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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明儀禮를 통해본 15세기 朝鮮과 明의 외교관계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對明儀禮를 통해본 15세기 朝鮮과 明의 외교관계 | 2005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한형주(고려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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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34
선정년도 2005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7년 05월 23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15세기 朝鮮과 明 사이에서 시행되었던 외교와 관련된 제반 의례들을 살펴봄으로써 흔히 조공-책봉체제의 典範으로 간주되는 이 시기의 양국관계의 내용 및 본질을 파악하는 단서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현재 학계에서는 조선과 명의 양국관계를 요동공벌과 관련해 양국 간에 벌어졌던 외교적 갈등, 여진문제, 조공무역, 사신왕래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양국관계의 일반적 현상으로 보이는 의례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조선은 건국직후부터 事大를 대명관계의 기본으로 설정했고, 국내의 통치에서는 ‘禮治’를 내세웠다. 따라서 의례를 통한 국내외 체제의 설정은 단순히 형식적인 측면만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현실적 측면이 상당히 반영된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검토는 15세기 정치사와 대외관계사 이해에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보이는 의례는 15세기 내내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명의 국내외적인 정세와 조선 내부의 정치적 변동, 그리고 역대 국왕의 의례에 대한 인식 등 여러 요소에 의해 시기적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비쳐진 것이다.
    이러한 대명의례는 건국 후 1세기 동안의 적지않은 변화의 과정을 겪었는데, 15세기 말성종대에『국조오례의』의 편찬으로 정리되었다.『국조오례의』편찬은 대명의례의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난 것이고, 이후 16세기의 대명외교는 부분적인 변화가 있더라도 여기서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다.
    15세기에 표출된 대명의례에는 조공-책봉이라는 조선과 명사이의 형식적 외교관계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과 명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다양한 국제관계의 갈등 및 해소가 담겨져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15세기 조선과 명 양국간 외교관계속에서 나타난 의례적 내용 및 그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과 의례의 조정, 그리고 그를 둘러싼 조선의 대명인식 등을 검토하여 전근대 조공-책봉관계의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는 검토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먼저『고려사』에 보이는 대명의식의 검토를 바탕으로 연대기에 나타난 공민왕대 이후 국왕의 책봉 및 양국사신들의 왕래에서 보이는 각종 의식을 종합하여 조선시대 대명의례 제정의 역사적 배경 및 그 기반을 검토하였다.
    • 조선초기 명과 관련된 국가의례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왕과 왕비, 왕세자의 誥命 및 책봉과정을 살펴보았다. 이같이 의례적인 책봉과정은 당시 양국 간의 국제인식 및 정치적인 의지를 살펴보는 중요한 단서로 파악하였다.
    • 명나라 사신과 관련된 의례․의식은 이미『高麗史』에 보인다. 그런데 같은 대명의례라 할지라도 이보다 늦게 편찬된『세종실록』오례와『국조오례의』의 빈례와 가례에 보이는 각종 사신관련 의식은 이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차별성의 검토는 15세기 내내 대명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찾아보는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고 판단된다. 한편 명나라에서 자국에 들어온 조선의 사신을 어떻게 대우했는가의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이를 위해 당나라 이후 명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편찬된 예서의 賓禮 및 嘉禮條에 보이는 각종 ‘使臣儀’ 를 검토해 보았다.
    • 명조정에서의 조선 사신의 위차는 조선초기 명과의 의례적 관계속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이것은 명의 대조선 인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건국초인 명제 주원장의 단계와 연왕과 갈등을 벌였던 건문제 시기, 성조와 그 이후의 시대 등 시기별로 명의 국내외 정세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아울러 조선의 祀典의 정비 및 祭天禮의 치폐과정에서의 명의 압력과 조선의 이에 대한 대응 역시 중요한 명의 대조선 인식을 살피는 중요한 단서이다.
    • 마지막으로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동과 조선의 현실에서 당시의 지배층들이 명나라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했으며 이것이 대명의례의 정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현상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실제로 이 작업을 감행했던 15세기 유학자들의 대외인식을 검토하는 기초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 영문
  • This study aims at looking over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Chosun Dynasty and Ming Dynasty through the viewpoint of national rites in the 15th century.
