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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 아카데미의 플라톤주의 수용: 제4 아카데미 철학과 안티오코스의 대응을 중심으로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기원전 1세기 아카데미의 플라톤주의 수용: 제4 아카데미 철학과 안티오코스의 대응을 중심으로 | 2006 년 | 강철웅(서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3
선정년도 2006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8년 04월 26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8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기원전 1세기 아카데미의 플라톤주의 수용을 라릿사의 필론이 주도한 ‘제4 아카데미’ 철학과 그것에 대한 안티오코스의 대응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플라톤 사후 일대 방향 전환을 겪은 3세기 아르케실라오스의 아카데미와 2세기 카르네아데스의 아카데미를 구분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양자의 차이는 당대 스토아주의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펼쳐진 스토아주의자들과의 대화/변증의 산물이므로 양자를 신 아카데미로 묶고 이전의 도그마틱한 구 아카데미와 대비시키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일련의 입장 전환을 거쳐 필론의 제4 아카데미는 신 아카데미와 달리 판단 중지에 대한 적극적 입장에서 탈피하여 오류 가능주의로 선회한다. 이 입장에 대한 반응은 신 아카데미로부터의 탈피가 아카데미의 원류를 벗어난 것이므로 "철저한 회의주의로 되돌아가자"는 아이네시데모스의 퓌론주의 노선과, 신 아카데미로부터의 탈피가 너무 부족하므로 차제에 아예 "구 아카데미로 돌아가자"는 안티오코스의 ‘제5 아카데미’의 노선으로 나뉘는데, 후자가 본 연구의 대상이다.
    안티오코스는 초월적 형상을 거부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여 플라톤주의자 그룹에 포함시킨 최초의 플라톤주의자이며,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들의 윤리학적 입장은 거부한 플라톤주의자이다. 이런 특이한 입장 때문에 안티오코스는 정합적이지 못한 절충주의자로 오해되곤 했지만, 그를 경쟁적인 세 철학들(스토아주의,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각각에서 택할 만한 조각들을 골라 그것들로부터 새로운 체계를 구성한 첼러적 의미의 절충주의자로 이해하기보다는, 외견상 상이해 보이는 그 철학들이 사실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면서 그 교설들 거의 모두를 온전히 받아들이려 한 혼합주의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의 윤리학과 인식론은 훌륭한 삶에 기여하는 철학이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훌륭한 삶은 확실한 앎의 확보에서 나온다는 점을 축으로 삼아 진정한 플라톤 사상을 재구성하려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런 플라톤 재구성에는 당시의 자료상, 전승상 한계로 인해 불가피하게 플라톤의 영향 하에 있는 유력한 두 그룹 즉 소요학파와 스토아학파의 논의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있느냐, 혹은 아카데미가 단일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며(바로 그 점이 스승 필론과 결별하게 만든 핵심 사안이었다), 폭넓고 유연하게 플라톤주의의 단일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게 안티오코스의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티오코스는 삶의 문제를 철학의 핵심 문제로 이해하는 헬레니즘의 시대정신을 공유한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헬레니즘 시대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인 학파적 당파성과 거리를 둔 인물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학파 중심의 논의 구도가 횡행하는 당대에 스토아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적극적으로 끌어 안는 안티오코스의 행보는 ‘내부의 적’ 취급을 받기 십상이지만, 학파의 경계에 국한되지 않고 남겨진 플라톤의 흔적들을 모아 구성해 보고자 하는 플라톤주의자의 진지한 탐색이라는 점을 평가해 주는 관점도 가능하다. 그리고 철학자라면 일가견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것도 일정한 체계를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관은 플라톤이 그토록 저항했던 것으로 보이는 체계, 도그마를 플라톤에게 되돌려 주려는 플라톤주의자의 노력이기에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전통의 상당 부분이 플라톤주의자들의 것이었다는 점, 특히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 이후 근 300년 동안은 플라톤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작업을 독점하다시피 했다는 점은 설명이 필요한 대목인데, 우리는 그 설명의 실마리를, 플라톤주의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최초의 인물인 안티오코스에서 찾을 수 있다. 헬레니즘의 마감과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전통의 시작이라는 중요한 철학사적 전환이 필론과 안티오코스의 논쟁에서 싹텄던 것이다.
  • 영문
  • This study examines Academics' reception of Platonism in the first century BC, centering around the philosophy of Philo's 'fourth Academy' and Antiochus' reaction against it. Some scholars tend to distinguish between Archesilaus' Academy in the third century BC and Carneades' Academy in the second century BC. But the differences between them are actually products of dialogues/dialectics with contemporary Stoics, I think it is more appropriate to bring them together under the label 'New Academy' and to contrast it with previous dogmatic 'Old Academy'. After some fluctuation Philo's Academy came to lean toward fallibilism, breaking from the New Academy's positive attitude to epoche. Subsequent Academics' reactions against this change mainly divided in two: one is Aenesidemus' Pyrrhonistic line blaming the change as secession from original Academy, the other Antiochus' 'fifth Academy' line taking the change as insufficient to go back to original Academy. The latter is what this study focus on.
