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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한문산문의 성격과 의의에 관한 연구
Reports NRF is supported by Research Projects( 조선중기 한문산문의 성격과 의의에 관한 연구 | 2005 Year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김우정(한양대학교) ) data is submitted to the NRF Project Results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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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A00136
Year(selected) 2005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07년 04월 26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07년
Research Summary
  • Korean
  • 본 연구는 한국 한문산문의 통시적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분절점인 조선중기, 특히 선조‧광해 연간 문단의 동향과 성격을 둘러싼 기왕의 논의를 반성적으로 검토하고 그 실제적 구현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이 시기 문단의 특징은 古文辭, 즉 복고적 문풍의 등장으로 요약된다. 尹根壽와 崔岦에 의해 창도되고 유몽인과 허균 등에 의해 재해석된 복고적 문풍은 당시 중국 문단을 풍미하던 前後七子의 문론과 흡사하다. 이들이 전후칠자에 주목하였음은 그들 자신의 독서편력과 평론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더러 후대의 논평 역시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때문에 이들을 당송문 위주의 문체 특징을 보이는 조선전기 문장가들과 구별하여 하나의 유파로 묶고, 전후칠자 문장의 수용을 통해 의고파 또는 진한고문파가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작가의 문장관과 작품 세계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전후칠자의 영향이 생각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유파의 성립을 인정할만한 공통분모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중기는 진한 이전의 산문을 전범으로 삼는 복고적 문풍과 韓愈 柳宗元 歐陽修 蘇軾 등 당송 제가의 산문을 법식으로 삼는 당송고문이 본격적으로 분기하는 시기로, 典範의 설정과 적용, 자득과 모의, 내용과 형식, 문체와 수사 등에 관한 관심을 촉발시킴으로써 산문에 대한 인식과 지평을 넓혔다. 이들은 註疏語錄體와 軟美한 館閣文으로 대표되던 조선전기의 문풍과 구별되는 기굴하고 험벽한 선진문의 체식을 구현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이 추구한 문체는 동시대의 문인인 許筠 張維 李植 등이 지향한 당송문 위주의 平易하고 直實한 문장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파적 성격을 띠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개별 작가 단위로 들어가 그 이론과 실천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유파로 묶기에는 예외적인 면모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최립과 더불어 고문사를 창도했다고 평가받는 윤근수를 예로 들자면 李夢陽의 詩選集을 간행하고 王世貞의 [史記纂]을 본뜬 [史纂]의 간행을 추진하는 등 전후칠자의 작품에 심취했지만 실제 창작의 영역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반면 최립의 경우, 고문사를 가장 선명하게 실현한 작가로 평가받지만,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전후칠자의 존재에 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의 작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반고와 한유 문장에서 연원한 奇異하고 深晦한 작풍도 나타나지만 정연한 논리와 명료한 행문을 특징으로 하는 구양수 산문의 영향 또한 아울러 확인할 수 있다. 유몽인의 경우, 이 시기의 문인 가운데 가장 분명하고 활발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런데 그는 구양수와 소식 등 송대 고문가들의 문장이 지리하다고 비판하여 복고의 입장을 취했지만, 복고론의 주창자인 이몽양이나 왕세정 등에 대해서도 제가의 문장을 모의하고 표절한 데 불과하다고 혹평하였다. 허균의 경우, 유몽인과 달리 전후칠자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하지만 그는 명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전후칠자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지 전후칠자의 복고론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당시 문단이 언뜻 보기에는 전후칠자의 복고적 문장관에 전적으로 힘입어 선진양한의 산문을 표준으로 하는 새로운 문체를 창출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름의 주체적 판단에 입각해 진한과 당송을 넘나드는 창조적이고 복합적인 문체를 구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곧 조선전기 이래로 누적된 글쓰기의 양태가 이 시기에 이르러 필연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의 문인들은 각각 자신의 사유와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단 내부의 내재적 양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중국의 문학사나 제한적인 논평 자료만을 근거로 복고적 문풍의 출현이 전후칠자의 수용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으로 단정한 기왕의 논의는 재론을 요한다.
