 전면적 옹호가 해방 직후 담론적 상황의 중심을 이루었고, 특히 그러한 담론적 상황은 새로운 정체(政體)를 수립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와 맞물리면서, 이 시기 거의 모든 논의(친일 잔재 청산, 외세 의존 배격, 봉건 잔재 청산 등)는 ‘민족 국가 담론’으로 수렴되었다. 이 때, 민족어로서의 모국어 회복 운동을 기치로 내세운 <조선어학회>의 재건(1945.8.25)은 해방기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 시대적 요구에 적극 부응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직후 출옥한 이극로 등을 중심으로 재결성된 <조선어학회>는 국어강습회를 개최(1945.9)하여 국어강사를 양성하였는가 하면, 곧이어 미군정청의 지원을 받아 국어교과서를 편찬(1945.12)하였고, 일제 시대의 원고를 찾아 ‘조선말 큰 사전’ 제 1권을 간행(1947.10)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 시기 어문 운동에서 논쟁의 핵으로 떠오른 것은 ‘한자 폐지’ 주장이었다. 1945년 11월에 발족한 미군정청 학무국의 조선교육심의회에서는 12월 8일, 교과서의 ‘한자 폐지와 횡서’를 결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기 어학자들의 입장과 태도는 상반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흥미로운데, 정태진은 한자의 점진적 폐지론을 제안하였고, 최현배는 {글자의 혁명}(1947.5)에서 한자의 즉시 폐지를 주장하였고, 조윤제는 국어 교육을 위하여 한자 폐지 반대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은 어학자들 뿐만 아니라 문인들에게 역시 중요한 사안으로 다가 왔는데, 이에 본 연구자는 그러한 한자 폐지론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의의 양상을 중심으로, 이 시기 문인들이 보여준 반응과 문제 의식을 살펴 보았다.
    본 연구는 일차적으로는 해방기 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이해를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좀 더 장기적인 구도와 연구 계획 속에서는 언어와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한 자생적 담론 생성의 가능성을 마련해보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온갖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치를 내세운, 이 시기에 전개된 다양한 논의와 활동들은, 지금 현재의 우리들 삶의 조건과 경험들에도 직·간접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다. 해방기의 지배적 담론이었던 ‘민족국가 담론’은 오늘날 ‘민족 담론’ 혹은 ‘민족주의 담론’의 형태를 통해 지속적으로 반복·재생산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민족’이라는 표상어가 지시하는 바와 그것을 둘러싼 논의와 논쟁은,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민족’이라는 표상어가 이데올로기의 문제와도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점에서, 민족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해방기는 이를 둘러싼 논의와 논쟁이 가장 직접적이고도 전투적으로 이루어졌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해방기 혹은 해방기 문학을 연구하게 되면, 이를 연구하는 연구자 역시 그 시대가 보여준 열광과 환희, 혹은 폭력과 억압의 분위기 속에 휩싸이기 쉬운 것 역시, 사실이다. 이 시기 어문 운동을 비롯한 언어 문제(언어 의식)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 시기 문학을 살펴보는 것은, 이런 면에서, 그러한 위험성을 최소화하는, 한 가지 방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국어학과 국문학으로 갈수록 분과화되고 고립화되어 가는 연구 경향에 대한 비판적 문제 의식 속에서, 각 분과에서 축적해 온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비교 종합함으로써 새로운 연구 방향과 접근을 모색하고자 하는 학제 간 연구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 색인어
  • 어문 운동, 한자 폐지론, 여론 조사, 민족어, 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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