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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실증주의 과학관의 형성: 마하의 과학사상과 빈 학단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논리실증주의 과학관의 형성: 마하의 과학사상과 빈 학단 | 2006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고인석(이화여자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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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70
선정년도 2006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8년 12월 28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8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논리실증주의는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까지에 걸쳐 활동했던 빈 학단에 의해 창시된 20세기의 주요 철학사조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1950년대까지 체계화되고 "[과학에 관한] 표준적 견해"(the Received View)라고 불리기도 했던 논리실증주의-논리경험주의의 사유체계를 역사적인 빈 학단의 사유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소박한 오류라는 사실이 1980년대 이후의 연구에 의해 드러났다. 이 연구는 특히 199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된 빈 학단 연구의 한 부분을 보완한다. 이 보완적 작업의 초점은 에른스트 마하와 빈 학단의 관계다. 이 연구는 『역학의 발달』(Entwicklung der Mechanik: historisch-kritisch dargestellt), 『감각의 분석』(Analyse der Empfindungen), 『일반인을 위한 과학 강연』(Populär-wissenschaftliche Vorlesungen) 등에 나타난 마하 과학사상의 요체를 고찰하고, 그것을 초기 빈 학단의 구성원들의 저술과 토론에 드러난 사상과 비교하면서 마하와 빈 학단의 사상적 연관성을 분석한다. 마하는 과학의 본성을 사유경제성과 적응이라는 두 관점에서 파악했다. 이것은 과학에 대한 일종의 도구주의적 이해를 함축하지만, 이 ‘도구’는 외화된 사물의 영역과 인간의 생물학적 기반과의 연관을 통해 종적으로 내면화된 사유기반의 영역 양쪽에 모두 걸쳐져 있다는 특이성을 지닌다. 이와 같은 마하의 사상은 통상적 의미의 실증주의와는 다른 층위에서 논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실증주의적 면모를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하를 실증주의자로 보는 것은 부적절한 분류다. 빈 학단의 역사적 단초가 된 이른바 ‘1차 빈 학단’(der erste Wiener Kreis)은 19세기 말 빈의 실증주의적 분위기 속에 성장하고 빈 대학 시절 마하로부터 직접-간접적 영향을 받은 젊은 학자들의 모임이었고, 이 모임의 구성원이었던 오토 노이라트, 한스 한, 필립 프랑크 등은 2차 빈 학단 즉 일반적으로 빈 학단으로 알려진 모리츠 슐릭 중심의 그룹에서도 중추적 활동을 계속했다. 빈 학단의 범주에는 줄잡아 20명 이상의 학자들을 포함시킬 수 있지만 그 중에서 철학적 중심의 역할을 한 내부 인물로는 앞서 언급된 네 사람을 비롯해 루돌프 카납, 프리드리히 바이스만, 펠릭스 카우프만 등 7, 8 명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빈 학단의 방향성을 좌우한 주도적 인물은 슐릭, 노이라트, 카납 세 사람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인물들의 사상적 지형도다. 외국의 선행연구들과 연구자의 선행연구에서도 이미 드러났듯이 빈 학단은 통일된 목소리의 울림통이라기보다 오히려 상당한 불협화음과 의견대립이 일상적인 마당이었고, 특히 통일과학의 개념을 둘러싼 카납 대 노이라트의 노선 차이는 뚜렷했다.
    연구 결과, 에른스트 마하의 가시적 영향은 1차 빈 학단에서 2차 빈 학단으로 넘어가면서 뚜렷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화석화되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비가시화의 방식으로 심화되었다. 앞서 언급된 슐릭-카납 노선과 노이라트 노선 가운데 주도권을 쥔 것은 전자였고, 마하 과학사상의 가시적 흔적은 거기서 더 희미해졌다. 결과적으로 훗날의 논리경험주의에는 마하의 과학사상에서 일부 화석화된 부분만 남겨졌다. 반면에 노이라트는 ―그가 마하의 과학사상을 체계적으로 계승하려 했던 증거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하의 과학관과 부합하는 과학의 상을 그리고 있었다.
