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먼저, 알튀세의 예술이론을 위치시킬 더 넓은 미술사적 맥락을 검토한다. 이는 곧 현대미술의 정당성의 문제인데, 사실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운동들 이래, 현대미술의 역사는 수많은 스캔들과 사기로 점철된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우리가 미술 관련 잡지나 ...
본 연구는 먼저, 알튀세의 예술이론을 위치시킬 더 넓은 미술사적 맥락을 검토한다. 이는 곧 현대미술의 정당성의 문제인데, 사실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운동들 이래, 현대미술의 역사는 수많은 스캔들과 사기로 점철된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우리가 미술 관련 잡지나 언론매체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도 예술인가 ’하는 물음인데, 이 물음은 사실 현대미술에 대한 일반 대중의 난감함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미학자나 미술사학자들의 시대착오적인 분노, 그리고 문화권력을 쥐고 있는 기존 미술계의 이른바 인간주의 예술이데올로기 모두를 담고 있다. 본 연구는 현대미술이 이러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을 정당성의 문제로 이해하며, 이의 근원이 일반 대중의 무지에 있는 게 아니라 예술의 이데올로기적 신비화 및 이의 역사적 응결체인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에 있다고 진단한다.
본 연구는 다음으로,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을 이용하여 예술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를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첫째, 예술은 지식이 아니다. 알튀세는 과학의 이론 영역과 예술의 생산 영역을 구분하는데, 지식이 전제들로부터 결론이 생산되는 메커니즘을 꿰뚫어보게 해준다면, 예술은 전제 없이 결론을 보게 해준다. 둘째, 예술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술은 이데올로기이지만, 예사롭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된 이데올로기다. 예술은 그것의 일상적인 기능조건에서 벗어난 이데올로기이며, 이런 의미에서 가시화된 이데올로기다. 셋째, 알튀세가 보기에, 예술작품의 질료인(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은 일상적인 의미의 재료(시각예술의 경우에는 색과 형태, 문학의 경우에는 언어)가 아니라 바로 이데올로기다. 넷째, 예술의 작용인 역시 이데올로기다.
예술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다음의 쟁점, 곧 예술, 특히 현대미술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오히려 장애물로 기능하는 이데올로기적 독해들을 분석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준다.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독해는 형식주의 독해와 인간주의 독해인데, 알튀세는 이 두 가지 독해를 비판한 후, 대안적 독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징후적 독해로서, 우리는 알튀세의 작업 전체가 사실 ‘독해의 노동’이라는 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마지막으로, 알튀세의 철학적 담론이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미술가인 레오나르도 크레모니니의 작품을 들여다본다. 196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시된 크레모니니의 그림을 우연히 보게 된 알튀세는 그의 작품을 표현주의 작품으로 경멸적으로 부르는 일반 관객들이나 전문 비평가들의 반응에 접하고는 그의 작품에 대한 유물론적-징후적 독해에 임하게 된다. 이때는 마침 알튀세가 리얼리즘(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사회적 리얼리즘 모두)에 대한 혐오를 키우고 있던 때로, 이를 기화로 작성된 "크레모니니, 추상의 화가"는 취미의 전문가(전문비평가)뿐만 아니라 이른바 정통 공산주의 비평가 둘 다를 겨냥한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알튀세는 크레모니니를 비단 표현주의라고 하는 딱지로부터, 아울러 일반적인 의미의 추상화가라고 하는 지위로부터 구원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성을 그리는 추상의 화가로 살려내고 있다. 맑스가 역사유물론의 영역에서 인간들 간의 관계를 분석해내었듯이, 크레모니니 역시 예술의 영역에서 인간들 간의 추상적인 관계를 그려냈으며, 맑스가 유물론적 역사관에 대해 성취한 바로 그 인식론적 단절을 크레모니니의 그림이 화화에 대해 성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튀세의 이른바 예술이론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아니, 그의 이론 전체가 이제는 망각의 저주 하에 처해있으며, 인용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비판하기 위해 인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본 연구는 알튀세의 이론이 "예술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단히 중요한 이론적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며, 예술연구를 위한 만족스러운 유물론적 토대를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의 이론, 그가 제시한 개념들과 문제들을 거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