  • English
  • This research critically examines existing discussions on the trends and characteristics of the literary circles of the mid-Choson period, especially in the reigns of Seonjo and Gwanghae-gun, and investigates their concrete aspects. This period was chosen because it was an important turning point in the diachronic development of literary Chinese prose in Korea.
    A characteristic of the literary circle of this era lay in the emergence of gomoonsa(古文辭, archaic prose), i.e., retroactive style of writing. This retroactive writing style, which closely resembled the literary theory of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who greatly influenced China's literary circles of the times, was advanced by Yun Geun-su(尹根壽) and Choi Rip(崔岦) and reinterpreted by Yu Mong-in(柳夢寅) and Heo Gyun(許筠). That these Korean literati focused on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can be verified through their reading list and commentaries. This can also be supported by references made by late-Choson critics. Hence the literati were classified by a group distinct from the early Choson writers whose writing style was characterized by proses of Tang and Song dynasties. Moreover, some were of the opinion that Imitative Classicism(擬古派) as well as Qin-Han Classicism(秦漢派) were established through the adoption of the writings of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When these writers' views on writing style are examined in closer detail, however,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influence of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was not as great as was previously thought, nor could a point in common that could have led to the establishment of a literati school be found.
    For Example, Yun Geun-su, who is considered to have created archaic prose along with Choi Rip, became fascinated with the works of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by publishing an anthology of Li Meng-yang(李夢陽) and attempted to publish Sachan(史纂), which took after Shijizuan(史記纂) by Wang Shi-zhen(王世貞), but his efforts did not in fact lead to the sphere of creativity. Yu Mong-in was the most lucid and active in revealing his opinions among the literati of his days. Although he adopted a retroactive position because he criticized the composition of Song classicists such as Ouyang Xiu and Su Shi as being monotonous, he was also severely critical of Li Meng-yang and Wang Shi-zhen, who advocated the retroactive theory, for having imitated and plagiarized other writers' composition. Unlike Yu Mong-in, Heo Gyun was very positive in his evaluation of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and was an inveterate reader of their works. Heo Gyun, however, was interested in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as writers who represented the Ming period; he was not interested in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retroactive theory.
    As mentioned above, the literary world may seem to have created a new literary style based on the prose of the pre-Qin and the two Han dynasties due entirely to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retroactive view on writing. But in reality, the literary world of Joseon realized a creative and complex writing style that crossed over those from Qin-Han and Tang-Song dynasties based on its own subjective judgments. This signifies that the mode of writing accumulated since the first half of Joseon dynasty entered a stage that required change, which led to diverse modes of transformation by Choson literati of the time to suit their own individual thoughts and preferences. In this sense, we must revise past discussions which conclude that China's literary history was accepted as-is without changes to suit the internal aspects of Choson's literary world and that the emergence of the retroactive literary style was due to the acceptance of the former and latter seven masters based only on the limited materials on commentaries which appeared in the late Choson period.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본 연구는 한국 한문산문의 통시적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분절점인 조선중기, 특히 선조‧광해 연간 문단의 동향과 성격을 둘러싼 기왕의 논의를 반성적으로 검토하고 그 실제적 구현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이 시기 문단의 특징은 古文辭, 즉 복고적 문풍의 등장으로 요약된다. 