  • 영문
  • Logical positivism is among the essential philosophical traditions which characterize western philosophy of the 20th century. It is usually said that the logical positivism is brainchild of the Vienna Circle that existed from mid-1920's to late 1930's. In the classes of (history of) philosophy we further teach that the logical positivism has been criticized and proven to be untenable by Karl R. Popper, Thomas S. Kuhn, and other 'post-positivist' philosophers (of science) in 1960's and thereafter. Detailed investigations in last 20 years have shown, however, that this picture of history of philosophy is oversimplified as well as incorrect. This paper, as a part of this reexamination and rehabilitation of the Vienna Circle, tries to rationally reconstruct the early phase of its formation. Especially it focuses on the connection between the Circle and a background figure, Ernst Mach. Mach was a symbolic figure in the Viennese positivist atmosphere of the fin de siecle. Ernst Mach Society (Verein Ernst Mach), founded in 1928, was the official body of the Vienna Circle. The connection between Mach and the Circle, however, was not simple. My investigation shows that Mach's philosophy, his view of science and the world-concept, was influential in the so-called 'First Vienna Circle', but not in the 'Second Vienna Circle'. In the latter, which is known as 'the Vienna Circle' to us, Otto Neurath and Philipp Frank remained to be Mach-children, though in an adapted form for each of them. For the majority, the 'right wing', of the Circle led by Rudolf Carnap and Moritz Schlick, Mach's conception of science has long been fossilized. Two key words of Mach's philosophy of science, Denkökonomie (economy of thought) and Adaptation, were missing at the core of their picture of scienc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논리실증주의는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까지에 걸쳐 활동했던 빈 학단에 의해 창시된 20세기의 주요 철학사조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1950년대까지 체계화되고 “[과학에 관한] 표준적 견해”(the Received View)라고 불리기도 했던 논리실증주의-논리경험주의의 사유체계를 역사적인 빈 학단의 사유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소박한 오류라는 사실이 1980년대 이후의 연구에 의해 드러났다. 이 연구는 특히 199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된 빈 학단 연구의 한 부분을 보완한다. 이 보완적 작업의 초점은 에른스트 마하와 빈 학단의 관계다. 이 연구는 『역학의 발달』(Entwicklung der Mechanik: historisch-kritisch dargestellt), 『감각의 분석』(Analyse der Empfindungen), 『일반인을 위한 과학 강연』(Populär-wissenschaftliche Vorlesungen) 등에 나타난 마하 과학사상의 요체를 고찰하고, 그것을 초기 빈 학단의 구성원들의 저술과 토론에 드러난 사상과 비교하면서 마하와 빈 학단의 사상적 연관성을 분석한다. 마하는 과학의 본성을 사유경제성과 적응이라는 두 관점에서 파악했다. 이것은 과학에 대한 일종의 도구주의적 이해를 함축하지만, 이 ‘도구’는 외화된 사물의 영역과 인간의 생물학적 기반과의 연관을 통해 종적으로 내면화된 사유기반의 영역 양쪽에 모두 걸쳐져 있다는 특이성을 지닌다. 이와 같은 마하의 사상은 통상적 의미의 실증주의와는 다른 층위에서 논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실증주의적 면모를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하를 실증주의자로 보는 것은 부적절한 분류다. 빈 학단의 역사적 단초가 된 이른바 ‘1차 빈 학단’(der erste Wiener Kreis)은 19세기 말 빈의 실증주의적 분위기 속에 성장하고 빈 대학 시절 마하로부터 직접-간접적 영향을 받은 젊은 학자들의 모임이었고, 이 모임의 구성원이었던 오토 노이라트, 한스 한, 필립 프랑크 등은 2차 빈 학단 즉 일반적으로 빈 학단으로 알려진 모리츠 슐릭 중심의 그룹에서도 중추적 활동을 계속했다. 빈 학단의 범주에는 줄잡아 20명 이상의 학자들을 포함시킬 수 있지만 그 중에서 철학적 중심의 역할을 한 내부 인물로는 앞서 언급된 네 사람을 비롯해 루돌프 카납, 프리드리히 바이스만, 펠릭스 카우프만 등 7, 8 명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빈 학단의 방향성을 좌우한 주도적 인물은 슐릭, 노이라트, 카납 세 사람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인물들의 사상적 지형도다. 외국의 선행연구들과 연구자의 선행연구에서도 이미 드러났듯이 빈 학단은 통일된 목소리의 울림통이라기보다 오히려 상당한 불협화음과 의견대립이 일상적인 마당이었고, 특히 통일과학의 개념을 둘러싼 카납 대 노이라트의 노선 차이는 뚜렷했다.