    King Gongmin's policy against Yŭan dynasty conducted in the late of Koryŏ Dynasty was connected with Sadae(事大, serving the great) to Ming dynasty, a newly rising strong country in China and in the meanwhile reconstruction of the old system in early Koryŏ, but realistically feudal lords formation by Ming dynasty pressure had to be considered.
    After founded Chosŏn Dynasty, new country's government officials had tried to seek different diplomatic relationship from Koryŏ, officially acknowledging Sadae to Ming. We are certified this phenomena from the installation of the Throne, dispatch an envoy, establishment of a national rites system and so on.
    Through this process we will learn natures and meanings of tribute and installation between Chosun Dynasty and Ming Dynas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15세기 朝鮮과 明 사이에서 시행되었던 외교와 관련된 제반 의례들을 살펴봄으로써 흔히 조공-책봉체제의 典範으로 간주되는 이 시기의 양국관계의 내용 및 본질을 파악하는 단서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현재 조선과 명 양국간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연구는 表箋문제, 遼東攻伐, 女眞문제 등의 외교적 갈등 및 4郡 6鎭의 개척, 朝貢貿易, 使臣왕래를 통한 文化交流 등을 중심으로 상당수가 이루어졌다. 반면에 양국간의 외교적 관계를 외형상 그리고 기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儀禮的인 내용과 성격에 대한 검토는 거의 없다. 그런데 조선은 건국직후부터 事大를 국제외교의 기본축으로 설정했고, 국내의 통치에서는 ‘禮治’를 내세웠다. 따라서 의례를 통한 국내외 체제의 설정은 단순히 형식적인 측면만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현실적 측면이 상당히 반영된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검토는 15세기 정치사와 대외관계사 이해에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對明儀禮는 15세기 내내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명의 국내외적인 정세와 조선 내부의 정치적 변동, 그리고 역대 국왕의 의례에 대한 인식 등 여러 요소에 의해 시기적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비쳐진 것이다. 이러한 대명의례는 건국 후 1세기 동안의 浮沈과정을 겪었고, 15세기 말『국조오례의』의 편찬으로 정리되었다.『국조오례의』편찬은 대명의례의 규범적 정비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후 16세기의 대명외교는 부분적인 변화가 있더라도 여기서 크게 변화하지 않는 전범으로 작용했다.
    15세기에 표출된 대명의례에는 조공-책봉이라는 조선과 명사이의 형식적 외교관계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과 명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다양한 국제관계의 갈등 및 해소가 담겨져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15세기 조선과 명 양국간 외교관계속에서 나타난 의례적 내용 및 그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과 의례의 조정, 그리고 그를 둘러싼 조선의 대명인식 등을 검토하여 전근대 조공-책봉관계의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는 검토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먼저『고려사』에 보이는 대명의식의 검토를 바탕으로 연대기에 나타난 공민왕대 이후 국왕의 책봉 및 양국사신들의 왕래에서 보이는 각종 의식을 종합하여 조선시대 대명의례 제정의 역사적 배경 및 그 기반을 검토하였다.
    • 조선초기 명과 관련된 국가의례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王과 王妃, 王世子의 誥命 및 冊封過程을 살펴보았다. 이같이 의례적인 책봉과정은 당시 양국간의 국제인식 및 정치적인 의지를 살펴보는 중요한 단서로 파악하였다.
    • 明使와 관련된 의례․의식은 이미『高麗史』에 보이고 있다. 그런데 같은 대명의례라 할지라도 이보다 늦게 편찬된『세종실록』오례와『국조오례의』의 빈례와 가례에 보이는 각종 明使관련 의식은 이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차별성의 천착은 15세기 기간동안 대명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찾아보는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고 판단된다. 한편 명에서 入朝한 조선의 사신을 어떻게 대우했는가의 문제를 당대 이후 명초에 이르기까지 편찬된 예서의 賓禮 및 嘉禮條에 보이는 각종 ‘使臣儀’ 를 검토해 보았다.