    Antiochus is a Platonist who tried to accommodate Aristotle into Platonist group and accepted Stoic epistemology while rejecting their ethics. This particularity often leads to the label an inconsistent 'eclectic.' However, it is more to the point to understand him as a syncretic who consider three contemporary competing philosophical doctrines (Stoicism, Platonism, and Aristotelianism) as cooperating in spite of their seeming differences and tried to accommodate almost all major points of the three doctrines into one doctrine, rather than as a eclectic in Zeller's sense who just picked up preferable pieces from any of the three doctrines and assembled them into a new system. His ethics and epistemology developed as an attempt to reconstruct true Platonic thought on the basis of two points: i) philosophy should contribute to a good life, and ii) a good life comes from certain knowledge. Due to limited materials available, this reconstruction inevitably turned to resources of two prevalent philosophical groups influenced by Plato, Peripatetics and Stoics. For Antiochus it does not matter whether one belongs to Academy or not, nor does it whether Academy has unity or not. We should, he alleged, approach the unity of Platonism very flexibly. This was the central issue around which he finally seceded from his teacher Philo.
    It is very remarkable that Antiochus, although he shared one main Hellenistic attitude that considers how to live as a central issue of philosophy, totally distanced himself from another Hellenistic attitude that put much weight on the partisanship of one's school. This can be evaluated as an earnest Platonist's search for tracing and reconstructing Plato's legacy with any available resources regardless of boundaries of schools. And it is very ironical that his conception of philosophy that a philosopher should have his own philosophical dogma or system can be registered as a Platonist's effort to give a dogma or system back to Plato who seems to have resisted severely against a dogma or system.
    In fact, considerable parts of the tradition of commentaries on Aristotle belonged to Platonist. Especially during three centuries period after Alexander Aphrodisias, Platonists almost monopolized the commentative work on Aristotle. This requires explanation, one clue of which we can find in Antiochus who, being a Platonist, take the first step to accommodate Aristotle into Platonist camp. Such a big philosophical turn leading to the end of Hellenism and the beginning of the tradition of commentaries on Aristotle originated from the debates between Philo and Antiochu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기원전 1세기 아카데미의 플라톤주의 수용을 라릿사의 필론이 주도한 ‘제4 아카데미’ 철학과 그것에 대한 안티오코스의 대응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플라톤 사후 일대 방향 전환을 겪은 3세기 아르케실라오스의 아카데미와 2세기 카르네아데스의 아카데미를 구분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양자의 차이는 당대 스토아주의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펼쳐진 스토아주의자들과의 대화/변증의 산물이므로 양자를 신 아카데미로 묶고 이전의 도그마틱한 구 아카데미와 대비시키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일련의 입장 전환을 거쳐 필론의 제4 아카데미는 신 아카데미와 달리 판단 중지에 대한 적극적 입장에서 탈피하여 오류 가능주의로 선회한다. 이 입장에 대한 반응은 신 아카데미로부터의 탈피가 아카데미의 원류를 벗어난 것이므로 “철저한 회의주의로 되돌아가자”는 아이네시데모스의 퓌론주의 노선과, 신 아카데미로부터의 탈피가 너무 부족하므로 차제에 아예 “구 아카데미로 돌아가자”는 안티오코스의 ‘제5 아카데미’의 노선으로 나뉘는데, 후자가 본 연구의 대상이다.