尹根壽와 崔岦에 의해 창도되고 유몽인과 허균 등에 의해 재해석된 복고적 문풍은 당시 중국 문단을 풍미하던 前後七子의 문론과 흡사하다. 이들이 전후칠자에 주목하였음은 그들 자신의 독서편력과 평론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더러 후대의 논평 역시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때문에 이들을 당송문 위주의 문체 특징을 보이는 조선전기 문장가들과 구별하여 하나의 유파로 묶고, 전후칠자 문장의 수용을 통해 의고파 또는 진한고문파가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작가의 문장관과 작품 세계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전후칠자의 영향이 생각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유파의 성립을 인정할만한 공통분모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중기는 진한 이전의 산문을 전범으로 삼는 복고적 문풍과 韓愈, 柳宗元, 歐陽修, 蘇軾 등 당송 제가의 산문을 법식으로 삼는 당송고문이 본격적으로 분기하는 시기로, 典範의 설정과 적용, 자득과 모의, 내용과 형식, 문체와 수사 등에 관한 관심을 촉발시킴으로써 산문에 대한 인식과 지평을 넓혔다. 이들은 註疏語錄體와 軟美한 館閣文으로 대표되던 조선전기의 문풍과 구별되는 기굴하고 험벽한 선진문의 체식을 구현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이 추구한 문체는 동시대의 문인인 許筠, 張維, 李植 등이 지향한 당송문 위주의 平易하고 直實한 문장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파적 성격을 띠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개별 작가 단위로 들어가 그 이론과 실천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유파로 묶기에는 예외적인 면모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최립과 더불어 고문사를 창도했다고 평가받는 윤근수를 예로 들자면 李夢陽의 詩選集을 간행하고 王世貞의 [史記纂]을 본뜬 [史纂]의 간행을 추진하는 등 전후칠자의 작품에 심취했지만 실제 창작의 영역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반면 최립의 경우, 고문사를 가장 선명하게 실현한 작가로 평가받지만,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전후칠자의 존재에 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의 작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반고와 한유 문장에서 연원한 奇異하고 深晦한 작풍도 나타나지만 정연한 논리와 명료한 행문을 특징으로 하는 구양수 산문의 영향 또한 아울러 확인할 수 있다. 유몽인의 경우, 이 시기의 문인 가운데 가장 분명하고 활발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런데 그는 구양수와 소식 등 송대 고문가들의 문장이 지리하다고 비판하여 복고의 입장을 취했지만, 복고론의 주창자인 이몽양이나 왕세정 등에 대해서도 제가의 문장을 모의하고 표절한 데 불과하다고 혹평하였다. 허균의 경우, 유몽인과 달리 전후칠자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하지만 그는 명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전후칠자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지 전후칠자의 복고론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당시 문단이 언뜻 보기에는 전후칠자의 복고적 문장관에 전적으로 힘입어 선진양한의 산문을 표준으로 하는 새로운 문체를 창출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름의 주체적 판단에 입각해 진한과 당송을 넘나드는 창조적이고 복합적인 문체를 구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곧 조선전기 이래로 누적된 글쓰기의 양태가 이 시기에 이르러 필연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의 문인들은 각각 자신의 사유와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단 내부의 내재적 양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중국의 문학사나 제한적인 논평 자료만을 근거로 복고적 문풍의 출현이 전후칠자의 수용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으로 단정한 기왕의 논의는 재론을 요한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본 연구의 수행에서 기대되는 효과 및 활용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한문산문사 서술을 보다 구체화, 정밀화한다. 조선시대 한문산문은 어느 일방에 귀속시킬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갔다. 이런 점에서 주소어록체와 연미한 당송문에 경도되었던 조선전기의 산문에서 벗어나 험벽기굴하고 고아한 글쓰기를 시도하였던 조선중기의 복고적 산문은 17세기 이후의 문단에 이론과 창작 양방면에서 신선한 자극을 던져주었으며, 다양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와 같은 복고적 산문의 성취와 경계를 보다 선명하게 밝힘으로써, 한국 한문산문사의 구도를 보다 정치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작품에 대한 분석 작업을 통해 산문론의 이론적 구도를 비판적으로 검증 또는 확인한다. 현재까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산문론의 여러 영역이 논의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작품 분석을 통해서야 구체적으로 실증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만한 발군의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받아왔던 조선중기의 작품을 주제, 내용, 문체, 수사 등의 방면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본 연구의 결과물은 이론중심의 산문사 서술 태도를 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산문 연구방법론의 수립에 기여한다. 역사주의적, 실증주의적 연구방법론이 주류를 이루는 한, 실제 작품 분석에서는 직관적, 연역적인 추론에 머무는 한계를 노정하곤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에서 적용될 표현미에 관한 탐구는 원류비평, 인상비평의 한계를 극복하고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으로 통합된 작품 분석의 실례를 제공함으로써 한문산문의 문학성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 Index terms
  • 尹根壽, 崔岦, 柳夢寅, 許筠, 趙翼, 王世貞, 李夢陽, 何景明, 李攀龍, 韓愈, 柳宗元, 歐陽脩, 蘇軾, 散文, 古文, 古文辭, 擬古, 唱古, 復古, 先秦文, 秦漢文, 唐宋文, 文體, 修辭, 模擬, 自得, 前後七子, 唐宋八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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