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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淸 帝國의 皇子敎育과 皇帝像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18세기 淸 帝國의 皇子敎育과 皇帝像 | 2006 년 | 송미령(이화여자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06
선정년도 2006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8년 07월 28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8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청 제국은 18세기에 이르면 만주와 중국 본토는 물론 新疆, 티베트, 몽골을 포괄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청 제국에 대해서 여러 연구자들은 北京에 근거를 둔 한족 중심의 구조, 盛京을 중심으로 하는 만주족 중심의 구조, 그리고 熱河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민족들의 구조가 황제를 중심으로 결합된 형태라는 평가를 하였다. 이러한 특성을 지니는 청 제국의 황제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인 巡幸을 통해서 성격이 다른 구조들을 하나의 틀 안에서 묶었고, 그렇게 다양한 성격을 포괄하는 제국을 통치하였다. 이러한 淸 제국의 모습은 만리장성을 경계로 삼아 그 남쪽을 통치영역으로 하였던 明朝와는 다른 모습이었으며, 또 다른 북방민족 왕조였던 원제국과도 구별되는 모습이었다.
    이처럼 단순히 ‘오랑캐’로서 중원을 통치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만주족이 주체가 되어 건립한 청 제국은 어떻게 거대한 영토의 제국을 형성하고 3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을까, 나아가 이러한 청 제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청조의 위업은 만주족이 명조로부터 계승한 정치전통에 융통성 있게 적응하였고 동시에 독자적인 통치 시스템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거대한 제국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었던 독자적인 시스템에 대한 것보다는 그때까지의 중국의 정치전통을 어떻게 수용하고 적응하였는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분명히 명조나 몽골제국과도 다른 모습과 성격으로 존재하였던 청 제국이었으므로, 중국역사의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측면뿐만이 아니라 연구의 시각을 달리하여 그 독자성을 찾아줄 필요가 있다는 필요성에서 이 연수는 출발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宮中檔康熙朝奏摺󰡕(臺灣故宮博物院, 1977)의 8-9집에 있는 강희제와 황태자 사이에 오고간 만주문 편지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강희제의 황제상, 군주상을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한문과 만주문 자료들은 같은 내용을 다른 문자로 서술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표현방식과 서술의 순서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에 강희제와 인렁사이의 만주문 편지를 일일이 轉寫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행간에 숨어 있는 강희제의 생각 등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강희제가 그 후계자 인렁을 대하는 태도를 조명할 수 있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강희제를 부성애가 강하고 인자한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주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만주문 사료를 분석하는 것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던 강희제의 모습은 치밀하지만 조급하고, 끊임없이 베이징에 있던 인렁의 상황을 점검하면서 불신과 신뢰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나아가 강희제의 황제교육은 후계자로서의 내용과 권력의 분담자로서의 역할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다 심도 있게 밝힐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청 제국의 문화와 전통과도 연결된 것이었다. 청에게 있어서 정해진 후계자는 계승자 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한 예로 조선의 신충일은 누르하치와 수르가치의 관계를 공동 통치자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수르하치를 제거한 후 그 지위를 계승한 것은 누르하치의 장자 추연이었다. 그 역시 권력의 일부를 분점하였고, 그 과정에서 갈등이 야기되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볼 때, 입관 전 만주족 사회에 내재되어 있었던 후계자의 의미는 입관을 하여 중원을 장악하고, 그 영역을 확대한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영문
  • How did the emperors of the Qing dynasty maintain their rule over such a vast territory over a period of almost 300 years I think the emperors of Qing dynasty played a pivotal role of interconnecting and unifying the different pieces of the puzzle. Originating from Manchuria the rulers secured the greatest territory by the middle of 18th century. The changing status of the empire would have called for a change in the ideal image of emperorship, which would be captured most evidently in the educational curriculum prepared for their imperial heirs. This research aims to treat the ideal images of emperor as they change over the changing demands of the times.
    Many historians often quote the hey day of the Qing dynasty as being the 130 years of starting from Emperor Kangxi ending with Emperor Qianlong. But they sometimes ignore the period of Hongtaiji and Emperor Shunzhi. It is important that we should consider the imperial successor training in Manchu and Beijing. The Qing dynasty in that time was engaged in a battle, on the one hand, while attempt to identify how such needs in and out of the state was reflected in the succession planning and schooling of their future emperor. And, it must be assumed that any proper imperial heir training during Qing dynasty began after the enthronement of Emperor kangxi. He began his succession planning at an early stage in his reign. So, it is necessary that we should examine the type of emperor that Kangxi expected of this successor as may be reflected in the imperial heir education that he had put in place. In this way, the 17th century was the most eventful time in term the imperial succession scheme. So this research will focus mainly on the 17th century.