    안티오코스는 초월적 형상을 거부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여 플라톤주의자 그룹에 포함시킨 최초의 플라톤주의자이며,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들의 윤리학적 입장은 거부한 플라톤주의자이다. 이런 특이한 입장 때문에 안티오코스는 정합적이지 못한 절충주의자로 오해되곤 했지만, 그를 경쟁적인 세 철학들(스토아주의,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각각에서 택할 만한 조각들을 골라 그것들로부터 새로운 체계를 구성한 첼러적 의미의 절충주의자로 이해하기보다는, 외견상 상이해 보이는 그 철학들이 사실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면서 그 교설들 거의 모두를 온전히 받아들이려 한 혼합주의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의 윤리학과 인식론은 훌륭한 삶에 기여하는 철학이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훌륭한 삶은 확실한 앎의 확보에서 나온다는 점을 축으로 삼아 진정한 플라톤 사상을 재구성하려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런 플라톤 재구성에는 당시의 자료상, 전승상 한계로 인해 불가피하게 플라톤의 영향 하에 있는 유력한 두 그룹 즉 소요학파와 스토아학파의 논의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있느냐, 혹은 아카데미가 단일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며(바로 그 점이 스승 필론과 결별하게 만든 핵심 사안이었다), 폭넓고 유연하게 플라톤주의의 단일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게 안티오코스의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티오코스는 삶의 문제를 철학의 핵심 문제로 이해하는 헬레니즘의 시대정신을 공유한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헬레니즘 시대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인 학파적 당파성과 거리를 둔 인물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학파 중심의 논의 구도가 횡행하는 당대에 스토아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적극적으로 끌어 안는 안티오코스의 행보는 ‘내부의 적’ 취급을 받기 십상이지만, 학파의 경계에 국한되지 않고 남겨진 플라톤의 흔적들을 모아 구성해 보고자 하는 플라톤주의자의 진지한 탐색이라는 점을 평가해 주는 관점도 가능하다. 그리고 철학자라면 일가견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것도 일정한 체계를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관은 플라톤이 그토록 저항했던 것으로 보이는 체계, 도그마를 플라톤에게 되돌려 주려는 플라톤주의자의 노력이기에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전통의 상당 부분이 플라톤주의자들의 것이었다는 점, 특히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 이후 근 300년 동안은 플라톤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작업을 독점하다시피 했다는 점은 설명이 필요한 대목인데, 우리는 그 설명의 실마리를, 플라톤주의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최초의 인물인 안티오코스에서 찾을 수 있다. 헬레니즘의 마감과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전통의 시작이라는 중요한 철학사적 전환이 필론과 안티오코스의 논쟁에서 싹텄던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를 통해 우리는 기원전 1세기 아카데미에서 회의주의, 스토아주의, 플라톤주의 등을 둘러싼 활발한 담론 경쟁이 어떤 방식으로 펼쳐졌고, 또 이후 철학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명히 알아 볼 수 있게 된다. 철학이 과연 살아 있는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산출했던 이전 희랍의 활력은 어디 갔는가 등의 의구심의 대상이 되는 그 시기에 철학이란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어떻게 기존 철학사를 재평가하면서 사유 실험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갔는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직 이 시기로까지 시선을 돌릴 여유나 역량이 마련되지 않은 우리 학계에서 본 연구의 결과물의 공유를 통해 새로운 논의의 장이 열리게 되면, 우리는 기원전 1세기 철학자들의 고민에서 우리 자신의 고민과 맞닿아 있는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위대한 거장 철학자들이 남겨 놓은 유산을 가지고 어떻게 철학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헬레니즘 말기 철학자들의 모습은, 서양에서 받아들인 지적 자산을 가지고 어떻게 우리 철학을 만들어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 아주 닮은꼴이다. 그들의 작업을 절충으로 이해하든 혼합으로 이해하든 간에, 새로운 것, 독창적인 것, 순수한 자기 고유의 것을 고집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 것을 만들어 가려는 그들의 열린 학문 자세, 치열한 자기 반성, 대립과 경쟁을 통해 해체와 파괴가 아닌 조화와 종합을 이루어내는 지혜는 우리 철학이 자주 꺼내 들고 비추어 볼 거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안티오코스는 아카데미 안에 있으면서도 대척점에 서 있는 스토아주의를 과감히 받아들이는 유연성을 보여 준다. 왜 ‘우리 것’ 아닌 ‘남의 것’을 수용하여 우리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아카데미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가 최종 귀의처로 삼고 있는 정신적 스승 플라톤은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향연>에서 이 문제에 관해 명쾌하게 대답해 주고 있다. 에로스가 잃어버린 ‘자기 것’을 찾아 온전해지려는 욕망이라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즉 플라톤은) ‘자기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것’이냐가 관건이라는 생각을 개진하고 있다. 스토아주의가 정말 훌륭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물론 별도로 따져 보아야겠지만,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고 ‘훌륭한 것’을 좇아가려는 안티오코스의 태도만큼은 플라톤을 제대로 배우고 따르는 일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21세기 한국에서 고대 서양 철학을 논하고 이를 바탕으로 철학함을 수행하는 일도, 철학의 위기 혹은 종말을 의심 받는 기원전 1세기 철학자들의 철학함 만큼이나 절박하고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연구자들의 개별적인 역량 배양 못지않게 국제 활동력과 교류가 관건인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기획된 본 연수를 통해 기원전 1세기 철학이라는 우리 학계에 낯선 분야가 적절하게 수용될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연구 인력 네트워크의 구축을 통해 연구 성과의 질적 고양을 성취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 색인어
  • 헬레니즘, 후기 헬레니즘(Post-Hellenism), 아카데미, 플라톤주의, 중기 플라톤주의(Middle Platonism), 회의주의, 퓌론주의, 도그마티즘, 스토아주의, 절충주의(Eclecticism), 혼합주의(Syncretism), 오류 가능주의(Fallibilism), 판단 중지(Epoche), 파악 인상(Kataleptike phant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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