    연구 결과, 에른스트 마하의 가시적 영향은 1차 빈 학단에서 2차 빈 학단으로 넘어가면서 뚜렷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화석화되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비가시화의 방식으로 심화되었다. 앞서 언급된 슐릭-카납 노선과 노이라트 노선 가운데 주도권을 쥔 것은 전자였고, 마하 과학사상의 가시적 흔적은 거기서 더 희미해졌다. 결과적으로 훗날의 논리경험주의에는 마하의 과학사상에서 일부 화석화된 부분만 남겨졌다. 반면에 노이라트는 ―그가 마하의 과학사상을 체계적으로 계승하려 했던 증거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하의 과학관과 부합하는 과학의 상을 그리고 있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주요 항목들을 포함한다.
    ① 빈 학단의 탄생 배경과 제 1차 빈 학단의 의미: 빈 학단은 세기말의 빈이라는 문화적-사상적-정치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뿐만 아니라 학창시절 에른스트 마하라는 상징적 인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몇 사람의 동년배 학자들―의 그룹으로 형성되었던 제 1차 빈 학단이 이미 빈 학단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상적으로 비균질적이었던 빈 학단의 내적 결속력은 그 학문적 전제와 지향의 공유 이외에도 이런 초기 구성원들 간의 역사적-인간적 유대에 힘입은 바 적지 않았다.
    ② 에른스트 마하의 과학사상: 연구자는 마하의 과학사상이 다음과 같은 세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분석하였다. 사유경제성의 관점, 적응의 산물로서의 과학, 감각주의적 현상주의(sensualist phenomenalism)가 그것들이다. 문제는 이 삼자 상호간의 관계인데, 논문에서는 이 관계가 논의될 것이다.(정리ㆍ보완 중)
    ③ 빈 학단의 사상에 마하가 미친 영향: 에른스트 마하의 가시적 영향은 1차 빈 학단에서 2차 빈 학단으로 넘어가면서 뚜렷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화석화되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비가시화의 방식으로 심화되었다. 앞서 언급된 슐릭-카납 노선과 노이라트 노선 가운데 주도권을 쥔 것은 전자였고, 마하 과학사상의 가시적 흔적은 거기서 더 희미해졌다. 결과적으로 훗날의 논리경험주의에는 마하의 과학사상에서 일부 화석화된 부분만 남겨졌다. 반면에 노이라트는 ―그가 마하의 과학사상을 체계적으로 계승하려 했던 증거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하의 과학관과 부합하는 과학의 상을 그리고 있었다.
    ④ 빈 학단 속의 두 목소리: ③에서 언급된 빈 학단 내부의 두 노선은 (통일)과학의 거시적 구조라는 빈 학단의 핵심 주제에서도 의견차를 드러낸다. 노이라트 식의 ‘모자이크’ 과학관과 카납 식의 통일과학 개념이 그것이다. 논문에서는 양자와 마하의 과학관을 연관시키면서 각각의 사실적합성과 가치지향적 특성을 검토한다.

    또한 이 연구의 성과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활용 가능성을 함축한다.
    ① 빈 학단 연구에 대한 보완 작업: 빈 학단을 이해하는 것은 예리하고 광범위한 ‘포스트-실증주의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시대가 수용하고 있는 과학 관념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20세기적 과학관의 기반을 이해하는 것인 동시에 사상사 전체 속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집단적 지성의 활동 장면을 파악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② 에른스트 마하 연구에 기여: 국내에서 마하 연구는 거의 불모지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연구는 19세기와 20세기를 잇는 중요한 사상가로 조명될 만한 마하의 과학사상을 중심으로 마하 연구의 한 초석을 놓는 동시에 후속 연구를 촉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③ 20세기 철학사상의 공통 배경에 대한 연구로의 확장 가능성: 이 연구의 진행 과정에서 연구자는 이 연구가 현대 유럽과 미국의 철학을 이룬 공통적 배경에 대한 더 폭넓은 연구의 일부분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연구는 향후 이런 확대된 후속 연구의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색인어
  • 에른스트 마하, 과학의 본성, 경제성, 적응, 경험비판론, 마하 협회, 빈 학단, 헤르만 폰 헬름홀츠, 모리츠 슐릭, 오토 노이라트, 루돌프 카납, 과학적 세계이해, 논리실증주의, 통일과학 (Ernst Mach, nature of science, economy, adaptation, empiriocriticism, Verein Ernst Mach, Vienna Circle, Hermann von Helmholtz, Moritz Schlick, Otto Neurath, Rudolf Carnap, wissenschaftliche Weltauffassung, logical positivism, unified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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