    • 명조정에서의 조선 사신의 위차는 조선초기 명과의 의례적 관계속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이것은 명의 대조선 인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건국초인 홍무제 단계와 연왕과 갈등을 벌였던 건문제, 성조와 그 이후의 시대 등 시기별로 명의 국내외 정세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아울러 조선의 祀典의 정비 및 祭天禮 치폐과정에서의 명의 압력과 조선의 이에 대한 대응 역시 중요한 명의 대조선 인식을 살피는 중요한 단서이다.
    • 마지막으로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동과 조선의 현실에서 당시의 치자들이 명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했으며 이것이 대명의례의 정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현상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실제로 이 작업을 감행했던 15세기 유자들의 대외인식을 검토하는 기초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15세기에 표출된 대명의례가 조공-책봉이라는 조선과 명사이의 형식적 외교관계만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과 명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다양한 국제관계의 갈등 및 해소가 담겨져 있었다는 인식하에서 15세기 조선과 명 양국간 외교관계속에서 나타난 의례적 내용 및 그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과 의례의 조정, 그리고 그를 둘러싼 조선의 대명인식 등을 검토하여 전근대 조공-책봉관계의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학문적 차원에서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1) 책봉의례의 검토를 통한 조-명관계 연구의 새로운 접근
    본 연구는 朝貢과 冊封으로 표현된 전근대 동아시아 외교관계의 보편성의 내용을 15세기라는 특정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과거에는 조선 건국초의 군사적 갈등 및 조공 무역으로 표현되는 경제적 관계를 주 대상으로 삼아 조선과 명의 관계를 다루었지만 본고에서는 양국간에 벌어졌던 의례상의 제반 논쟁을 바탕으로 양국 관계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기존의 정치사, 경제사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국가의례 나아가 문화사의 범주로 연구영역을 확대함으로써 보다 다양하게 대외관계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2) 의례의 제정을 통한 주체적인 조-명 관계의 확인
    양국의 관계는 의례상으로 볼 때 종주-속국관계로 표현되어 있다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측의 국가의례, 특히 명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의례를 제정할 때 제후국의 의례에 기반한다고 표방한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실제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외형적인 표방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제후국체제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다양하게 시행하였다. 이것은 원론적인 차원에서 대명의례를 제정했지만 그것의 실천성에서 대단히 빈약하다는 현실적 운영에서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의례 자체의 제정과정에서도 제후국체제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였고, 때에 따라서는 천자국의 의례를 제정, 실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 국내의 사정 및 명을 위시한 동아시아 정세를 종합적으로 판단한 국제인식에 기반한 것으로, 당대인들의 주체적 역사인식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인 것이다.

    (3) 15세기 대명외교의 역사적인 실상의 파악
    중국의 왕조들은 때로 형식적이었던 조공-책봉관계에서 벗어나 물리적인 힘을 바탕으로 실제적인 종주-속국관계로 바꾸고자 시도한 경우가 종종 있었고, 이에 대하여 한민족은 끊임없는 대외투쟁을 통하여 이를 극복해 갔다. 조선과 명 사이에는 이같은 대규모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난 적이 없는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양국관계를 살펴보면 이같은 충돌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고려말부터 건국초의 정세는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이 높았으나 결국 양국간의 외교교섭을 통한 막후접촉으로 갈등이 해소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양국의 조공-책봉 관련 사신의 파견 및 각종 의례상의 제조치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시기에 시행되었던 외교적인 의례의 분석은 당시 대외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다.
  • 색인어
  • 조공(朝貢), 책봉(冊封), 대명의례, 국가의례, 사신, 고명(誥命), 고려사예지, 빈례(賓禮), 가례(嘉禮), 세종실록오례(世宗實錄五禮),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개원례(開元禮,) 정화오례신의(政和五禮新儀), 명집례(明集禮,) 춘관통고(春官通考), 사대(事大), 홍무예제(洪武禮制), 사전(祀典), 조하(朝賀), 위차(位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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