    To finding the key that the success of Qing dynasty, this research attempt to investigate their blueprint that they had for the future of the empire. And this research will also attempt to examine the changing attributes required of their emperors, as may be reflected in the succession training to the imperial heirs to the throne, as Qing empire gained increasing dominance power over its neighbors. The focus of this study will be on the marking of the emperors in Qing dynasty as may be found in the traces of the curriculum.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明朝와 비교하였을 때 복합적인 구조였던 청 제국의 청사진을 皇子敎育과 그에 나타난 ‘皇帝像’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주지하듯이 淸 제국의 모습은 만리장성을 경계로 삼아 그 남쪽을 통치영역으로 하였던 明朝와는 다른 모습이었으며, 또 다른 북방민족 왕조였던 원제국과도 구별되는 모습이었다. 명조나 몽골제국과도 다른 모습과 성격으로 존재하였던 청 제국이었으므로, 중국역사의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측면뿐만이 아니라 연구의 시각을 달리하여 그 독자성을 찾아줄 필요가 있다는 필요성에서 이 연수는 출발하였다.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하는 존재로서의 ‘皇帝像’이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 청 제국의 성격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의 연수는 매주 1회 2-3시간 정도 지도교수와 개별적으로 세미나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세미나는 Dartmouth 대학의 수업에 참여하는 것 외에 지도교수가 본 연수자의 연구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개설한 것으로 연수자의 연구와 관련된 논저를 읽고 토론하는 것과 滿洲文 사료를 읽고 분석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滿洲族을 중심에 둔 새로운 각도에서 황실 교육에 접근하는 것을 시도하였다. 황자교육을 황실 내부의 일로 제한하지 않고, 청 제국의 성격으로까지 확대하여 해석하고자 하였다. 한족문화 수용 측면만을 강조하는 편향된 시각이 아닌 만주족으로서의 자기인식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몽골과 위구르, 티베트의 통치자로서의 인식이 교육내용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복합적인 구조의 정점에 있는 황제’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미국에서의 연수를 시작하면서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청대사연구의 새로운 흐름을 선도하였던 지도교수와 먼저 미국학계의 연구 동향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청대사 전반의 문제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연수자는 미국학계의 경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후 Crossley 교수와 토론을 하면서 그의 의견을 들었다.
    청 제국 내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확보하였던 만주어였지만 그동안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한문사료와 만주문 사료가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같은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표현방식과 그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다. 한문의 경우 대문장가들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다소 추상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반면, 만주문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어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기본적인 만주어 학습을 넘어서 사료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 지도교수인 Crossley 교수와 주 1회 2-3시간 정도 만주어 세미나를 하였다.
    17-18세기의 청 제국을 조명할 수 있는 자료로는 청 내부의 것 외에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들이 있다. 이들의 기록은 청측의 기록에서 소략하게 서술되어 있는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이들 예수회 선교사들 중에는 청의 황제 곁에서 활동하면서 그의 활동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다면성을 지니는 청 제국 군주의 모습을 조명하는데 유용한 자료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도서관들, 특히 Dartmouth 대학의 Rauna 도서관에는 국내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17-18세기의 출판물들이 소장되어 있어서 본 연수자에게는 상당히 좋은 기회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결과-
    본 연수를 통해서 만주문 사료를 통해서 청대사 고찰이 가능해졌다. 1년 동안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온 만주문 사료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훈련은 漢人들이 남긴 기록이 아닌 만주족 자신들의 기록으로 청대사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다음으로 만주문을 바탕으로 강희제와 황태자 사이의 편지를 분석하여,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강희제의 황제상, 군주상을 살펴보았다. 이들 편지들은 강희제가 준가르 원정을 직접 진두지휘하는 중에 베이징에 있던 황태자와 주고 받은 것으로 황제의 생각과 기대가 상당히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어 청 제국의 군주상을 살펴보는데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황태자 교육의 측면 뿐 아니라 공동통치자로서 후계자를 대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 설정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연수과정과 사료들을 바탕으로 강희제의 황제교육은 후계자로서의 내용과 권력의 분담자로서의 역할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다 심도 있게 밝힐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청 제국의 전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청에게 있어서 '후계자'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 때의 상황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607년 누르하치는 수르하치(Šurhaci, 舒爾哈赤)의 동맹세력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추연(Cuyen, 褚英)과 다이산을 전면에 내세웠고, 그 결과 두 아들들은 제2인자인 수르하치의 지위를 위협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누르하치는 수르하치의 재산과 노예를 모두 몰수하였고, 1611년에 수르하치는 암살되었다. 그 후 누르하치는 추연을 제 2인자로 삼아, 수르하치의 지분과 지위를 계승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청(후금) 사회에서 계승자(혹은 제2인자)를 결정한다는 것은 그와 권력을 분점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활용방안-
    국내에서 만주문을 교육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만주족이 통치집단을 형성하였던 청 제국이 갖는 특성상 한문사료만으로는 그 왕조의 성격과 위상 등에 접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므로 만주어 사료를 통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내 청대사 연구자들 중 만주어를 교육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 경우는 많지 않다. 언어학 분야에서 만주어를 연구하는 경우에는 그 발음, 한국어와의 유사성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역사적 자료로서 접근하는 역사연구와는 그 접근의 시각과 방법이 다르므로, 역사연구를 위한 자료로서의 만주문 문헌을 어떻게 해석하고 분석할 것인지에 대한 교육기반은 역사학 쪽의 입장을 투영할 필요가 있다.
    보다 폭넓은 인적·지적 네트워크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수자는 이미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北京의 第一歷史檔案館, 中國社會科學원 歷史硏究所, 北京大圖書館에서 1년간 자료수집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학위 취득 후 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육성 과제를 수행하면서 중국은 물론 臺灣의 中央硏究院 歷史語言硏究所, 近代史 硏究所에서 자료를 수집하면서 그곳 연구자들과 교류하였다. 따라서 이번 미국에서의 박사후 연수를 통해서 동아시아는 물론 미국 학계와의 인적·지적 네트워크 형성이 가능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 청대사 연구자들의 활동범위가 좀 더 확대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강희제, 인렁, 만문주접, 황태자 교육, 청 제국, 만주족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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