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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12139&local_id=10013798
일본정부의 청일 개전정책
Reports NRF is supported by Research Projects( 일본정부의 청일 개전정책 | 2005 Year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최석완(대진대학교) ) data is submitted to the NRF Project Results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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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A00083
Year(selected) 2005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07년 05월 03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07년
Research Summary
  • Korean
  • 일본정부의 대청 개전 정책을 실질적으로 리드한 것은 이토였다. 이토는 무츠와 군부를 자극하여 일본정부를 대청 강경론으로 이끌어 가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즉 이토는 「제안서」를 이용하여, 일본정부의 개전 방침을 수동적 개전에서 능동적 개전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청일 무력 충돌을 우려하는 메이지 천황을 무츠와 함께 설득하였다. 또 조선의 전신선을 수복시키기 위해 일본군의 파견을 주장하는 강경한 자세를 드러냄으로써 이에 반대하는 무츠와 대립하기도 했다. 영국과 러시아의 간섭이 본격화되자 조선내정개혁의 수위를 높이는 무츠의 전략을 적극 지원하였고, 동시에 오토리의 조기 개전책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또 청일전쟁이 발발한 후 이를 중재해줄 후보로 청국 주재 미국 공사를 무츠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그 후 6월 30일 러시아의 간섭이 격화되자, 이를 배제하기 위해 영국에 의존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을 무츠에게 주문한 것도 이토였다.
    일본 육군은 청일 개전에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자체적인 정보망을 동원하여 열강의 동향을 탐지하였다. 즉 청일 조기 개전에 자신감을 보였던 것이다. 일본 해군은 함대의 집결 상황으로 보아 7월 말을 청일 전면 전쟁의 적기로 보았으나, 오토리 공사와 오시마 여단장이 추진 중이던 조기 개전에도 대비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정부의 개전 정책은 군부와의 협조 하에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었으며, 임전태세의 미비는 청일 개전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일본정부가 청일 개전의 결정적 걸림돌로 생각한 것은 러시아와 영국의 간섭이었다. 일본정부는 청일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영국과의 조약개정 문제를 타결지음으로써, 영국의 불간섭을 보장받고 러시아를 견제하려 하였다. 무츠와 이토 등이 한편에서 대청 조기 개전을 모색하면서도, 조약개정 문제에 집중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조약개정 외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즉, 조약개정 외교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일본을 중심으로 재편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이토와 무츠는 청일전쟁으로 인해, 영일조약 개정 문제가 지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English
  • Recently, many Japanese scholars have been trying to reappraise the Sino-Japanese War as an unforeseen war. And they tend to regard Japan's East Asian Policy as non-expansionism. However, in my judgement, according to my studies done till now, such an opinion is very hard to form.
    Early in June, Japan thought the Sino-Japanese War as a limited warfare to be carried out in the Korean peninsula. But from in the middle of June, Japan changed the war design from the limited warfare to an all-out war and from a passive war to an active war. The policy switch like this was decided at a Cabinet conference hold on June 15th. And the decision was actually led by Ito and Mutsu. They persuaded Meiji Tenno who avoided the Sino-Japanese War and suggested to Chinese government to reform Korean domestic politics jointly.
    After that, as interference by England was started, there were some conflicts between two groups in Japanese government. One was Ito, the Japanese military, Otori who took a firm against China and the other group was Mutsu who took a mild measure against China. But Japan hastened the outbreak of war after obtaining the information that China decided to dispatch more troops into Korean peninsula and the rejection of China about Japanese suggestion.
    Actually, Japan had a military strength to be able to carry out the Sino-Japanese War from about 1893. But Japan could not start the Sino-Japanese War when the antagonism between Japan and China became intensified in June, 1894 because they were not ready for a fight against China at once. Japan needed at least about one month to prepare for the beginning of the war. The military thought that it is suitable for them to start the Sino-Japanese War in late July. Even though the situation was like that, the military intended to plunge into the war whenever it broke out. So Japan did its best to purchase many military ships and dispatch more troops into Korean peninsula hurriedly.
