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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장(更張)의 리더십, 英祖의 국가경영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경장& #40;更張& #41;의 리더십, 英祖의 국가경영 연구 | 2006 년 | 박현모(한국학중앙연구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B00006
선정년도 2006 년
과제진행현황 중단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8년 05월 30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8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영조는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경제적으로 흉년이 심각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를 추대한 노론을 제외하곤 대다수 신료들과 백성들은 영조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이인좌의 난’이 발발했다. 난 초기에 사태파악을 못하고 대응조치도 내리지 못한 조정은 오명항의 자진 출병과 안성전투에서의 승전보 이후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고, 난 발발 17일 만에 반군을 진압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영조의 위기관리 능력이 돋보였는데, 도순무사 오명항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라든지, 단순가담자와 주동자를 구분하여 도성에서 내응하지 않도록 적극 조치한 것이 그 예이다.
    특히 그는 반군의 재판과정에서 노론을 제외한 대다수 신료들이 위기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반란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위 초 피상적으로 취하고 있던 탕평책이 난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러면 이 과정에서 영조가 직면한 어려움은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첫째, 조정에 대한 불신과 유언비어이다. 특히 영남의 명문가인 정희량 등 이른바 "명신세가"들의 반군 참여로 인해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민심이 반군쪽으로 급속히 쏠렸다.
    영조는 조정에 대한 불신을 줄이기 위해 반란의 원인과 진행 상황, 그리고 처벌의 최소화 방침 등을 교서로 지은 다음, (諺書)로 번역한 다음 각 도에 나누어 보내 백성들로 하여금 환히 알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 영조는 도성 안에서 반군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특히 궁궐 시위 장사(將士)들을 안심시킴으로써 조정 내부 관련자들을 회심시켰다. 실제로 그는 단순가담자의 경우 일체의 처벌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일상생활과 직분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둘째, 적군의 상황과 사태 전개의 불투명성이다. 특히 서울 안에서 적과 내통하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거나 지시할 수 없었다. 나중에 이인좌의 공초에서 밝혀졌지만, "영남·호남에서 군사를 동원하면 연곡(輦穀)의 친병(親兵)이 마땅히 모두 출정(出征)하게 될 것이니, 남태징·남태적이 서울의 일을 하되, 서울은 이유익이 주장"하게 되어 있었다.
    영조는 이에 대해서 현지 사령관인 오명항에게 작권통제권을 온전히 부여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처음 현지에 부임할 때 왕이 사용하는 상방검(尙方劍)을 직접 내주어서 현지 사령관이 판단하고 결정하도록 위임하는가 하면, 경기도 지역의 전투가 한 고비를 넘은 3월 26일에는 손수 "지확공고(志確功高)"란 네 글자를 써서 내려주었다. 이미 "그 공이 일세에 빛나고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지금 개선할 게 아니라, 유민을 안집시키는 일과 상벌 대상자를 선별하는 일 등을 마무리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도순무사 오명항은 이러한 폭넓은 재량권과 국왕의 신뢰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장애물을 극복해 나갔는데, 그는 비밀리에 간첩을 만들어서 청주 등의 적진에 투입시켜 반군의 진행경로를 파악했다. 뿐만 아니라 소금장수 옷차림을 한 적의 간첩을 붙잡아서 오히려 적의 동태를 파악했다. 특히 관군은 각 지역의 아전층의 협조를 얻어냄으로써 적의 정세를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관군의 "명령을 빠르게 전달(傳通)하여 전투에 기여했다.

    셋째, 가장 큰 위기는 자칫 농사철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난이 3월 중순에서 4월 초순 사이에 진행되었고, 난이 진압된 후에도 반군 재판의 진행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농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렇지 않아도 흉년이 계속된 상황인데, 자칫 큰 경제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 영의정 이광좌가 자칫 "경작의 시기"를 놓쳐 흉년으로 이어지면 "국가의 명운이 장차 보전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은 그러한 상황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조정과 현지의 사령관들은 단순 가담자들을 즉시 방면하는가하면(4/4/3 계미), 재판을 신속히 진행하여 농사일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또 수원 등 난이 마무리된 지역의 군대는 곧바로 파(罷)하여 귀농케 했다. 특히 종사관 박문수는 경상도의 거창·안음·함양·팔량치 등의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스스로 의구심을 품고 산골짝 사이로 도망해서 전야와 촌락이 텅 빈" 상태를 보고, 일일이 산곡을 돌아다니며 단순가담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을 효유했다. 그 결과 "백성들이 비로소 안도하고 인심이 차츰 진정되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 영문
  • This is a study on King Yeongjo's crisis management leadership in Spring 1728. King Yeongjo was faced, in 4 years after the enthronement, with a difficult challenge that several thousands people rised in revolt for turning him out of the the throne. Yi Injwa was at the head of a rebellion. How did King Yeongjo overcome this rebellion
    First, he entrust Oh Myeonghang, the generalissimo, with full powers in order to cope with uncertain condition of fields. Second, he divided rebel army into two: the leader of the rebel and participant uncomplicated. Third, he made progress a trial and demobilized military for engage in farming. As the result, King Yeongjo was a great success in overcoming rebellio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 본 연구는 국왕 영조의 국가경영 과정에 대한 학문적 공백을 메우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시작되었다.
    - 기존의 연구를 보면, 영조시대에 추진된 탕평책, 균역법, 준천사업 등 개혁정책 내용에 대해는 어느 정도 분석되었으나, 그 정책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추진되었는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 따라서 본 연구자는 영조시대의 개혁 내용보다는 그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과제를 진행해왔다. 즉 국왕 영조가 그 정책을 어떻게 인식했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장애물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극복(또는 좌절)했는지를 진단-목표설정-처방이라는 ‘리더십 과정’에 주목해 접근했다.
    - 이를 위해 2006년 10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매주 ‘영조실록강독회’를 통해 일차자료를 강독.토론했으며, 그 결과 <1728년 ‘이인좌의 난’과 영조의 위기극복 리더십>이라는 논문을 작성했다.
    - 이 논문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연말 학술대회에서 발표했고, 현재 동 학회지 <동양정치사상사>에 투고상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결과>
    - 제1차년도 연구결과는 원고지 159매의 논문 <1728년 ‘이인좌의 난’과 영조의 위기극복 리더십>이다.
    - 이 논문은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경제적으로 흉년이 심각한 상태에서 왕위에 오른 영조가 자신의 정당성을 정면 부정한 전국적인 반란 <이인좌의 난>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는가를 리더십의 측면에서 고찰했다.
    - 연구결과에 따르면, 영조는 탁월한 인재쓰기와, 반군을 분열시켜 지배하는 전략 구사와, 정적까지도 포용하는 탕평정치를 펴서 성공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그 결과, 비로소 ‘노론의 군주’가 아니라 ‘조선의 국왕’으로 자리 잡는 첫 실마리를 열었다.

    <활용방안>
    - 주요 학술지에 게재하여 영조연구의 공백을 메우는 한편, 추후 영조의 국가경영 관련 연구를 계속해서 단행본으로도 출간할 계획이다.
    - 영조시대의 <이인좌의 난>을 광해군 말기의 <인조반정>과 비교하여, 성공한 반정과 실패한 쿠데타의 차이를 규명해 볼 것이다.
    - 또한 <이인좌의 난>을 순조시대의 <홍경래의 난> 등 세도정치기의 민란들과 비교하는 작업을 추진할 것이다.
  • 색인어
  • 영조, 국가경영, 위기관리, 이인좌의 난,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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