    Japan increased speed for outbreak of the war after about June 21th-22nd. The Japanese military established the war plan including a battle in Chinese territory, and Mutsu ordered the Japanese minister to Korea, Otori, to find out any specious pretense to commence the war. Otori was about to commence the Sino-Japanese War by expelling the Chinese troops out of Korea. The military forecasted that the Sino-Japanese War grew into an all-out war through limited warfare in Korea and prepared for all kinds of wars that would broke out.
    But Japan's policy for outbreak of the war was delayed because serious meddling of Russia and England was begun. Ito and Mutsu chose the strategy to block the possibility of Sino-Japanese negotiation and the interference by Russia and England. They enlarged the demands related to Korean domestic politics and expected Otori's plan for an early outbreak of the war. However, as Russia's interference increased, Ito and Mutsu started to worry about Russia's military intervention. Therefore, they gave up the early outbreak of the war.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일본정부는 6월 15일 청일 공동의 조선내정개혁안을 마련하고, 청일 전면전과 능동적 개전을 모색하였다. 영국의 개입은 한때 이토, 군부, 오토리의 강경론과 무츠의 온건론 사이에 갈등을 초래했으나, 청군 증파에 관한 정보와 내정개혁안에 대한 청의 거절이 확인되면서, 일본정부는 6월 21일 및 22일 각의에서 개전을 서두를 것을 결정했다. 무츠는 오토리에게 조기 개전을 지시했고, 군부는 국지전을 거쳐 전면전이 발발할 것으로 보고 이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이후 영국과 러시아의 간섭이 본격화되자, 무츠와 이토는 이를 봉쇄하기 위한 전략으로 내정개혁안의 수위를 높이는 동시에, 오토리와 오시마의 조기 개전책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사적 간섭이 우려되자 일본정부는 조기 개전책을 보류시켰다.
    청일 개전 정책은 정부와 군부의 협조 아래, 이토의 실질적 주도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토는 무츠와 함께,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조약개정을 마무리지음으로써 동아시아의 질서를 보다 완벽하게 재편하기를 희망했다. 러시아의 간섭은 조기 개전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반면에 조약개정을 완수하고 임전태세를 갖출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였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일본정부의 대청 개전 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은 무츠 외상이나 군부가 아닌 이토 히로부미 수상이었다. 둘째, 군부 중 육군은 조기 개전에 자신감을 보인 반면, 해군은 7월 말을 개전의 적기로 보았다. 그러나 임전 태세의 미비는 청일 개전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셋째, 이토와 무츠는 조약개정을 통해 열강과의 불평등관계를 해소하는 일이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청일전쟁으로 인해 영일조약 개정 문제가 지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넷째, 러시아와 영국의 간섭에 대해, 이토와 무츠는 오토리의 조기 개전책에 기대를 걸거나 조선내정개혁의 수위를 높이는 수단을 강구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드러냈다. 다만 러시아의 군사적 간섭이 예상됨에 따라 이러한 기세는 일단 누그러들었다.
    본 연구의 활용방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연구는 정치·외교·군사적 관점에서 청일전쟁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학계에 제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둘째, 본 연구는 일본근대사 및 한일관계사에 대한 일본사회의 역사왜곡 현상에 제동을 거는 계기가 될 것이다. 셋째, 본 연구는 앞으로, ‘일본정부’에 매몰된 정치주체들을 끌어냄으로써 종래에 ‘일본정부’라는 개념하에 연구되어온 일본의 대외팽창정책을 재검토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대외 정책을 규정하는 요소로 국제환경과 국내정치를 고려하되 이들을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넷째,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한국의 비판은 주로 종래의 일본진보주의 역사학의 연구성과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 연구는 이러한 경향에 제동을 걸뿐만 아니라 보다 효과적인 비판 방법을 제시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Index terms
  • 청일전쟁, 이토 히로부미, 무츠 무네미츠, 오토리 게이스케, 군부, 조선내정개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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